[Opinion] 조국을 위해 바다로 나간 자들의 이야기 [영화]

<울프콜>; 잠수함이 적군에 탐지됐을 때 울리는 늑대의 울음 소리와 닮은 경고 신호
글 입력 2020.03.21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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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력이 어떻게 되세요? 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대략 0.5 정도에요.’ ‘왼 눈은 1.8 오른 눈은 1.2에요.’ ‘안경 압축을 3번이나 해야 하는 심한 마이너스에요.’와 같은 대답처럼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본인 시력을 얼추 알고 있기 마련.


그럼, 청력이 어떻게 되세요? 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노화 혹은 청각에 특별히 어려움이 생겨 진단을 받은 이들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나는 시각보다 청각에 극도로 예민한 편이지만 그럼에도 내 청력을 외고 다니진 않는다. 이렇듯 통상적인 경우 인간은 청각보단 시각에 의지하고 보다 민감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통상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곳도 분명히 존재한다.

안토닌 보드리 감독은 우리를 그곳으로 이끈다.

 


Il y a trois sortes d'hommes :

인간은 세 종류로 나뉜다.

 

les vivants,

산 자 

les morts,

죽은 자

et ceux qui sont en mer.

 바다로 나간 자

 

 

Aristote

 아리스토텔레스


 

영화는 위의 경구와 함께 막을 올린다. 바다로 나간 자는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니라는 뜻으로 읽히는데, 이는 바다가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세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소개하려는 이 영화, <울프 콜>은 수면 위가 아닌, 수면 아래의, 우리가 닿을 수 없는 아주 깊고도 먼 곳에서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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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 콜>은 갈등을 빚는 러시아와 유럽의 국제 정세를 기회 삼아 핵전쟁을 촉발하고자 하는 테러리스트들의 음모를 배경으로 삼는다. 주목할 점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상공을 가로지르는 핵미사일을 통한 핵전쟁이 아닌 핵미사일을 탑재한 잠수함을 통한, 심해에서 발사되는 핵전쟁이라는 점이다.


영화에는 두 대의 프랑스제 잠수함이 등장하는데, 핵을 원료로 한 핵 추진 공격 잠수함 SSN과 핵을 원료로 쓰면서 핵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핵탄두 미사일 잠수함 SSBN이다. 전쟁과 무기에 무지한 내겐 꽤나 낯선 소재였지만 실제로 프랑스는 6개의 핵잠수함 보유국들 중 하나라고 한다.


외교관이었던 감독의 경력 덕분일까, 영화는 이러한 국제 정치와 전쟁 발발의 위기를 현실감 있게 면밀히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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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귀라는 별명을 가진 주인공 샹트레드는 프랑스 해군의 음향 전투 분석가이다. 외부의 무엇도 볼 수 없는 잠수함 안에서는 오로지 청각에만 의존해야 하기에 음향 탐지사, 약칭 음탐사의 역할이 중시된다.


음탐사는 잠수함의 눈인 동시에 귀가 되어 물결의 파동을 듣고 음향 신호를 파악하고 음향 특성을 식별해내야 한다. 미세한 진동과 음파로 바깥의 상대가 고래인지, 아군인지, 적군인지 어떤 기종의 잠수함인지까지 알아내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21세기에 이러한 역할을 AI가 아닌 인간이 해낸다는 것도 놀랍지만, 인간이 해낼 수 있다는 것에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샹트레드를 총애하는 함장 그랑샹은 잠수함을 총괄하는, 잠수함 안에서의 최고 권위자이다. 인정받는 지휘관인 그는, 불안정한 정세 속 해군 제독의 명 아래 핵미사일 잠수함의 함장으로 승진, 출항하게 된다. 머지않아 그는 대통령으로부터 러시아를 향한 핵미사일 ‘즉각 발사 명령’을 받게 되는데, 이 명령은 절대 번복할 수 없고 명령했던 대통령조차 취소할 수 없다는 특징을 가지며 전쟁 억지력에 준수한다.


하지만, 명령이 하달된 이후에야 테러리스트들의 덫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군 관계자들은 발사를 막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지만, 목숨보다 절차가 중시되는 핵잠수함에는 닿을 길이 없다.


극한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존재하는 절차인데, 절차로 인해 극한의 상황이 야기된 아이러니한 진퇴양난에 처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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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대재앙을 막기 위해 아군이 아군을 격침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데, 필자는 이점을 영화 감상의 키포인트로 꼽는다. 적군은 등장조차 않고 아군끼리의 전투라니. 동고동락했던 동료를 죽음으로 내모는 과정에서, 우리 관객은 군인이기 이전에 인간이기에 동요하고 갈등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가여우리만치 잔인하다.


전투는 그들의 책임이 아니었기에. 육지의 제독은 제독의 역할에, 심해의 함장은 함장의 역할에, 부장은 부장의 역할에. 그렇게 모든 군인과 승조원들은 조국의 안위와 평화를 위해 명령에 복종하여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해냈을 뿐이다.


혼돈의 전투 속에서 핵미사일 발사를 몇 초 앞두고, 그랑샹 함장은 절차가 아닌 부하를 택한 채 가라앉는다. 내내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보여주었던 지휘관은, 마지막 순간까지 올바른 판단을 내려 진정으로 리더의 역할을 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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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16분의 러닝타임 동안 깊은 바다처럼 어두운 상영관에서 스크린 속 이들과 함께 항해하는 듯했다. 뛰어난 음향 효과는 나로 하여금 망망대해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만들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바닷속에서는 누가 살아남아 지상의 빛줄기를 잡을 것인지 누가 우주처럼 광활한 이곳에 잠겨 죽을지 예측할 수 없기에 두려움과 공포감이 살갗을 스쳤다.


영화적인 측면에서는 다소 투박하다고 평가받을 수도 있지만, 감독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만으로도 웰메이드 전쟁 영화가 아닐까 싶다. 부끄럽게도 필자는 프랑스 영화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는데, <울프 콜>은 나의 편협한 선입견을 허물기에 충분했으며 낯선 언어는 영화 자체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필자가 꼽은 명대사들을 소개하며 이만 글을 마무리한다.

 


"3000년의 문명이 가져온 건 평화가 아니야. 겨우 전쟁 억지력이지."


-도르시 / 티탄함 함장



"잘 다뤄진 잠수함은 바다보다도 조용하다"


-그랑샹 / 무적함 함장

 


"심해에서 늑대 울음이 들립니다."


-샹트레드 / 음향탐지사



"우리는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일 뿐이야."


-그랑샹 / 무적함 함장



"평생 절차를 준수하라고 가르쳐왔네! 조국을 지키려면 절차를 믿어야 한다고.그런데 이제 와서 저 아이들을 없애라고?"


-알포스트 / 해군 제독



"지금 싸우려는 건 우리 형제들입니다!"


-도르시 / 티탄함 함장




 

P.S. 영화를 보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들린 용산역에서 우연히 천안함 폭침 추모 사진 전시회를 보았다. 고결한 46명의 우리 해군이 부디 그곳에선 편히 쉴 수 있길 기도한다.



[강안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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