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두울수록, 우리는 모닥불 주위에 가까이 붙어야 해 - 가리는 손 [도서]

김애란 작가의 가리는 손을 읽고
글 입력 2020.02.18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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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아래선 흑인 아이들은 파랗게 보인다.

 

- 영화 문라이트


 

제 89회 아카데미 수상작 <문라이트> 영화에 나오는 대사다. 저 대사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함축적으로 나타낸다. 달빛 아래 서 있으면, 그 사람이 동성애자이든 이슬람교를 믿든 백인이든 유색인종이든 그 무엇과도 상관없이 누구나 파랗게 보인다는 것이다.

 

김애란 작가의 작품 <가리는 손>을 읽고 나서 저 대사가 생각났다. 문라이트와 가리는 손은 같은 주제를 다룬다. 바로 혐오에 대해서다. ‘혐오사회’라는 제목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요즘 사회는 누군가를 혐오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된 것 같다. 이 소설은 일상이 되어버린 편견과 그 밑에 깔려 있는 혐오감을 주요 소재로 잡고 있다.

 

김애란 작가의 <가리는 손> 작품은 동시대성의 요구에 빠르게 응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다문화 가정, 이혼한 여성, 노인혐오……. 다양한 문제들을 한 작품 안에 잘 녹여 내림으로써, 김애란 작가는 혐오라는 감정이 한 단면으로 판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혐오에는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을 성공적으로 보여준다. 소설에서 유념해서 본 세 가지 소재를 파헤쳐 봄으로써, 이 사회의 얼굴이 되어버린 혐오에 대해서 고찰해보고자 한다.

 

 

 

첫번째 소재, 우럭의 뼈로 고아 낸 국물


 

이 소설에서 첫 번째로 집중했던 소재는 우럭의 뼈로 고아 낸 국물이다. 가리는 손의 화자는 자신의 어머니가 우럭을 넣어 만들어준 국물을 먹고 자랐다고 서술한다. 그녀는 강릉 사람이었던 어머니를 따라 자신의 생일과 재이의 생일에 미역국 대신 우럭을 넣는다. 그녀는 재이 출산 후 젖꼭지를 타고 흘러내리는 희뿌연 액체가 꼭 뼈 국물 같았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재이는 할머니 때부터 이어온 우럭 국물을 먹고 성장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있었기에‘사람답게’ 살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회상한다. 지금의 재이는 할머니 덕에 윤택한 유년기를 보냈고, 그녀의 사랑으로 성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뒤에 가서 밝혀지는 재이가 노인 혐오를 했다는 사실은 큰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불현듯 저 손, 동영상에 나온 손, 뼈마디가 굵어진 손으로 재이가 황급히 가린 게

비명이 아니라 웃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할머니의 사랑을 먹고 뼈마디가 굵어진 재이가 노인 혐오를 하게 되는 이중성을 김애란 작가는 날카롭게 포착한다. 혐오의 대상이 될 때도 있었던 재이가 노인 혐오를 하게 된다는 것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게 된다. 지하철을 탈 때, 노인분들로부터 재이는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한 마디씩 들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현실성 없는 이야기도 아니다. 김애란 작가는 혐오를 받는 ‘피해자’를 단지 피해자의 얼굴로만 그려내지 않는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기도 하는 혐오의 성격을 재이라는, 입체적인 캐릭터를 통해 보여준다.

 

사실 노인 혐오 관련된 기사를 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될 때가 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로부터 난 자식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할머니, 할아버지를 갖고 있을 텐데도, 쉽게 노인층을 혐오하게 된다. 재이가 손을 가리고 웃었다면,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재이에게 그 할아버지는 자신의 할머니와는 ‘다른 인간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노인이 어떤 자식을 가졌든, 어떤 인생을 살았든 청소년이들에게 그는 그저 ‘틀딱’일 뿐이다.

