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운명에 좌초되는 인간 - 김동인론 [도서]

글 입력 2020.01.15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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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대와 예술 그리고 김동인


  

1910년대 문단을 주도한 건 이광수 였다. 이광수는 자국의 더딘 근대화를 유념했다. ‘근대’가 온전히 성취되지 않는 건 자국민의 미비한 의식 때문이었다. 그는 의식 고취가 선행되면 근대적 사고에 부합하는 민중이 출현하여 서구와 같은 근대화를 이룩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에게 근대란 구시대의 봉건적 질서가 배제되고 서구로 대변되는 새로운 과학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민중은 여전히 구질서에 순응하고 있었다. 이광수는 근대에 대한 스스로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기 위해 소설을 썼다. 그에게 대중은 계몽의 대상이었다. 자신은 계몽을 주도하는 매개자였다. 그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에게 문학은 자기 사상을 선전하고 대중을 계몽하는 수단이었다. 출판시장이 확대되며 글을 읽는 이들과, 읽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문학은 출판시장의 최전선에 있었다. 이광수에게 문학은 자기 생각을 전달하는데 유용한 도구였다. 그는 소설을 “사상을 전달하는 계몽의 수단”이라 간주했다. <무정>은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이라 호명됐다. 이광수 문학은 정점에 섰다.


1919년부터 이광수 기조의 문학을 거부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문학은 계몽의 도구라는 주류담론에 의문을 제기하고 예술적 맥락으로써 근대를 모색하려는 시도였다. 근대적 의미의 예술은 독창성, 예술 창조 등의 개념과 같이 거론되며 ‘미학’을 성립하는데 기여했다. 미학은 미와 예술, 미적 사상에 대한 학문으로 다시 말해 예술 그 자체에 관한 학문이다. 김동인이 설립에 참여한 <창조>와 <폐허>, <백조>등의 동인지 문학이 추구한 문학적 기조가 미학의 개념과 유사하다. 문학을 구태여 시대와 결부하려 시도하지 않았다. 문학예술 그 자체로 조명하고자 했다. 이광수는 이들을 가리켜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라 지적했지만 오히려 정확한 진단이었다.


이 같은 예술론의 한계는 그것이 결국 서구 예술을 앞서 받아들인 일본을 통해 도입 됐다는 점이다. 당대 한국문학의 근대는 결국 외국 매체의 변역과 번안을 통해 주도된 셈이다. 그러나 이 문학적 움직임이 우리 근대 문학에 또 다른 활력을 제공했다는 것은 자명하다. 당시 <창조>를 중심으로 한 동인지 문학의 새로운 흐름은 문학의 독자성과 자율성이라는, 오늘날 우리가 당연시하는 문학적 제도를 마련하는 일에 분명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김동인은 이 움직임의 선두에서 유미주의를 지휘했다. <창조>에서의 활동이나 그가 집필한 소설에는 이광수를 필두로 한 이전 시대의 소설이 예술의 근대적 개념과 유리돼 있다는 문제제기가 내포돼 있었다. 3.1운동은 시대의 공기를 변화했고 김동인은 이를 반영하여 앞 세대의 문학인들과 차별화된 정체성을 드러내는데 주력했다. <창조>등의 동인지문학이 중시한 건 사회, 정치적 문제와 별개로 문학과 소설 그 자체를 천착하는 행위였다. 김동인 역시 이 행위를 공고히 하는데 힘썼다. 예술이 단지 사회개량이나 정신합일과 연관 있는 것이 아님을 말했다. 그에게 예술은 개인적, 사회적인 모든 맥락을 포괄하는 것이다. 그가 사회적 맥락보다 개인과 예술 그 자체에 좀 더 천착한 건 그것들이 이전 시대에서 예술을 다룰 때 충분히 강조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2. 김동인 문학 속 나타난 구체적 예술성


  

