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소멸하는 의지와 의미 속에서 - "물류창고" [도서]

시집 『물류창고』(이수명, 2018)을 읽고
글 입력 2019.12.31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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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명(1965∼) 시인은 1994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하여 시인으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다수의 시집, 시론집을 출간하여, 한국 현대시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시집 『물류창고』(2018)는 가장 최근에 출간된 이수명 시인의 시집으로, 문단에서 20년 넘게 활동하며 시인이 몰두한 작품세계가 고스란히 보여준다. 전작들에서도 꾸준히 다루어온 의지의 소멸, 더 나아가 주체의 소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언어의 측면에 있어서는 문장 요소들 간의 위계에 대한 고찰 역시 다루고 있다. 현대 한국 문학에 있어서 주체의 소멸, 그리고 의미의 소멸이라는 중요한 과제를 던져주고 있는 그녀의 시집 『물류창고』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크기변환]물류창고.jpg

 

 

 

1. 무의지 : 주체의 소멸


 

 
우리는 물류창고에서 만났지
창고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차려입고
느리고 섞이지 않는 말들을 하느라
호흡을 다 써버렸지
 
(중략)
 
무얼 끌어내리려는 건 아니었어 
그냥 담당자처럼 걸어 다녔지
바지 주머니엔 볼펜과 폰이 꽂혀 있었고 
전화를 받느라 구석에 서 있곤 했는데
그런 땐 꼼짝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지
 
(중략)
 
창고를 빠져나가기 전에 정숙을 떠올리고
누군가 입을 다물기 시작한다
누군가 그것을 따라 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조금씩 잠잠해지다가
더 계속 계속 잠잠해짖다가
이윽고 우리는 어느 순간 완전히 잠잠해질 수 있었다
 
「물류창고」(pp.14~15) 中

 

시집 『물류창고』 초반부의 가장 큰 특징중 하나는 「물류창고」라는 제목의 시 10편이 연속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10편의 「물류창고」 모두 비슷한 분위기를 공유한다. 물류창고 내부는 동일한 공산품들의 규칙적인 배열로 이루어져 있으며, 눈에 초점이 없는 인물들이 창고 안에 있다. 각 인물들은 뚜렷한 의지 없이 서로의 행동을 따라 하기도 하지만 결국 공간에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고 다시 침묵으로 돌아간다.
 
작가는 이러한 시적 상황을 통해서 오늘날 사회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책 후면에 실린 조재룡 평론가의 말마따나 “주체-대상-행위” 모두 일관되어 가는 것이다. 주체성이라는 것은 찾아볼 수 없다. 물류창고의 상품들은 기계로 찍어내어 동일한 모습으로, 규칙적으로 정렬돼 있다. 그러나 시적 주체와 그들의 행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의미 없이 배회하며 서로를 따라하고 있는 주체들, 마네킹 혹은 기계가 돼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시인은 특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2. 반복 : 의미의 소멸

 

 

최근에 나는 최근 사람이다. 점점 더 최근이다. 최근에 플래카드를 들고 서 있는 사람들 앞을 지나갔다. 어디서 오는 길이지요 묻는 사람은 최근에 본 사람이고 펄럭이는 플래카드 텅 빈 플래카드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나는 펄럭이는 깃발 아래 펄럭이는 그림자를 최근에 본 사람이고 그 펄럭이는 것이 신기하게도 구겨지지 않고 계속 펄럭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하여 나는 구겨지지 않는 사람들 앞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혹은 구겨진 신체를 계속 펴는 사람들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는데 아무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후략)

 

「최근에 나는」 中
 
 
시멘트가 좋다. 시멘트를 바르는 사람들이 좋다. 그들은 시멘트를 들고 있으니까 손에서 굳어지는 시멘트 단번에 굳어지는 것을 들고 있으니까
 
아무 걱정이 없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으니까 말은 평면이니까 어떤 것이 튀어나오는지 무얼 빠뜨렸는지 알 수 없으니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여기서 도망치는 중이니까 오늘도 우리를 돌과 자갈로 섞는다. 모래로 섞는다. 이 비율은 아름답다. 이 연작은 언제까지나 우리를 구하리라
 
(후략)
 
「시멘트가 좋다」 中

 

이수명의 시에서 가장 매력적인 기술은 동일한 단어의 반복이다. 그러나 단어들이 반복될 때 문장에서 나타나는 위치가 계속 변한다.

