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영화 시나리오 읽기 - 히로시마 내 사랑 [도서]

글 입력 2019.12.15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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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영화 시나리오 『히로시마 내 사랑』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뒤라스는 전후(戰後) 프랑스 문학을 이끌어나간 여류 작가로서, 특유의 소설 구성을 통해 파편화된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동명의 영화로도 유명한) 그녀의 대표적인 소설 『연인』은 여러 시간적 배경을 교차하며 한 소녀의 상처와 사랑을 아름답게 그려낸다. 신경과민 홀어머니 아래서 갖은 수모를 겪으며 자란 프랑스 소녀가 중국인 남자와 만나 전개되는 사랑, 예견된 이별을 앞에 두고 펼쳐지는 감정들을 섬세하게 표현하여 한편의 훌륭한 심리 소설을 당시 독자들에게 선보이며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한편 최근 아트인사이트 문화초대를 통해 소개되었던 연극 『라 뮤지카』 역시 뒤라스의 희곡을 바탕으로 탄생한 작품이다. 약 한 시간 동안 진행되는 연극에는 남녀 배우 한 쌍만이 등장해 60분의 시간을 첨예한 감정 대립으로 가득 채운다. 이미 끝나버린 관계와 그렇지 못한 감정을 두고 재회한 연인은 사랑의 시작과 끝에 대해 관객에게 의문을 제시하며 공감을 일으킨다.

 
이렇듯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작품들은 극히 적은 주인공을 등장시키고 문학적인 기법을 통해 이들의 내면을 표면으로 끌어올리는 특유의 섬세함을 드러내어 21세기 오늘날에도 수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이번에 소개할 시나리오 『히로시마 내 사랑』 역시 뒤라스의 작품 세계의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으며, 히로시마라는 이국적인 배경을 채택하고 시나리오라는 장르를 이용해 새로운 매력을 감상자에게 전달한다. 사실 같은 제목의 영화로 먼저 개봉되고 2년 후에 그녀의 시나리오가 출간된 것인데, 이례적이게도 『히로시마 내 사랑』은 훌륭한 영화인 동시에 하나의 출판물로서 독자들에게 유명세를 떨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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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문학 장르인 시나리오를 소개하며, 뒤라스의 작품세계와 문학관을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녀의 다른 작품들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이전에 기고하였던 소설과 영화 『연인』의 오피니언과 연극 『라 뮤지카』의 문화리뷰를 하단에 첨부하며, 본 글에서는 작품의 배경과 시나리오라는 장르의 특징에 집중하고자 한다.
 
영화 시나리오 『히로시마 내 사랑』은 뒤라스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남녀의 사랑에 대해 섬세하게 다룬다. 영화는 히로시마를 배경으로 한다. 일본인 남성과 프랑스인 여성은 우연히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된다. 남자는 히로시마에 거주하고 있으며, 여자는 영화배우라는 직업으로 인해 영화 촬영 차 히로시마에 머물게 된다. 시나리오에는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계기, 서로를 사랑하게 된 이유에 대한 단서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사랑에 빠졌고, 여자의 귀국 일정으로 인해 이별을 눈앞에 두고 있다. 남자는 만남을 이어가고 싶어 여자를 계속 찾아오고, 여자는 그럴 수 없다고 거절한다.
 
마음속은 이미 남자에 대한 마음으로 가득한데, 그를 원하고 있는 내면과 그를 거절하고 있는 표면 사이의 괴리로부터 작품의 예술성이 발생한다. 뒤라스는 성실하게 두 인물의 모습을 묘사하는 한편, 여자는 히로시마 남자와의 사랑을 통해 세계대전에 대한 본인의 기억과 당시의 옛사랑을 떠올리게 된다. 이 모든 요소들의 얽히며 영화는 특유의 분위기를 획득하게 되며, 원자폭탄으로 인해 일상이 침해당한 남자와 적군에 의해 사랑을 잃은 한 여자가 서로를 마음에 새기며 시나리오는 막을 내린다.
 

