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변하지 않는 일상이란 없다 [영화]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 대한 고찰
글 입력 2020.03.06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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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되면 언제나 꺼내 보는 영화가 있다.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시간을 달리는 소녀>다. 파란 하늘과 짧은 머리를 휘날리며 달리는 주인공 마코토에게는 여름향기가 났다. 그의 청춘은 죽을 만큼 달려 뜨거워진 얼굴에 시원한 라무네를 올려놓는 느낌이다. 싸르르 하지만 열기는 아직 가시지 않았다. 뜨거움이 마치 영원할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내 식을 거란 걸 안다. 영원한 건 없다.


평범한 일본의 이층집에서 요란하게 일어나며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명랑 소녀, 마코토는 우연한 계기로 타임 리프 능력을 얻는다. 필자라면 당장 비트코인을 하기 위해 썼겠지만 순수한 그는 노래방에서 10시간 놀기, 야구공 잘 받기 따위에 쓴다. 그에게 타임리프는 신기한 놀이에 가까웠다. 원하는 시간으로 마구 돌아갈 수 있는 편리한 놀이기구였다. 그런 그의 소소한 일상은 관객에게 아련한 기억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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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를 치고, 배구를 하고, 친구와 밥을 먹고, 혼자서 밥을 먹는 장면들. 이런 하늘이 있었나 싶을 정도의 파란 하늘. 그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을 영화는 천천히 보여준다. 감독은 마치 옛날 사진을 보여주듯이 노스탤지어의 시간으로 영화 전반부를 그려 나간다. 관객들은 이러한 장면들을 통해 ‘교복을 있던 그 시절’로 돌아가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느꼈던 운동장과 책상 냄새가 생각나듯이,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아득한 과거가 아닌 현재를 그려내지만, 그것을 그립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마코토에게 7월 13일은 운수 나쁜 날이었다. 여기저기 구르고 넘어지고 실수하고 결국 과학실에서 넘어져 이상한 호두껍데기를 부수고 만다. 변하지 않을 것만 같던 그의 일상에 조금의 변화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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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그는 칠판에 누가 썼는지 모를 ‘Time waits for no one'이라는 문구를 보게 된다. 그는 친구 유리와 문과에 갈지 이과에 갈지 고민한다. 아직 자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데 문과와 이과 중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시간이 왔다. 자꾸만 선택하라는 당혹스러운 시간의 기세에 그는 대면하기를 피한다. 그러나 시간은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아무리 망설이고 주저하더라도.


타임리프를 통해 마코토는 시간을 뛰어다닐 수 있게 된다. 명확하게 존재하던 시간의 규칙, 즉 과거가 지나면 현재가 오고 현재가 지나면 미래가 오는 순차적인 규칙을 그는 넘나들 수 있게 됐다. 명확하게 과거라고 하기에도, 그렇다고 이걸 현재라고 말할 수도 없는 알 수 없는 시간에 존재하고 있었다.


관객은 이를 통해 자신의 인생에서 타임리프를 경험한 순간을 되짚어 볼 수 있다. 인생에서 빠져버린 시간은 분명 있다. 순차적으로 왔다면 분명 있어야 하는 시간이지만 없는 시간. 왜 나에겐 어린 시절의 좋은 추억이 없을까, 나와 연인은 왜 싸우기만 할까. 어디 갔는지 모를 시간들과 그것에 대한 상실의 감정, 지독한 그리움. 이 감정들이 바로 영혼의 타임리프가 아닐까.


마코토의 일상으로 돌아와서, 그는 이제 변화한 시간 개념을 인지하지 못한 채 그저 인생 최악의 날을 다듬을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에 차있다. 아침 일찍 학교에 가고 쪽지 시험도 백점 맞고 가정 시간의 실수도 다른 남학생에게 넘겨버리고 열 시간 동안 노래방에도 갔다가 동생에게 빼앗겼던 푸딩도 먹는다. 언뜻 보면 완벽해 보이는 그의 시간 수정이지만 강제로 바뀌어버린 하찮은 시간들은 누군가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시간이었음이 영화가 진행되면서 드러난다. 이득을 본 만큼 누군가는 손해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이모에게서 듣지만 그는 호쾌하게 대답한다. “다시 돌아가면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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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의 단짝 친구 치아키, 고스케와 함께 야구를 하며 평화로운 일상을 즐긴다. 현재라는 이름으로 흘러가는 일상, 변하지 않을 거라 믿는 이 일상은 언제든 깨질 준비를 하고 있다. 세 명 구도는 항상 깨지기 쉽다. 하나라도 빠지면 완벽하게 모양이 흐트러지는 불완전한 모양. 고스케가 한 소녀에게 고백을 받고, 치아키가 마코토를 좋아한다고 말한 그 날, 그는 처음으로 이 일상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소중한 일상을 깨고 싶지 않다, 라는 마음으로 그는 치아키의 고백을 피한다. 그러나 과거로 몇 번을 돌아가도 치아키는 그에게 고백한다. 진심은 변하지 않는다. 돌아간 것은 단지 사건의 시간일 뿐, 감정의 시간은 돌아가지 않는다.


