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장애'라는 유령이 나타났다 - 철학, 장애를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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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이라는 유령
나의 인생 중에서 '장애'라는 단어가 실제 생활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생 1학년 때 쯤 부터였다. 그때 사용된 '장애'나 '장애인'은 '병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하나의 욕설로 통용되었다. 그 단어들은 딱히 실체가 있는 욕설은 아니었다. 그 단어는 막연한 욕설인 '찐따', '가난뱅이', '바보'와 종종 함께 사용되었다.
당시의 우리에게 그 단어를 쓴 이유를 묻는다면, "그냥 별다른 의미는 없고, 모자란 하는 애들한테 하는 욕이에요" 정도라고 이야기 했을것이다.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면, 당시의 아이들에게도 무엇이든 혐오의 대상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때 아이들이 사용한 '장애인', '병신'이라는 단어에는 도태에 대한 은근한 불안이 내재되어 있었다. 사회는 아이들에게 승리를 주입했고, 승리와 경쟁을 내재화한 아이들은 희생자가 필요했다.
그 단어는 종종 '돼지', '찐따'와 같은 단어로 치환되었다. 이름이 뭐가 되었건 '장애인'은 결함있는 대상이었고, 사회에서 물어뜯어도 되는 존재들이었다. 아이들은 예민하게 피냄새를 맡고, 누군가를 약자로 만들어 물어뜯곤 했다. 나에게 '장애인'은 현대자본주의의 그림자가 아이들에게 드리운 하나의 차별 용어 중 하나로 기억된다. 굳이 '장애인'이 다른 욕설보다 더 자주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들의 눈으로나, 어른들의 눈으로나 그들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고 텔레비전 같은 대중 매체에서 명백히 결함 있는 존재로 방영되기 때문이었다.
당시 내가 경험한 공동체에서 장애인이 철저하게 숨겨진 존재였다. 내가 생활한 환경에 장애인은 없었다. 초등학교 때 없었고, 중학교 때 없었고, 고등학교 때도 없었다. 도서관에서 틱 증상을 보이는 학생이나, 지하철에서 무언가 불편해 보이는 아저씨를 보아도 그건 특이한 일이었을 뿐, 실체가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기묘한 일이다. 통계 지표상에서 그들은 많은 수로 존재하는데, 우리의 주변에는 없었다. 그래서 장애라는 단어는 세상에서 제일 가벼웠다. 겁 없이 친구들과 "영수는 장애인이야"라고 장난스럽게 이야기해도, 뉴스에서 나오는 장애인들에게 기부하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게 내가 경험해온 사회에 장애인이 존재하는 방식이었다. 그들은 존재하지만, 일반적인 생활이나 사회 속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장애라는 단어는 존재했지만, 그 단어를 진단받은 사람의 실체를 지니지 못했다. 이제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회의 인식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휠체어를 끄는 사람들은 우리 학교의 이 층도 올라갈 수 없었다. 지하철에 설치된 휠체어 운송기는 유치한 노래를 크게 들려주면서 천천히 내려왔다. 장애인들을 돕는 보조 교사도 미비했고, 하다못해 당시에는 전문적인 상담을 할 수 있는 교사도 없었다. 가끔 성교육과 함께 묶여 배치된 장애인 교육에서는 그들을 '기부의 대상'이나 '불쌍한 사람'으로 취급했다. 그래서 우리는 미숙한 어린아이의 정신에만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 없다.
내가 만난 '장애인'이 아닌 장애인들
무언가 장애인이라는 개념이 현실에서 실체를 가지기 시작한 것은 대학교에 들어오고서부터였다. 2014년 당시 사회문화에서 여전히 그 단어들이 실체가 있게 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도 모 커뮤니티의 사용자들이 자신들을 휠체어 끄는 '장애인'들이라 자처하고, 몇몇 BJ들이 욕설의 한 종류로써 그 단어를 사용했다.세상은 여전히 장애인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았고, 사람들도 그에 대해 진지한 성찰은 하지 않았다.
