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이젠 당신의 차례예요! - 연극 "창문 넘어 도망간 100세 노인"

맛있고 예쁜 사과로 삶을 지탱하기
글 입력 2019.12.23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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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과를 먼저 드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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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종종 자주 들었던 질문이 있다.

사과에 관련된 이야기다.

 

 

여기, 6개의 사과가 있어요. 어떤 사과는 예쁘고, 맛있고 어떤 사과는 못 생기고 맛도 그저 그래요. 6개의 사과를 모두 먹어야 한다면 당신은 어떤 사과를 먼저 드실래요?

 


평소 한 번쯤 들어보았을 법한 물음이다. 맛있고 예쁜 사과를 먼저 먹느냐, 맛없고 못생긴 사과를 먼저 먹느냐를 선택하는 일은 사실, 어렵고 하기 싫은 일을 먼저 하느냐, 즐겁고 재미있는 일을 먼저 하느냐를 선택하는 일과 비슷하다.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뒤따라오는 이야기는 이 선택이 그 사람의 성향, 생각, 행동하는 방식과 연결된다는 식의 해석이었다.


고등학생 때만 하여도 나는 맛없는 사과는 먼저 먹는 편이었다. 맛없고 못생긴, 어렵고 힘든 일들을 먼저 처리한 뒤에 느긋하게 맛있는 것들을 즐기는 것이 좋았다. 해야 하는 일들을 먼저 처리하고 난 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처럼. 그리고 나의 이런 성향은, 당시 학교에서 가르치던 일종의 ‘틀’에 적합했다. ‘공부’를 항상 우선시하는 것이 학생의 본분이라는 말을 몸에 새긴 것처럼, 고등학생 때의 나는 수많은 맛없는 사과들을 먹곤 했다. 기약 없는 맛있는 사과를 편안히 먹겠다는 생각 하나로.

 

요즘 들어 문득문득 이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지금의 나는 (사과 6개가 놓인) 저 상황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할까 궁금해졌다. 가만히 지나간 올해를 더듬어보다가 답을 내렸다.

 

제일 맛있고 예쁜 사과를 먹자.

맛있는 사과들을 먹자.

그리고 맛이 없는 사과들은

.

.

.

그냥 먹지 말자.

 

2019년은 조금 특이한 해였다. ‘해야 하는 것’에 구애받기보단 ‘하고 싶은 일’로 채워졌던 해였다. 독립영화극장에서 관객 프로그래머로 활동하면서 기획전을 만들고, 매주 수요일 공방을 다니며 지역을 테마로 굿즈를 만들고 전시하고, 중학생 멘티를 만나 진로 멘토링 활동을 하고, 평소 어려워하던 오페라를 잔뜩 즐기며 평론을 쓰고, 커뮤니티 스타트업에 다니면서 오프라인 콘텐츠를 기획하고, 글쓰기 모임과 독서 모임을 만들었다. 완벽하게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지는 않았지만, 올 한해 대부분의 시간이 ‘맛있고 예쁜 사과’로 채워졌다.

 

그리고 올해를 정리하면서 깨달았다.

 

사람은 노력하기만 하면

 ‘맛있고 예쁜 사과’만 먹으면서

살 수 있다는 것을.

 

어릴 적부터 나도 모르게 들어왔던 

학교와 사회가 이야기하는 ‘해야 하는 것들’을

굳이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다만 예쁘고 맛있는 사과(하고 싶은 일)만으로

삶을 지탱하기 위해서

조금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뿐이라는 것을.

 

어릴 적 내가 굳이

맛없고 못생긴 사과를 먹었던 것은

겁이 났기 때문이라는 것도.

 

 

 

틀을 깨는 이야기, 알란의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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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지독하게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한 명 있다. 편안하고 안락한 양로원을 내치고 굳이, 그것도 100세의 나이에 창문을 넘어서 ‘도망’을 갔다. 지독하게도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사는 ‘알란 칼손’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의 원작은 스웨덴의 소설 《창문 넘어 도망간 100세 노인》이다. 세계사적으로 혼란했던 20세기에 태어난 ‘알란’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 당시 다사다난했던 세계 곳곳을 그려낸 소설이다.


