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인스타그램을 구경하다 친구가 이탈리아 ‘크레마’에 다녀온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들어보는 도시였지만 청량하고 아기자기한 풍경이 마음에 들었다.
친구의 게시물엔 ‘콜바넴 투어’라며 부러워하는 댓글이 달려 있었다. ‘콜바넴’은 또 뭐지, 궁금해져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줄임말이었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촬영지가 바로 이탈리아 크레마였다.
영화에 대해 찾아보니 많은 사람이 ‘인생 영화’로 꼽는 작품이었고, 영화를 보고 난 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영화의 원작은 <그해, 여름 손님>이라는 소설인데,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라는 제목의 리마스터판으로 다시 출간되었다. 표지부터 마음에 들었다. 무지개 같기도 하고 물감이 잔잔히 퍼진 모습 같기도 했다. 꽤 두꺼운 책이었지만 엘리오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었다.
열일곱 소년 엘리오는 이탈리아 작은 마을의 별장에서 ‘그해 여름 손님’ 올리버를 만난다. 늘 “나중에!”라고 대답하는 스물넷 청년 올리버. 엘리오는 그에게 걷잡을 수없이 빠져든다. 올리버를 향한 마음은 점점 커져만 가고, 그의 사랑과 욕망은 책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의 눈빛이 보이는 것 같고,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연주할게요,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내 손가락이 벗겨질 때까지. 난 당신을 위해 뭔가 해 주는 게 좋고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테니까 말만 해요. - p.23
올리버, 날 가져요. 누군가 날 가져야만 한다면 차라리 당신인 게 나아요. 아니, 난 당신이길 바라요. - p.113
그를 불쾌하게 만들까 봐 걱정되지만 우리 사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지뢰선을 시험하고 싶지 않다고. 지뢰선이란 무슨 말이야? 어느 날 밤 너무 강렬한 꿈을 꾸거나 평상시보다 와인을 많이 마시면 쉽게 넘어가 당신의 창문을 열고 ‘올리버, 나예요. 잠이 안 와요. 같이 있게 해줘요.’라고 말해 버릴, 바로 그 지뢰선이요! - p.139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올리버를 원하는 엘리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엘리오가 올리버를 생각하며 자위하는 장면과 둘의 성관계 장면도 등장하는데, 이는 영화에도 나오는 장면이다.
하지만 이런 육체적인 교감보다 엘리오의 상상과 독백이 더 자극적이다. 책을 읽고 알게 된 점인데, 영화의 수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엘리오의 욕망이 소설 속에 훨씬 더 적나라하고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어 영화보다도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랑’에 대해 생각해봤다. 내가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람들은 있지만 누군가를 내 이름으로 부르고 싶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 얼마나 간절히, 뜨겁게 사랑해야 이런 감정이 들까. 육체와 마음을 넘어서 영혼, 또 그 이상의 무언가까지 나누고 싶은 그런 사랑일까.
“네 이름으로 나를 불러 줘. 내 이름으로 너를 부를게.”
- p.173
너무나도 유명한 대사지만 읽을 때마다 새롭다. 자꾸 되뇌고 싶어진다. 나도 언젠가 엘리오와 올리버처럼 서로의 이름을 바꿔 부르는 사랑을 하게 될까.
책과 영화의 차이점이 몇 가지 있는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결말이다. 많은 이들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명장면으로 꼽는다. 올리버의 결혼 소식을 들은 엘리오가 벽난로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장면이다. 그의 표정엔 모든 감정이 담겨 있다.
“나도 너와 같아. 나도 전부 다 기억해.”
나는 잠시 멈추었다. 당신이 전부 다 기억한다면, 정말로 나와 같다면 내일 떠나기 전에, 택시 문을 닫기 전에, 이미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이 삶에 더 이상 할 말이 남아 있지 않을 때, 장난으로도 좋고 나중에 불현듯 생각나서라도 좋아요. 나에게는 큰 의미가 있을 테니까, 나를 돌아보고 얼굴을 보고 나를 당신의 이름으로 불러 줘요.
- p.315
소설에서는 그해 여름으로부터 20년이 지난 후, 엘리오가 올리버의 강의실로 찾아간다. 조금 더 현실적이고 덤덤한 결말이지만 결코 덜 슬픈 것은 아니었다. 두 결말 모두 내게 진한 여운을 남겼다.
책을 읽으니 영화가 다시 보고 싶다. 그리고 어딘지도 몰랐던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크레마에 가보고 싶다. 크레마에서 그해 여름 엘리오와 올리버처럼, 자전거를 타고 곳곳을 다니며 그들의 뜨거웠던 날들을 떠올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