스무살 때의 세상은 바뀌지 않았지만, 나의 환경은 변화했다. '장애인'이라는 단어에 내가 미묘한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정신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봉사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처음 봉사활동을 할 때는 한 명의 성숙한 시민으로서 좋은 사회에 기여해야겠다는 막연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봉사활동을 지원할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습다 못해 위선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내가 받은 오랜 교육은 그들을 도와줘야 할 사람으로 정의했다. 애당초 그들은 성숙한 시민을 위한 봉사활동의 대상이었다. 막상 만난 '장애인'은 실체를 가지고 있었지만, 막상 봉사활동을 하면서 '장애인'이라는 단어는 다시 기묘한 단어가 되었다. 내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기원하고 기대한 대로 그들과 나 사이에 뭔가 본질적인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기억나는 사건 중 하나로, 한 번은 정신장애를 진단받은 사람들과 함께 외부 야유회를 나간 일이 있었다. 내 또래의 친구가 봉사자가 아닌 장애인으로 있었다. 지적장애를 진단받았다고 하는데, 확실히 그런 면에서는 무언가 어색한 말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같이 영화를 보러 나갈 때, 또래였던 탓에 그 친구와 나란히 이야기하면서 걸었다. 그러던 중 학교 이야기가 나오고, 그 친구가 자기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심각한 따돌림을 당했다고 이야기했다. 이야기의 무게에 맞춰 나 역시도 어린 시절 따돌림을 당했고, 그 사건들의 끔찍한 영향력을 알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비가 오던 날이었는데, 그 친구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우산을 들고 있지 않은 내 다른 한 손을 잡으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너도 힘들었겠구나, 나도 알고 있어."
나는 아직도 그때 양손을 잡아주고 눈을 마주치던 그 아이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처음에는 솔직히, 화가 났다.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동정심에 대한 반발심이 반, 누군가에게 완전히 치료되지 못한 상처를 까발려진 사실에 대한 당혹스러움이 반이었던 것 같다. 다음엔 그런 나 자신을 발견한 사실에 떨떠름해졌고, 그 다음에는 그녀가 진심으로 그런 말을 했다는 마음이 찡하게 울려왔다. 교육의 결과로써의 동정이건, 나도 모르게 챙기고 있었던 천박한 심리적 이득이건, 그 짧은 순간 그녀는 내가 익숙한 '장애인' 뭐시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나의 입장을 최선을 다해 고민해준 것 뿐이다. 특별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라는 인간이 나라는 개인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이 '비장애인'들과 비교해 특별하고 유별나지도 않았다. 사회의 무관심에 휩쓸려 남용되던 '장애인'이라는 단어에 그녀는 어울리지 않았다. 교육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장애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해 여러번 훑은 지금도 그녀는 나에게 '장애인'은 아니다.
이런 고민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어져 왔고, 학습장애, 주의력 결핍 장애와 같은 '장애'의 표찰을 단 아이들에 관한 공부를 하겠다고 결심한 지금도 어려운 문제다. 학생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적응을 위해 돕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지만, 그들을 단순히 결함에 따른/중재가 필요한/나약한 존재로 바라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공부하면서 정의와 선별, 중재 프로그램의 개발과 효과성에 대해서는 접해보았지만, 그들의 실존과 철학적 문제를 마주한 적은 적다. 내가 접한 '장애'는 어떤 어떤 결함이었을 뿐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무언가 답이 필요했고, 그에 대한 답 중 하나로 이 책을 받아들였다.
장애에 관해 철학이 이야기 하는 법
<철학, 장애를 논하다>는 결코 가벼운 책이 아니다. 책 두께도 두껍고, 내용 자체도 쉽게 읽히는 편은 아니다. 대체로 이 책은 다양한 주장을 소개하고 근거를 제시하는 등 명쾌하게 논리를 전개하고 있지만, 다른 철학적 문제가 그렇듯 속 시원한 대답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본 도서가 논문들을 묶은 책이기 때문에 같은 철학 분야의 서적들보다 이해하기 쉽고, 무엇보다도 장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준다.