 
1. 배경 : 히로시마

 

작가는 영화의 배경으로 히로시마를 선택한다. 민음사의 『히로시마 내 사랑』 시나리오는 뒤라스가 작성한 원본을 바탕으로 하면서, 시나리오 내용 중 영화화되지 않은 부분을 별도로 표시해 두고 있는데, 이로부터 알 수 있는 사실 중 하나는 작가가 의도한 영화의 첫 장면은 원자폭탄의 버섯구름의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히로시마라는 장소는 기본적으로 세계대전의 비극과 관련이 있다. 시나리오에서도 원자폭탄으로 인해 히로시마 주민들에게 벌어진 재앙들을 묘사하며 지역 주민들에게 남겨진 비참한 삶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둘의 사랑에 있어서는 히로시마의 비극이 아무런 의미를 보이지 않는다. 두 주인공의 만남은 호텔이나 영화촬영장, 카페 등에서 이루어지며, 그들은 서로에 대해 집중할 뿐 히로시마가 가지는 역사성이나 정치성은 그들의 관계에 일체 개입하지 못한다. 물론 둘의 대화에 있어서 히로시마라는 단어가 꽤 자주 언급되지만, 그들은 히로시마라는 단어가 가지는 거시적인 분위기로부터 아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작가는 시놉시스에서 히로시마라는 소재가 기존에 어떤 이미지로 사용되고 있는지 친절하게 언급해준다.

 


히로시마에는 그 무엇도 그냥 ‘주어져 있지’ 않다. 모든 몸짓, 모든 말마다 본래 의미에 덧붙여진 또 다른 의미가 특별한 후광으로 드리워져 있다.

 

- p.16, 시놉시스 中


 

히로시마에서는 모든 존재들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예를 들어 ‘밤’, ‘만남’, ‘영화’, ‘사랑’이라는 단어에 히로시마를 붙여보자. ‘히로시마의 밤’, ‘히로시마에서의 만남’, ‘히로시마의 영화’, ‘히로시마에서의 사랑.’ 각 단어가 가지던 기존의 이미지에 있어서 히로시마가 접목되면, 역사적인 배경으로서의 히로시마의 이미지가 각 단어에 스며들어 모종의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거대 서사 속으로 각 단어가 빨려 들어가게 된다. 결국 히로시마에서의 모든 가치들, 이미지들은 히로시마의 수식 속에서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작가는 히로시마에서의 사랑을 그리며, 사랑에 히로시마의 이미지를 입히기보다는 히로시마의 분위기가 침투되지 않는 하나의 순수한 사랑을 그려내고 있다. 이 남녀의 사랑 앞에서 히로시마는 일개 배경으로 전락해버린다. 시나리오 상에서 의도적으로 노출시키고 있는 히로시마의 다양한 이미지와 일상의 모습들은 두 사람의 첨예한 감정에 밀려 특별한 의미를 획득하지 못한다. 주인공들의 사랑이 지나간 히로시마라는 장소는, 역사적인 아픔을 지닌 공간이기보다 오히려 두 남녀의 이국적인 분위기가 머물렀던 오묘함의 이미지를 가지게 된다.

뒤라스는 두 사람의 이야기와 히로시마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해두었다.

 


이 사적인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역사를 증언하는 히로시마 이야기보다 늘 우위에 놓일 것이다.


- p.74


 

두 이야기 사이의 우열관계를 의도적으로 설정하여 작가는 영화에서 묘사되는 사랑을 더욱 부각시킬 수 있었다. 이들의 사랑은 역사성이 드리우는 그림자를 초월한 사랑이다. 따라서 『히로시마 내 사랑』은 사회적인 아픔과 한계가 어떻게 개인과 개인이 만들어내는 관계 앞에서 한없이 작아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인 동시에, 사회와 역사, 정치를 사랑의 이미지와 결부시켜서 새롭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아름다운 영화다.
 