1920년대 발표된 김동인의 소설은 대부분 단편소설이다. <약한 자의 슬픔>, <마음이 옅은 자여>, <배따라기>, <감자>, <명문>, <광염소나타> 등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작품 대부분이 단편이다. 그가 단편 세계에 치중한 건 문학의 자율성과 독자성을 강조했다는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완결된 이야기 자체의 미학을 보여주기 위해선 이야기 세계에 빈틈이 없어야 한다. 작가가 이야기를 장악해야 하며 인물 역시 그것에 종속돼야 한다. 그는 소설쓰기가 인형 기술자의 능란한 인형 조종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배따라기>는 그가 추구한 유미주의의 전형이다. 액자소설 형식으로써 “단편소설의 미학적 형상화에 비교적 성공한 경우”로 평가됐다. 주인공이 자기의 과도한 정념으로 스스로를 파국으로 내모는 양상의 내용이지만 이 자기파괴의 정서가 ‘배따라기’의 예술성을 높이는 결과로 기능한다.


<배따라기>는 ‘배따라기’란 노래를 부르는 인물을 찾아가는 겉의 이야기(외화)와 노래 당사자의 사연인 내부의 이야기(내화)가 교차된다. 외화의 ‘나’는 노래가 아름답다는 심미적 이유로 노래의 주인공을 찾아 나선다. 내화의 ‘나’는 형으로, 동생과 아우 사이를 오해해 아내를 자살하게 했다는 죄의식과 도망간 동생의 행방이라도 알고자 노력하는 처연한 마음으로 노래 부른다. 노래에 한(恨)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노래 부르는 ‘나’의 한은 도무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음에도 살아가는 스스로에 대한 혐오와 오해의 상황을 조장한 삶에 대한 원망이 병존하는 양태다. ‘배따라기’는 ‘배 떠나기’의 지역어화한 언어로 제목에서부터 낭만적 방랑시인의 이미지가 보인다. 떠돌이의 인생을 체화한 주인공의 노래는 자기의 노래가 예술적 기질이 다분하다는 자각은 없지만, 노래에 자기의 한(恨)을 고스란히 반영했기에 그래서 아름답다. 그것은 타인의 마음에 가 닿아 울림을 자아내는 경지까지 도달했고 내화 속 ‘나’의 방랑은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처연한 기색의 아름다움은 더욱 심화된다.


외화 속 ‘나’는 아름다운 봄날이면 ‘유토피아’를 생각하는 이다. 그의 유토피아는 자기 능력을 능란하게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이거나 욕망 성취를 이룩할 수 있는 세계다. 그는 세계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현실공간에서 의지가 충분히 실천될 수 있다고 믿는 이다.


그러나 내화 속 ‘나’가 해준 이야기는 인간이 세계에 종속돼 있음을 역설하는 운명에 관한 거다. 내화 속 ‘나’는 “거저 운명이 데일 힘셉디다”라고 말한다. 그는 체념했다. 그 앞에서 외화속 ‘나’가 그렇지 않다는 식의 반박을 하지 않는 건 자기 가치관에 대한 자문을 촉발할 정도로 그의 이야기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고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내화 속 ‘나’는 운명론자가 됐고 외화 속 ‘나’는 어쩌면 구체적 현실 속의 모든 개인은 운명론자가 되고 말거라고 의식한 걸까. 현실은 유토피아가 아니고 그렇게 될 수도 없으니까. 김동인은 삶을 미지의 영역으로 간주한 셈이다. 미지의 삶에 대해 언급하는 예술은 아름답다, 는 느낌을 전달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다른 소설 <광염소나타>는 예술 자체에 천착한다. <광염소나타>는 화자가 원경에 있고 그 속에 한편의 이야기 구조가 더불어 있는 액자소설이면서 “예술가의 기벽성과 천재성 속에 숨은 범죄성에 대한 통찰에 초점을 둔” 예술가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 백성수는 예술적 욕망을 성취하고자 혈안이 돼 있는 광인 예술가다. 그가 ‘광인’인 건 방화, 살인 등의 범죄가 수반되지 않으면 자기 예술적 활동을 전혀 전개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순전한 야성적 음향이었습니다. 그러나 음악이 아니라기에는 거기는 너무 괴롭고도 무겁고 힘있는 <감정>이 들어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야반의 종소리와도 같이, 사람의 마음을 무겁고 음침하게 하는 음향인 동시에, 맹수의 부르짖음과 같이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돋히게 하는 무서운 감정의 발현이었습니다...(중략)...순박하고도 아무 기교가 없는 그 표현!” (김동인, <광염소나타>, 홍우출판사, 1968, p468)


 

인용 부분은 백성수가 방화를 하고 나서 즉흥적 연주를 펼치고 서술자 K가 그 광경을 바라보며 백성수가 연주한 즉흥곡을 오선지에 그리는 대목이다. K에게 백성수의 음악은 음악이라고 호명하기엔 기교가 전무하고 음악이 아니라고 단정하기엔 감정의 진폭이 대단하다. K는 백성수가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음에도 음악가의 본능으로 즉흥곡을 오선지에 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처음 보는 부류의 예술이었다.