 

이렇게 하나의 정체성 –노인이라던가, 여성이라던가, 장애인이라던가-이 한 명의 개인을 뒤덮을 때 우리는 혐오를 쉽게 하게 되는 것 같다. 반 학급에 한 명쯤 있는, 반 친구인 다문화 가정의 아이 재이와 사랑하는 할머니라는 사람은 개인으로 보면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틀딱, 더러운 외국인 노동자라는 틀 안에서 묶을 때, 어느새 그들을 혐오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내 양심을 불편하게 찌를 개인의 얼굴들이 그 범주 안에서는 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갈기가 없는 사자 라이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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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은 사자인데도 갈기가 없는 캐릭터이다.

 

 

두 번째로 집중했던 소재는 라이언 인형이었다. 재이는 라이언 인형을 세 개나 갖고 있다. 소설에서 재이는 좋아해서 뽑은 게 아니라 가장 많아서 뽑게 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는 장면을, 나는 여러 번 곱씹으면서 다시 읽었다. 재이가 라이언 인형에게 애착을 갖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어서였다. 

 

라이언은 카카오 프렌즈의 사자 인형이다. 이 라이언 캐릭터에게는 큰 특징이 하나 있는데, 바로 수사자이면서 갈기가 없다는 점이다. ‘갈기가 없어 콤플렉스가 많은 수사자,’ 라는 코멘트가 그의 소개 글에 적혀 있다. 나는 라이언과 재이가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갈기가 없는 사자는 동료들로부터 겉돌 수밖에 없다. 재이가 엄마에게 ‘엄마는 한국인이라서 몰라.’라고 말할 때의 그 소외감을 라이언도 느꼈을 것이라 확신했다.

 

라이언과 재이의 가장 큰 공통점은 그들의 남과 다른 ‘차이’가 확연히 눈에 ‘보인다’는 점이다.재이와 라이언의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나는 질문하게 되었다. 우리라고 갈기가 있는 ‘정상적인’ 사자일까? 한국인이라는 범주에 묶여도 그 안의 사람들은 천차만별일 것처럼, 다르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남들과 ‘다르게’하는 우리의 ‘결핍’은 라이언의 갈기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일 뿐이지 우리 안에 각각 내재되어 있다. 지금 사람들은 갈기가 없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갈기가 없다는 것이 확연하게 보이는 대상을 향해 우리는 쉽게 그들을 비웃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를 통해서 안심하는 것이다. ‘다행이다. 나는 저렇게 다르지 않고 우리라는 이름에 속해있어.’

 

 

 

가면을 완전히 가리는 어둠


 

세 번째로 집중했던 소재는 ‘어둠’이다. 문라이트를 인용해서 말했듯이, 어둠은 참으로 공평하다. 그 사람의 생김새나 피부색과는 상관없이 모든 것을 가려주기 때문이다. 도입으로는 그 어둠에 대해 나는 긍정적으로 평했지만, 역시나 이중성이 또한 존재한다. 어둠 안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혐오하는 얼굴을 쉽게 드러낼 수 있다. 재이가 촛불을 불고 어둠이 내려앉을 때, 주인공이 재이에게 느꼈던 감정은 ‘낯섦’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직도 자신에겐 어린아이 같은, 사랑스러운 재이가 누군가를 ‘틀딱’이라고 부를 때의 그 낯섦. 그때 느끼는 공포. 내가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고 느꼈던 사람이 모르는 누군가로 변할 때 우리는 공포를 느낀다.

 


그 어둠 속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 재이 얼굴을 찾으려 나는 꼼짝 않는다.



이렇게 우리가 혐오라는 이빨을 드러내고, 낯선 사람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요즘 우리 사회를 포함해서 세계 전체에 어둠이 내려앉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혐오라는 이빨을 드러내도 가려주는 이 어두운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아빠랑 왜 헤어졌냐고?

-응.

-음……. 생각이 달라서?

-그럼 토론했어야지. 민주주의 사회에서.