자신의 100세 생일날, 자유를 찾아 떠난 알란은 어느 조직의 돈가방을 훔쳐내고 그를 쫓는 추격자들을 따돌리며 이리저리 도망 다닌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그의 과거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극 중 극의 형식이다. 스웨덴, 러시아, 미국, 북한, 중국, 발리 등 여러 국가를 넘나드는 거대한 스케일의 서사와 정확히 셀 수 없는 수의 인물이 나온다. 소설로, 영화로 즐겼던 알란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났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알란은 맛있는 사과만으로

삶을 지탱하려 한 사람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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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란은 말한다.

 

세상 사람들은 진실을 믿지 않아

(자극적인) 이야기만 믿지

 

알란이 겪은 세상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건 ‘진실’이라는 가면을 쓴 이야기다.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시선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바라보며 산다. 어떤 사건의 숨겨진 맥락이나 배경은 뒤로한 채 이미 벌어진 사건만을 피상적으로 떠들어댄다. 사람들은 어떤 일에 대해 다각적인 이해보단 편리하고 효율적인 인식방식을 택한다. 그건 어떤 사건의 맥락도 정의하지 않은 채 특정 낙인을 찍는 일이다.


세상의 시선에선 자신의 의지로 양로원을 떠난 알란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안락한 노년의 보금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건 사회가 노인에게 부여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알란은 ‘납치된 노인’이 되어버렸고 알란의 동료들은 100세 노인을 납치한 납치범이 되었다. 그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진실’로 만들어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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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진실’이라 불리는 이야기로 가득 찬 세상에서 알란은 주어지는 삶을 알맞게 살아냈다. 현재의 시간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내며 살아왔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술과 침대, 이야기, 온기를 나눌 동료에 행복해했다. 알란에게 주어진 맛있는 사과는 이런 것들이었고, 이 맛있고 예쁜 사과만으로 삶을 일궈내려던 알란은 여러 번의 위기를 겪어내고 극복한다.


그리곤 또다시 창문을 넘는다. 미화된 부분이야 잔뜩 있겠지만, 그래서 그 부분을 물고 늘어지면 할 말은 없겠지만, 어찌하든 알란은 또 틀을 깼다. 알란이 뛰어넘은 창문은 결국 사회의 편견이자, 명확한 이유 없이 그저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주어지던 사회의 숙제였으며(규격대로 매뉴얼화된 성공적인 삶),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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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란이 창문을 뛰어넘어 무대 밖으로 사라진 뒤 그가 지나온 모든 행적들이 별이 되어 반짝였다. 반짝이는 별들로 뒤덮인 무대가 속삭이는 듯했다.


“이젠 당신의 차례예요!”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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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입체감이 강한 예술이다.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기에 연극만큼 강한 여운을 주는 장르는 없다. 글은 독자의 상상력에 의해 좌우되는 바가 크고, 영화는 ‘스크린’이라는 장막이 있는 반면에 연극은 관객이 무대와 배우, 그리고 이야기에 가장 자연스럽고 가깝게 녹아들 수 있는 힘을 지녔다.


시점의 교차, 일반적인 시공간 질서의 재구성, 생생하게 전달되는 배우들의 감정은 내가 연극을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끊임없이 탐구하고 해석해야하는, 곱씹을 수 있는 작품을 특히 좋아한다. 그런 작품들은 생생하게 끊임없이 생각을 자극하기 때문에 연극을 보는 내내 희열을 감출 수가 없다. 공연 내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기에 작품이 주는 ‘아는 맛’의 희열은 강렬하다.