이 책의 가장 멋진 점은 지금까지 얕은 수준으로 논의되어온 장애학을 진지한 철학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점이다. 교육심리학 공부를 하는 나로서는 온통 새로운 관점들의 연속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기본적으로 교육심리학은 교육학과 심리학의 결합이기에, 객관적인 선별과 정의와 그에 따른 중재 프로그램을 중요시한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심리학계에서 장애인들의 실존, 철학적 문제에 대한 고찰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다. 물론 최근 장애 관련 학회지에서 장애라는 표찰과 그 영향력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논의하는 논문이 발표된 바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만나는 장애에 대한 철학적 고민이 중요한 이슈로 올라온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서적이 국내에 발간되었다는 것은 아주 큰 의의가 있고, 개인적으로도 매우 기쁘다. 책이 제시하는 철학적 문제가 장애와 상호작용하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진지하게 논의되어 실제 장애에 대한 정의와 정책에 반영되길 바란다.
책은 크게 형이상학, 정치철학, 윤리학으로 나뉘어있다. 책의 목차가 처음 읽을 때는 잘 와 닿지 않았지만, 철학의 다양한 관점에서 논리를 전개한다는 면에서 목차의 이름은 적절하였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것은 '형이상학' 파트의 다양한 이슈다. 이 섹션에서 우리가 어렴풋이 장애라는 개념에 대해 해왔던 의심과 모호함을 다양한 학자가 장애라는 개념을 본질적으로, 인식론적으로 어떠한지에 대해서 서술한다. 저자는 장애를 정의하는 의료적 모델, 사회적 모델을 소개한다. 의료적 모델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한 것으로, 장애를 의료적인 기준에 따른 결함으로써 정의한다. 하지만 그 또한 정상성의 원리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가치지향적이며, 이에 따라 한 인간의 존재를 결함으로 정의해 표찰을 내리는 것에 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이 정의 파트가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극단적인 사회적 모델에 대해 비판한다는 점이다. 사회적 모델은 장애를 실제 손상과 사회적 시스템이나 인식과 같은 사회적으로 발생하는 일종의 사회적 구성개념으로 나눈다. 예를 들어 안경이 발명되지 않았다면, 우리가 모두 장애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경을 발명되면서 안경을 끼는 사람들은 시력이 낮다는 손상이 존재할 뿐이지, 장애인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투박하게 이야기하자면, 이 관점에서 장애는 사회 시스템이 만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역시 모든 개인이 공유하는 사회적 목표인 정상화에 기반이 있으며, 장애인들 역시 비장애인들이 누리는 것과 같은 이상적이고 정상적인 상태에 참여할 수 있는 미래를 기대하고 투쟁한다고 비판했다.
저자가 최종적으로 제안한 것은 장애인들의 행위 주체성이다. 행위 주체성은 어떤 개인이 그들의 환경이나 다양한 예기치 못한 요인에 대한 통제력을 갖지 못할 수 있지만, 그 요인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 스스로라는 것이다.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내린 결론은, '장애' 라는 단어는 철폐되어야 하는 것에 동의한다는 것이다. 애당초 이질적인 특성을 공유한 사람들에게 고루 적용한다는 것 자체가 비논리적이며, 교화와 교정의 은근한 암시가 있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윤리적이지 않다. 저자가 주장한 바와 같이, 장애의 정의는 그들의 행위 주체성에 따라 달라져야 할 것이다.
2부의 정치철학은 '사회의 구조화'라는 폭넓은 범위로 장애를 논의한다. 좋은 제도가 반드시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쁜 제도는 반드시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지 않는가? '나쁜 사회제도'가 되지 않기 위해 이상적인 사회 제도를 논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헤이키 이케헤이모는 대인관계론적 인격을 끌어내어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인격'이란 자신과 관련된 구체적인 타인들로부터 인정적 태도를 수신하는 주체다. 이러한 인격체로 상정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있다. 우선 그 자신이 권한을 가진 존재라는 존중(respect)이 있어야 하며, 누군가의 행복이나 좋은 삶에 마음을 쓰고 기여할 수 있는 존재여야 하며, 타인에게 기여의 측면에서 가치 있는 존재여야 한다. 장애인들이 사회에 통합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대인관계적 인격체로 인정받아야 한다.