「최근에 나는」에서 “최근”이라는 단어의 문장성분을 주의깊게 보자. 처음에는 부사어(“최근에”)와 관형어(“최근 사람”)이고, 그 뒤어는 서술어(“최근이다”)로 나타나기도 한다. “최근”이라는 단어의 역할이 거듭 바뀌면서 시가 진행된다. 한 단어가 계속 반복되면서도 한 단어의 지위가 고정되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 한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그 대상을 강조하는 동시에 하나의 집약된 이미지를 완성하는 데 목적이 있는데, 이수명의 시에서는 한 단어의 역할이 계속 바뀌면서 이미지가 집약되지 못하고 시 전반에 산재하게 된다.

「시멘트가 좋다」 첫 줄에 등장하는 “그들은 시멘트를 들고 있으니까 손에서 굳어지는 시멘트 단번에 굳어지는 것을 들고 있으니까”를 보았을 때도 마찬가지다. 이 모호한 문장에서 시멘트는 다양한 위치에 등장한다. “시멘트‘를 중심으로 이 문장을 끊어서 재구성하면
 
- 그들은 시멘트를 들고 있으니까
- 손에서 굳어지는 시멘트
- 시멘트(는) 단번에 굳어지는 것
- 굳어지는 것(=시멘트)을 들고 있으니까
 
와 같이 나뉜다.
 
분할된 네 개의 문장을 보면 흥미롭게도 시멘트의 위치가 목적어와 주어의 위치를 오가며 반복되는 것은 물론이고, 위의 두 문장과 아래의 두 문장이 대칭을 이루는 것을 볼 수 있다. 결국 본 시의 첫 문장에서 이미 시멘트라는 대상은 수많은 역할로 반복돼 사용되고 있으며, 시를 어지럽게 하는 한편 “시멘트” 자체가 가지는 뚜렷한 이미지를 지우고 있다.
 
이와 같은 반복은 한 단어에 주어진 의미를 해체시키려는 노력에 가깝다. 문장 성분 중에서 부사어나 관형어는 수식을 해주는 입장으로서 주어, 목적어, 서술어에 특징을 부여하기 위해 동원되는 위치에 있다. 이수명은 “최근”이라는 단어를 수식자와 피수식자 모두로 사용하면서 단어가 가지는 일관된 지위를 해체하고 있다. 이로써 하나의 중심 단어가 주인공으로 부상하지 않고 작품 전반에 분산되어 집약된 의미를 완성하지 않는다.

이러한 기법을 통해 해체주의(라는 단어 역시 이수명 시인의 작품세계를 담기에는 초라하지만)적으로 시의 모든 의미 단위들을 뒤섞어 주체성과 의지는 모두 지워진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의미와 의지를 대신해 오묘한 분위기만이 남게 되는데, 이러한 매력이 시집 『물류창고』 전반에 나타나 독자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
 
시라는 예술 장르는 ‘언어’ 자체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는 장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21세기 현대시는 전통적인 서정시들과는 다르게 단순한 이미지의 유사성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언어를 어휘와 음소의 단위까지 세세히 분절시켜 그 자체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시집 『물류창고』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자체를 반성할 수 있게 하는 좋은 역할을 한다.

문학은 언어와 정신의 위대함에 대해 동의하는 사람들이 뜻을 함께하는 분야이다. 문학이라는 분야, 시라는 장르 속에서, 이수명 시인은 문장 속의 세세한 단위로 작품을 요리할 때만 드러날 수 있는 새로운 예술적 가치들을 발굴하며 고유한 문학적 분위기를 완성해 나가고 있다.
 
 
[한승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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