모든 걸 고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타임리프로도 치아키의 고백을 듣기 이전의 마음으로 돌아가게 할 순 없다. 치아키는 고백을 잊어도 마코토는 고백의 흔적을 깔끔하게 지울 수 없다. 만능이라고 믿었던 타임리프로도 흔적은 남았다.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던 시간에 대해 그는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다. 마코토는 사소한 곳에 타임리프를 쓰는 순수한 존재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시간이라는 개념에 무지했던 존재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시간을 고치고자 했다. 누군가를 해하려거나 나쁜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바꾼 그 시간 때문에 누군가는 상처를 받았다. 가정실습시간에 자신의 실수를 떠넘겼던 남학생이다. 그는 마코토에 대한 복수심으로 소화기를 던져버렸다. 마코토는 막으려던 치아키를 구하려고 타임리프를 썼고 결국 치아키를 대신해서 마코토의 친구 유리가 맞아버렸다.


지금껏 ‘나만의 시간’을 바꿔왔다고 믿은 마코토에게 시간은 ‘너만의 시간은 없어’라며 냉정하게 말한다. 그녀는 나만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시간이 사실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두가, 혹은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까지 연쇄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오롯한 내 시간이라는 건 없다는 사실. 시간이란 것은 모두와 연결되어 있고, 또 나의 삶조차 모두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진실을 알게 된다.

 

치아키의 고백을 피하느라 멀어진 둘 사이 틈을 친구 유리가 파고든다. 단지 고백을 듣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뿐이지만 마코토가 이미 그의 마음을 알아버린 이상 그들은 완벽한 과거로 돌아가지 못한다. 몇 번을 되돌려도 과거로 돌아가지 못한다. 이 고통스러운 진실과 마주했을 때, 그는 아무리 애를 써도 끝내 되돌릴 수 없는 ‘마음의 시간’을 깨닫는다. 시계의 시간으로도, 타임리프 시간여행으로도 되돌릴 수 없는 마음의 시간 속엔 모든 것이 남아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기만 했던 그는 치아키와의 관계를 통해 점점 성장한다. 치아키가 분명 자신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나 아닌 다른 누군가와 데이트를 하자 기분이 이상하고, 사귄 적도 없는데 마치 이별하는 것처럼 상실감이 밀려든다. 타임리프 때문에 시작조차 하지 않았는데 끝이 나버린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그 상실감은 후에 커다란 폭풍이 되어 밀려온다. 이제 그는 재미를 위해 타임리프를 하지 않는다. 나만의 시간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된 이상, 그에게 타임리프는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마법이 아니다.


그는 이제 자신의 타임리프 때문에 상처 받았던 이들을 위해 타임리프를 한다. 자신이 혼자 남을까봐 계속 곁에 있어주는 고스케, 그리고 그런 그를 좋아하는 여자아이를 위해 타임리프를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만 경험한 시간’ 속에서 방황하다가 그들의 시간에 잘못 개입한다. 결국 둘은 더 어색한 사이가 되어 버리고 만다. 이상하게도 시간을 되돌리고 고치려고 하면 할수록 시간은 그의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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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연속적으로 흐르니까 이것만 고치면 잘되겠지, 하는 믿음으로 인해 그는 자꾸만 실수를 반복했다. 그러나 모든 시간은 연결되어 있다. 어느 한 부분을 고치면 그 곳에 연결되어 있던 시간들 모두 변한다는 사실을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결국 고스케와 소녀는 한 번 죽었다. 넘어지고 구르며 고스케를 향해 혹은 냉혹한 시간을 향해 절규한다. ‘멈춰, 멈춰, 멈추라고!’


그 순간, 타임리프가 발생하고 잠시 멈춰진 세계에서 치아키는 마코토에게 자신이 미래에서 왔음을 고한다. 이곳이 좋아 예상보다 오래 있었고, 이제는 사라질 때가 되었다는 것도. 그는 미래로 돌아갈 마지막 타임리프도 써버렸기 때문에 낯선 시간 속에서 부유해야 했다. 마코토의 미성숙함으로 인해 어긋나기만 했던 그들의 시간이 처음으로 만난다. 그리고 그 순간, 마코토의 마음은 와르르 무너진다. 단순히 유희로만 했던 타임리프가 고스케를 죽음에 몰아넣고 치아키를 영영 볼 수 없게 만들다니. 지금까지 외면했던 치아키가 이별을 고하는 순간, 그는 자신에게 치아키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알게 된다.


마코토는 잃어버린 줄도 몰랐던 날아가 버린 시간들을 이제야 알아차렸다. 행복했던 순간에 항상 함께 했던 치아키를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그런데도 ‘변하지 않는 시간’을 위해 그를 피했던 어리석은 날들을. 끝나는 순간에야 발견한 첫사랑을 알게 되었다. 그는 고백의 시간을 잃어버렸음에 절망한다. 잃어버린 시간은 어쩌지 못함에 눈물 흘린다.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바로 너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는데, 그 순간 너를 잃어버려야 하는 이 시간만큼 고통스러운 게 있을까.


사람은 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소중함을 알까. 일상이었던 그가 사라졌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시간, 상실감이 찾아오고 그가 나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알게 된 것은 그가 떠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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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코토는 마지막으로 온 몸과 마음을 건 도약을 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발견한 후, 그는 치아키와 함께 했던 모든 기억 속으로 자신을 내던진다. 그와 함께 했던 모든 시간이, 너로 인해 울고 웃었던 모든 시간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이제 그가 알지 못했던 의미 없는 시간들이 저마다의 절실한 의미를 품어 안고 다시 그의 안에서 깨어난다. 그는 이 생의 마지막 타임리프로 인해 단지 시간을 돌린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함께 걸어온 시간을 되짚는다.


이제 그가 달리는 하늘 뒤엔 뭉게구름이 가득하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속도로 뛰어간다. 가장 사랑하는 일상을 놓아주기 위해.

 


[김명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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