 

하지만 사실, 이번 연극은 평소의 취향과는 다르게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선택한 작품이었다. 그저 오랜만에 가는 서울 나들이에, 일전에 재밌게 봤던 이야기를 다른 형태로 즐겨보고자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내 안일한 생각은 극의 첫 장면을 보자마자 단번에 깨졌다. 이 작품은 기존에 우리가 생각하던 시공간의 순서와 성별의 고정관념, 주연과 조연의 경중을 한 번에 허무는 수평적이고 다원적인 작품이었다. 그러면서도 유쾌하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오락성 또한 적절히 갖춘 매력적인 이야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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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공연이 시작되었을 때, 누군가 창가에 나타나 창문을 넘으려 시도했다. 창가에 나타난 형상은 ‘할머니’였다. (내가 관람할 당시 100세 알란을 맡은 배우는 배해선님이었다) 젠더 프리 캐스팅이란 테마를 잠시 잊고 있던 나로서는 원작에 ‘알란의 부인이 있었던가?’하는 물음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그 뒤 바로 알란의 서사 시작을 알리는 배우들의 대사가 이어지고 그 뒤에야 ‘아! 이 연극은 성별에 관계없이 더블 캐스팅을 한 작품이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창 연극을 많이 보던 때에는 젠더 프리 캐스팅을 한 작품들이 너무 익숙해서 아무렇지도 않았던 지점이 1년 정도 연극을 많이 보지 않으니 확 와닿았다. 문득 원작에 할머니가 있었나 생각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지다가, 무언가 편견에 다시 찌든 것은 아닌가 짜증도 났다가 얼마 전 읽은 《진중권의 서양미술사》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현대예술에 익숙한 이들은 그것을 작품으로 보고 지나치지만, 낯설게 느끼는 이들은 거기서 충격을 받는다. 현대예술의 목표가 ‘감성적 쾌감’이 아니라 ‘지성적 충격’을 주는 것에 있다면, 그 의도된 효과를 제대로 체험한 이들이야말로 그것의 본질을 제대로 간파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나는 연극과 멀어지면서 잠시 잊고 있던, 나도 모르게 다시 자리 잡힌 (역할의 성과 배우의 성이 일치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다시 실감하면서 더 큰 예술적 체험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무의식적으로 자리 잡혀 있던 내 생각의 모양을 진단하고 다시 매만질 수 있는 출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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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은 크게 3개의 시점으로 진행되었다. 한 시점은 관객에게 이야기를 거는 배우들의 시점이고, 다른 한 가지는 100세 알란이 요양원을 도망친 현재의 시점, 마지막 한 가지는 과거 세계를 넘나들었던 알란의 시점이다. 100년이라는 알란의 생애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단 5명의 배우가 ‘이름표’만으로 해결했다. 어떤 이름표를 붙이느냐에 따라 배우들은 휙휙 가면을 바꿔썼다.


세계를 넘나드는 이야기의 공간은 작은 소품과 전통춤만으로 채워졌다. 여기에 관객의 상상력과 배우의 다채롭고 능청스러운 연기로 무대 공간의 점점 더 확장될 수 있었다. 현실적 재현을 극도로 배제한 독특한 전개 방식 덕에 오히려 배우들 간의 경계, 비중의 격차도 사라졌다. 그들은 주연인 동시에 조연이며, 모두가 무대 위의 서술자였다. 당연하게 생각하던 수직적인 층위가 다채롭게 허물어지던 과정이었다.

 

좋은 연극 작품을 만날 때면 나는 늘 희극의 연출가와 작가를 떠올린다. 그들은 종종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세계를 만들어서 관객들에게 내놓는다. 나는 가끔 이들이 천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연극은 역시 가장 도전적이고 입체적인 예술의 장르다. 이번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틀을 깨는 이야기’를 ‘틀을 깨는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원작과 동명의 영화, 작년의 공연으로 어쩌면 이미 익숙해져 버린 서사를 새로운 방식으로 살려냈다. 그렇다고 잔뜩 현학적이지도 않다. 누구나 쉽게 따라갈 수 있는 눈높이와 재미로 알란의 이야기를 재구축했다. 그리고 창문을 넘어 떠난 알란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여주며 관객들에게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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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당신의 차례예요!

당신의 삶에 불꽃을 붙이세요!"

 

 



[한나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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