 
2. 장르 : 시나리오

 

시나리오는 기본적으로 영화 제작을 목표로 쓰인 글이다. 모든 문학 작품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되는데, 사실 시나리오만큼은 그 자체로 온전하다기보다는 영화 제작이라는 목적을 가지는, 목표지향적인 장르이기도 하다. 따라서 시나리오를 읽을 때는 시나리오를 통해 완성된(혹은 완성될) 영화를 상상하면서 읽게 되기도 한다. 실제로 『히로시마 내 사랑』을 읽어보면, 영화기획자가 영화제작자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들도 포함되어 있어 시나리오가 영화 제작의 중간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 기능하는지 알 수 있어 흥미롭다.

 

『히로시마 내 사랑』의 시나리오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녀

아뇨. 파리로. (잠시 후) 느베르엔 이제 다시는 가지 않아요.

 

다시는?
 
그녀
다시는.

다음 중 선택
[느베르는 나를 아프게 하는 도시에요.]
[느베르는 내가 이제 좋아하지 않는 도시에요.]
[느베르는 내게 두려움을 주는 도시에요]
 
- p.70

 

여기서 흥미로운 부분은, 뒤라스가 영화감독에게 가능한 대사를 선택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일단 원작자와 영화감독이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나 여러 상징들에 대해 의견을 같이 한다하더라도 세부적인 부분에서 있어서만큼은 의견이 다를 수가 있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원작자와 영화감독이 해석한 주인공의 성격이나 한 장면의 의미가 상이한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감독은 시나리오에 대해 다소 불만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인데, 뒤라스는 이러한 경우를 대비해 허용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을 제시해 제작자와 절충을 시도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영화 제작에 있어서 서로가 타협을 시나리오 수준에서 이룰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원작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작품의 의견을 자세히 설명해 영화감독에게 전달하기도 한다.

 


이 세상 다른 어느 곳에서 생겨난 사랑보다, 죽음이 잘 간수되지 못한 그런 장소에서 일어난 사랑에 사람들은 더 믿음을 가진다.

 

지리적으로, 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인종적으로 등등 최대한 거리가 먼 두 사람에게 히로시마는 에로티시즘, 사랑, 불행의 보편적인 소재들이 가차 없는 조명 아래 모습을 드러내는 (아마도 세상에서 유일한?) 공통의 장소가 될 곳이다.

 

- p.12 시놉시스 中



작가는 작품의 주인공을 프랑스인 여성과 일본인 남성으로 설정해야 하는 정당성을 시나리오의 시놉시스에서 설명하고 있다. 시나리오는 이 부분에 있어서 여타의 다른 문학 장르들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 시나리오에서만큼은 작가가 직접 작품의 해설과 해석을 명시적으로 밝힐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은 소설이나 수필, (심지어는) 영화에서는 느낄 수 없는 시나리오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이나 수필에서 작가가 직접 등장해 해설을 해버린다고 상상하면, 기존의 서사가 전개되고 있는 속도를 어느 정도 침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나리오는 글의 구조상 해설과 대사가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어, 작가의 해설이 존재하더라도 독자는 해설의 내용을 (‘그 : ’, ‘그녀 : ’로 이루어져 있는) 대사와 독립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 대사의 내용을 따라가며 머릿속으로 그려내는 영화의 이미지에는 피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특히 인용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히로시마 내 사랑』에서는 해설에도 뒤라스 특유의 문학적 수사들이 묻어있어 완성된 영화를 감상하는 것과는 다른 새로운 매력을 시나리오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영상에는 담길 수 없는 이런 섬세한 표현들 덕분에, 영화 개봉 2년 뒤에 출판된 시나리오가 세간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은 평소 우리에게 낯선 문학 장르인 시나리오를 부담없이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독서보다 영화에 취미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문학에 입문하기 쉬운 텍스트라고 생각한다. 기존에 뒤라스를 알지 못한 사람들이더라도 시나리오의 전반적인 몰입력이나 감정묘사에 영화 장면을 상상하며 금방 빠져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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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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