김동인은 예술의 방식과 삶의 방식이 불가분의 관계임을 백성수를 통해 보여준다. 그의 범죄는 얼마나 악했느냐와 별개로 본능의 발로다. 자기 본능을 예술과 결부한 그의 음악은 그래서 특별하고 “오선지에 안 그릴 수 없을 만큼” 새롭다. 이 지점에서 삶이나 예술은 결코 고정되거나 틀에 박힌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본능과 광기에 충실하자는 이데올로기로 삶을 영위했기에 백성수는 새로운 음악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백성수는 범죄자다. 좋은 예술을 전시함이 범죄를 정당화 할 수 없다. 예술 이전에 인간은 태생적으로 윤리관을 성립한다. 그것은 고정됐고 웬만하여 변하지 않는다. K가 백성수의 음악에 매료됐음에도 적극적으로 변호하지 못하는 건 이 같은 맥락에서다. K는 눈물 흘린다. 그의 눈물은 결코 고정된 틀의 지금 현실에선 백성수와 같은 새로운 음악이 나올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백성수가 추구한 자율적 예술관을 옹호하기란 불가능하다. 그걸 ‘좋은 예술’이라 표현할 수 없다. 예술은 현실의 고정된 틀과 타협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타협의 균형이 맞춰진 예술이 좋은 예술이다. 그러나 그런 예술이 나올 수 있느냐는 냉소가 보이기도 한다.


<약한 자의 슬픔>은 김동인의 초기작으로 이광수에 대한 반발로 보인다. 이광수 문학은 문학을 계몽의 도구로 삼아 각성을 촉구했다. 그가 언급한 각성엔 ‘개인’이 없다. 모두가 과학을 배워야 한다는 구호엔 과학에 대한 개인의 체감을 중시하지 않는다. 많이 배워야 좋다는 무분별한 선동만 있다. 집단적으로 계몽하면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논리다.


소설 속 엘리자베드는 가난한 고아로 가정교사 신분의 여학생이다. 그녀는 자기가 약한 자의 슬픔을 갖고 있는 존재임을 인식하고, 거기서 자기 약한 면을 알고 있는 자가 ‘강한 자’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녀의 ‘약한 자’란 자기 태도를 분명히 드러내지 않은 이다. 이내 약함 자체가 세상 모든 죄악의 근원이라는 것으로 확장된다. 결국 엘리자베드는 현실 세계란 광포한 파도에서 자기가 ‘약한 자’가 될지 ‘강한 자’가 될지를 스스로의 태도에서 찾고 있는 셈이다. 그녀가 ‘강한 자’가 되겠다고 다짐하는 건 식민지 시대의 우리 민족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개인적 차원으로 보여 주는 셈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이광수 문학과 분리된다. 이광수가 획일적 맥락의 ‘계몽’을 선전한데 반해 김동인은 개인의 태도를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소설에서 ‘개인’의 가치를 발견하고 선언한 셈이다.

   


 

* 참고문헌


 

김우종, <한국현대소설사>, 성문각, 1994,

 

김정숙, <김동인 초기소설에 나타난 근대 ‘문학 독자’의 형성 연구>, 한국어문학회, 2006

 

김행숙, <문학이란 무엇이었는가 : 1920년대 동인지 문학의 근대성>, 소명출판, 2005

 

임현정, 김동인 문학에 나타난 ‘예술’의 의미,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2014

 

이재선, <한국현대소설사>, 홍성사, 1979

 

김동인, <광염소나타>, 홍우출판사, 1968

 

 

 

문화리뷰단 박성빈.jpg

 




[박성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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