마지막 윤리학 파트에서는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기반으로 한다. 셰르밋이 농인 사회와 언어에 대해 제기한 부분은 비교적 익히 알려져 익숙한 부분이었다. 외국에서는 이미 농인 사회가 하나의 커뮤니티로 형성되어, 농인 대학교도 있다고 들었다. 이런 현상이 멋진 이유는 그들을 결함 있는 존재가 아닌, 수화와 같은 하나의 소수 언어의 사용자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조엔 파이버그 역시 농인과 관련된 이슈를 다루고 있는데, 농인 사회를 하나의 선택될 가능성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좋았다. 윤리학 파트는 다른 파트보다 장애학의 최신 이슈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장애인 선별 검사와 같은 사례는 비단 장애인뿐만 아니라 국내의 남아선호 사상을 떠올리게 했다. 이 부분에서 차별과 혐오 문제는 같은 결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주관적 맺음
솔직히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여전히 장애는 가시적이고 혼란스러운 개념으로 다가온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할 수 있는 적용에 관련한 고민이 있었다. 내가 특별히 다른 길을 가지 않는다면, 나는 앞으로 '장애'라는 표찰을 받은 친구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어린아이들에게 장애라는 표찰은 더 무겁다. 이 책이 개인적으로 특별한 것은, 이 책을 통해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더 많아졌다는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아이들에게 편안한 언어로 이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다.
또 개인적으로 실제 연구와 지원에 이를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많은 고민이 되었다. 차후 예산 편성과 연구의 지속을 위해서 장애는 어느 정도 정의되어야 하는 면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장애라는 표찰을 지양하고, '특수학'이라는 이름 아래에 증상에 초점을 맞추어 각 장애를 이야기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철학적 문제가 좀 더 학계에서 적극적으로 수용되는 것이다. 몇몇 선생님들이 길을 깔고 있지만, 여전히 특수교육학, 심리학, 의학 연구에서는 장애인의 진단과 적응에 초점을 맞춘 중재프로그램 위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대학교나 대학원 수업에서도 '장애철학'은 낯선 개념이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바라는 진정한 통합을 위해서 장애에 대한 철학적 고민은 필수적이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장애인의 자기긍정, 자기옹호, 자기결정과 같은 기술에 관한 연구와 프로그램 개발에 관한 연구와 정책적 지원이 더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고민에서 몇 걸음 떨어져 책을 읽은 한 개인으로써 이야기해보자면, 장애라는 단어는 반드시 사라져야 하는 것 중 하나다. 결함을 중심으로 구성된 개념이고, 차별을 일으킬 수 있는 단어다. 개인으로써 해야할 일은 명백하다. 그냥 그들을 온전한 한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책에서 반복적으로 이야기했듯이, 이 문장은 단순히 얄팍하게 주입된 도덕성을 기반으로 한 문장이 아니다. 그들이 진단받은 장애는 한 사람의 삶에서 통제될 수 없는 하나의 일일 뿐이며, 사회가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사회정의와 윤리학 측면에서 다시 논의되어야 한다. 개인은 그것을 그냥 하나의 특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이 늘 그래 왔듯, 어떤 특성에 대한 가치부여는 그들 스스로 하게 될 것이다.
물론 처음 외국인을 만나는 것처럼, 낯설게 느껴지는 그들의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 과정이 어렵다면, 개개인이 가진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하길 바란다. 천천히 흐르는 물줄기가 언젠가 바다에 닿을 수 있는 것처럼, 내가 꾸준히 변화한다면 세상도 변화할 것이다. 정말 모든 개인이 장애인을 무감정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장애인이라는 단어에 대한 고민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장애에 대한 고찰은 결국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편견과 차별에 대한 고찰로 이어진다. 장애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편협함으로부터 한 발자국 진보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 책이 더 많은 사람에게 읽히길 바라면서, 또 이러한 논쟁이 더 지속해서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글을 마친다.
철학, 장애를 논하다
메를로-퐁티와 롤스에서 호네트와 아감벤까지
저자
크리스트야나 크리스티안센,
시모 베마스, 톰 셰익스피어 지음
옮긴이
김도현
출판사
그린비
출간일
2020년 01월 09일 출간
정가
29,000원
ISBN
9788976825988(8976825985)
쪽수
528쪽
[손진주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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