 

재이가 생각 없이 뱉은 말 같은, 간단명료한 답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합적인 문제인 혐오에 대해 너무 단순하게 접근했다고 비판받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간단하고, 자명한 답을 우리가 외면했기에 혐오라는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도 들었다. 작품에 나오듯이 ‘이해’라는 것은 자리에 누울 땐 벗는 모자처럼 피곤하면 제일 먼저 집어던지게 되어 있다.

 

이해라는 것이 단박에 될 때도 있지만, 노력이 필요할 때 요즘 사람들은 그 과정을 쉽게 포기하는 것 같다. 노키즈 존이라는 공간이 생기는 맥락처럼, 사람들은 갈등을 피곤해하며 문제를 저 선 너머로 치워버린다. 그리고 게으르고 무지하다고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들을 대하는 것이다. 마음껏 혐오하는 것.

 

그들이 내 주변 사람, 또는 친구라는 개인의 얼굴로 맞닿게 될 때 우리는 절대 그들을 쉽게 혐오하지 못한다. 이해할 수 없다면 부딪치기라도 했어야 했다. 토론이라는 하나의 방식을 통해서. 하지만 우리는 ‘키즈’는 들어오면 안 돼,라는 논리처럼 저 사람은 외국인 노동자야, 유색인종이야, 여성이야라는 보이지 않는 선을 만들어 놓고서 그들을 밀어내 버리는 것 같다. 그런데, 막상 토론을 하다 보면 이런 딜레마에 빠지기도 한다. 너무 달라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딜레마 말이다.

 

 

 

다른 존재들인 우리가,

모닥불 주변에 모이길 포기하지 않는다면




불빛 아래서 우린 왜 조금씩 달라 보일까.


 

하지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에 너무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극히 당연하기 때문이다. 모자인 그녀와 재이도 불빛 아래서 조금씩 달라 보인다. 우리는 가족끼리 마음껏 싸우지만 결국 부대끼며 살아간다. 가정 안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이 사회도 그렇다 우리는 혐오하는 대상끼리 묶어놓고, 선을 그어서 ‘여기 넘어오면 안 돼!’라는 방식으로 살 수 없다. 필자가 아빠와 피 터지게 싸우면서도 차라리 토론을 하지, 침묵하지 않는 이유는 결국 함께 살고 싶기 때문이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잠시 가스레인지 불꽃을 바라본다. 태곳적 사람들도 저녁에 불을 피웠겠지. 춥거나, 허기 지거나,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고 싶을 때. 지금은 그중 어느 때일까?

 

태곳적 사람들도 저녁에 불을 피웠겠지. 춥거나, 허기 지거나,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고 싶을 때.



<가리는 손>의 화자는 저 대사를 두 번이나 반복한다. 여기서 나는 김애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고 느꼈다. 사람은 절대로 혼자 살 수 없는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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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시대 선조의 모습을 살짝 살펴보면, 모두가 두려워하는 어둠 아래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함께 모여 있을 게 그려진다. 우리 사람은 춥고, 허기지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니까. 다양한 모습이 함께 살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다른 그들은 결국 또 다른 나이다. 그들이 받아들여지는 사회라면, 나다운 ‘나’도 받아들여질 사회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모두가 달라 보이는 불빛 아래에서 우리가 모여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기도 하고, 싸워보기도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른 생김새들을 가진 얼굴들이 결국 모닥불 아래에서 같은 빛깔로 환히 빛나고 있다는 것을 언젠가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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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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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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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페셜스튜핏
    • 좋은 책이라고 듣긴 했는데 이렇게 통찰력 있는 메시지를 담고있었군요. 제목의 표현에 홀린 것처럼 들어왔다가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모닥불의 비유도 책의 해석과 찰떡같이 달라붙습니다 ㅎㅎ감사합니다
    • 1 0
    • 댓글 닫기댓글 (1)
  •  
  • 햇빛바다
    • 2020.02.23 16: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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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고
    • 스페셜스튜핏안녕하세요 스페셜스튜핏님 좋은 글이라 해주셔서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귀한 피드백을 받게 될 거라 예상하지 못했기에 많이 놀랐습니다ㅠㅠ 이렇게 깜짝 선물 같은 피드백에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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