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인생이란 영화의 주인공은 '나'라는 것,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자신만의 리듬으로 오롯이 살아가기
글 입력 2020.03.13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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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제목처럼 경쾌하다. 영화의 흐름, 찬실이, 찬실이의 말투, 주변인들, 영화의 모든 요소들이 특유의 리듬을 만들어 서사를 이끌어 나간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인지 찬실이가 겪는 일은 정말 큰 고난이지만 그렇게 무겁지만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리듬은 영화가 끝난 이후에 더 큰 울림을 주었다. 정말 좋은 영화는 영화가 끝난 이후에 관객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하는 영화라고 생각하는데,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이런 면에서 참 좋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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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일종의 성장 영화이다. 사전은 성장 영화를 “성장기에 경험하는 일과 감정 따위를 통해 아이들이 성숙해 가는 과정을 다룬 영화.”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찬실이는 성장기의 아이가 아니라, 한국의 40대 여성이다. 줄곧 ‘망했다’며 신세를 한탄하는 찬실이는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형 주인공은 아니다. 하지만 찬실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특유의 경쾌함으로 이겨낸다.


주인공이 40대 여성이라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페미니즘이 문화예술계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 시작하며 과거와 달리 여성 중심 영화가 많이 등장하고는 있지만 중년 여성이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영화는 여전히 많이 부족하다. 사실 영화가 아니더라도 현실의 많은 부분에서 40-50대 여성의 존재는 쉽게 지워진다. 존재하더라도 누군가의 아내 혹은 누군가의 어머니라는 고정된 이미지로 소비된다. 하지만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찬실이는 누군가의 아내도, 누군가의 어머니도 아니라 오롯이 ‘찬실’ 그 자체로 등장한다.

 

찬실은 영화를 사랑했고, 그래서 영화를 만드는 일에 자신의 청춘을 모두 갈아 넣었다. 그렇게 영화 프로듀서로 열심히 일을 하던 찬실은 계속해서 같이 일해왔던,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같이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지 감독의 죽음으로 인해 단숨에 실직자가 되어 버린다. 찬실의 말대로 그녀는 ‘완전히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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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활동을 하지 못하는 것도 큰 문제이지만 찬실은 삶의 방향을 완전히 잃어버린다. 영화를 자신의 삶의 전부라고 생각했기에, 실직은 찬실에게 삶의 방향을 상실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영화 프로듀서가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묻는 주인집 할머니의 물음에 “저도 이제 잘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하는 찬실은 자신의 존재 가치도 잊어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이때의 찬실은 자신의 인생을 한탄하다가 모과나무를 멍하니 바라본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못생기고 맛도 없는 모과를 찬실은 현재의 자신의 모습과 동일시했을지도 모르겠다.


찬실이 그렇게 무너지게 된 것은 영화를 자신의 삶의 전부라고 여겨왔기 때문일 것이다. 일이든, 사람이든, 신념이든 무엇인가 하나를 그토록 열망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에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은 참 멋지고 대단한 일이다. 그렇게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거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정말 위험한 일이다. 상실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고, 그 방식은 보통 굉장히 갑작스럽기 마련이며 그럴수록 상실의 아픔은 더욱 깊다.

 

하지만 찬실은 영화의 슬로건, “극복은 셀프! 행복은 덤!”에 맞게 마냥 아픔에 함몰되지만은 않는다. 그녀는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남기를 택한다. 그러자 지난 세월 동안 일복만 터지던 찬실은 새로운 ‘복’들을 만나게 된다. 그 복은 다름 아닌 찬실 주위의 사람들이다.

 

 

‘근심 소’와 ‘피할 피’라는 이름에 걸맞게 무엇이든 잘 잊어버리는 친한 배우인 소피

 

비록 찬실 혼자만의 썸이었지만 아무튼 10년 만에 등장한 남자, 영

 

글은 모르지만 여느 할머니들처럼 인생은 아주 잘 아는 집주인 할머니

 

사람인지 귀신인지 알 수 없는 신비한 인물, 장국영.



영화 <벌새>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이 인물들이 직접적으로 찬실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들과의 만남, 함께 보낸 시간, 서로에게 건내준 서로의 일부를 통해 찬실은 스스로 변화와 성장의 문을 열 수 있게 된다. 근심이 많은 찬실과는 정반대의 인물이자 끊임없는 지지를 보내주는 소피도,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해주었으며 동시에 영화에 대한 다른 태도를 알게 해준 영도 중요한 인물이지만 집주인 할머니와 장국영이 역할이 참 인상이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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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할머니의 글 공부를 도와주며 가까워지게 된 그들은 생활을 공유하고 마음을 공유한다. 할머니가 툭 내려놓는 말들은 찬실이 벽을 마주할 때마다 그것을 뚫고 지나갈 수 있도록 문을 만들어준다.

 

“나는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아.

대신 애써서 해”


주인집 할머니의 말은 한평생 자신의 삶의 목적이 영화에 있을 것이라고 믿고 달려왔던, ‘시집은 못 가도 영화는 계속 찍고 살 줄 알았’던 찬실에게 새로운 시각을 심어준다. 자신이 보내는 매일 매일, 그러니까 '오늘'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 것이다.

 

장국영은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미스터리의 인물이다. 추측해보건데, 찬실에게 가장 필요한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그녀의 가장 가슴 깊숙한 곳에 있는 자아 한 조각이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등장한 것은 아닐까. 물론 장국영은 요정처럼 찬실의 소원을 들어주지는 않는다. 그저 찬실과 대화를 할 뿐이다. 그는 끊임없이 찬실에게 질문을 던진다.

 

“영화 없이 살 수 있는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찬실은 영화 전반에 걸쳐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아간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지 감독으로 추정되는 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로 “영화는 숫자가 아니야. 별 하나, 별 두개도 아니야, 영화는…” 이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대체 영화가 무엇인지 설명하기도 전에 대사가 페이드아웃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관객은 그 대답을 찬실과 함께 찾아가야 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찬실은 커다란 달을 보며 “믿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이라고 읊조린다. 이것이 바로 영화의 시작에서 관객들에게 던져준, 그리고 찬실이 계속해서 자문한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가 아니라 인생 자체에도 대입해 볼 수 있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믿고 싶고, 하고 싶고, 보고 싶은 것들이 찬실의 삶을 정말로 채워줄 것이다. 찬실이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것도, 영화를 다시 해보겠다는 선언이자 동시에 자신의 삶을 직접 채워나가겠다는 의지가 담긴 행위라고도 할 수 있겠다.

 

찬실은 소피의 집에 있던 책에서 한 구절을 발견한다.

 

 

수처작주 입처개진

: 그대들이 어디를 가나 주인공이 되니. 자기가 있는 그곳이 모두 참된 곳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삶을 다른 존재에 담보하지 않고 오롯이 살아가야 한다. 그 무엇도 나를 대신해서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각자만의 영화에서 주인공이다. 이 새삼스러운 말을 다시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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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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