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한 유희] 다시금 "삐딱해지기" 위하여

긴 시간이었습니다. 알을 깨고 복귀했습니다.
글 입력 2019.12.01 0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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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인을 들추어보기 전에, 도입부 — 오정희, <유년의 뜰>

 

유년의 기억은 어딘가 시린 구석이 있다. 그때가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말에 포함되는 감정은 유년시절 특유의 천진난만뿐만이 아니다. 당시에는 미처 깊숙이 파고들 여력이 없었던, 그렇지만 마음을 시리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명백한 일련의 감정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먹을 것에 집착했던 ‘나’인 노랑눈이는 내가 낳은 딸이 아닌 것 같다는 모친의 푸념을 엿듣는다. 서술 상으로 ‘나’가 크나큰 상처를 받았다거나 모친을 향한 분노가 인다는 등의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어린 아이의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다. 당연히 아이는 어떤 식으로든 충격을 받았을 테다. 하지만 그것을 자각하지 못함에 불과하다. 자신이 쓸 수 있는 언어의 범주 내에서 그러한 감정을 드러낼 만한 표현들을 찾을 수 없어서 단지 감정을 속으로 삼키는 것이다.

 

감정을 삼키는 노랑눈이의 행동은 손에 닿는 음식이면 무엇이든 먹고 보려는 과도한 식욕으로 표상된다. 극의 마지막에서 아버지가 전장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을 때도 노랑눈이는 교장실에 있는 케이크를 집어 들며 꾸역꾸역 먹어댄다. 그러다가 운동장을 가로질러 아버지를 만나러 교문으로 뛰어가는 언니를 보면서 불현 듯 케이크를 토한다. 이때 그녀는 “까닭 모를 서러움으로 눈물이 자꾸자꾸 흘러내렸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것도 소설의 최후반부에서 그녀는 음식을 먹는 것 대신에 울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외부로 표출한다. 노랑눈이인 ‘나’는 이렇게 극중에서 음식을 끊임없이 섭취하는 것으로 감정을 삼켰던 그녀가 역으로 음식을 “뱉어냄으로써” 감정도 함께 분출한다. 그녀를 둘러싼 유년기의 아픔은 어린 그녀가 감당하기엔 무거웠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게 무거웠기 때문에 그녀의 시선에서 비교적 무던하게, 단편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유년의 추억은 물리적인 차원과 정신적인 차원 양자에서 “희미하게 시린” 기억으로 자리 잡는다. 마치 트라우마를 겪듯이 유년시절의 그 때를 떠올리기만 하면 헤어 나올 수 없는 공포감이나 정신적인 불안정에 시달리는 것과는 다르다. 노랑눈이인 ‘나’는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답게 어른들의 말에 담긴 뜻을 깊게 파고들지 않고 가정이 파탄이 난 상황도 “긴 꿈”의 일종으로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천진난만하다. 이 천진난만함이 유년의 불우함을 덤덤하게 토로하게 만든다. 독자는 이런 화자의 시선으로 작품을 감상하면서 화자의 가정에 닥친 비극적인 사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한다. 어린 ‘나’가 미처 드러낼 수 없었던 비극의 크기를 여타 인물이나 3인칭 작가의 관점이 아닌, 독자가 비로소 원래의 크기대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 “밤마다 술 취해 오는 어머니, 더러운 이불 속에서 쥐처럼 손가락을 빨아대는 일 따위가 한바탕의 긴 꿈만 같이 여겨졌다. 진짜의 나는 안타까이 더듬어보는 먼 기억의 갈피짬에서 단편적인 감각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자신에게 닥친 절망적인 상황을 절망이 아닌 비일상의 꿈 정도로 치부해버리려는 ‘나’를 보며 독자는 일련의 부채감까지 느끼게 된다. 비록 독자 자신이 책 속의 ‘나’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건 아니지만, 어린 그녀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사실만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부채감은 이내 독자가 유년기에 경험했던, 작품 속의 ‘나’가 겪고 있는 감정들과 비슷한 기억들로 독자를 데려간다. 커버린 지금과 달리 어렸던 당시에 자신이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그렇기에 미세하게 마음 한 구석을 시리게 만드는 기억들을 꺼내게 만든다. 아픔의 순간은 이렇듯 어린아이의 시선에 의해 의도적으로 단편화된다. 결과적으로 독자들은 작품에 더욱 몰입하게 되고 작품에 간접적으로 드러난 절망의 무게를 자신의 해석을 통해 직접적으로 원래의 무게대로, 어쩌면 그보다 더 과장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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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댕 미술관

 

 

 

2. 선택적으로 펜을 내려놓았던 원인


 

변명을 늘어놓자면 노랑눈이가 그랬듯이 나 역시도 무언가로부터 벗어나고, 회피하고 싶었다. 노랑눈이는 먹을 것을 끊임없이 손에 쥐고 있음으로써, 그것을 끊임없이 삼켜댐으로써 절망을 외면했다. 그녀의 식탐이 그녀 자신의 회피 수단으로 작용했다. 나에게도 비슷한 식탐이 발동했다. 계속해서 강박적으로 무엇이든 일을 벌이고 그것을 수습하는 행위. 강박에서 비롯되는 수행(遂行), 충족으로서의 식탐. 굉장히 추상적이다. 쉽게 말하자면 이렇다. A를 하기 싫어서 B라는 일을 새로이 찾아내고 또 B라는 일이 하기 싫어지면 C라는 일을 찾아낸다. 원래 하던 것도 제대로 못해낸 주제에 이를 대체할 수 있는 또 다른 작업들을 계속 물색하는 거다. 참으로 무책임하고 고생스러운 습관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게 강박증세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 해야 하는 과제가 너무 하기 싫은 상황에서는 물론 웹툰 감상이나 쇼핑몰 구경처럼 여가 행위를 즐길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그보다는 대외활동 사이트를 띄워두면서 하고 싶은 것들을 메모장에 적어 놓는다든지, 전공수업 비평문을 작성하기 위한 영화로 무엇을 선정할지 그리고 어떤 레퍼런스를 활용할지, 혹은 어떤 새로운 서적들을 읽어볼지 등. 지극히 일적인 차원으로 이러한 권태로움이 너무나도 기이하고 강박적인 증상으로 발현해왔다. 이뿐만이 아니다. 나는 지독한 완벽주의자적인 증상도 보유하고 있다.

 

더욱 심각한 건 이증상이 게으름과 결부되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지나칠 정도로 꼼꼼하고 세심하게 일과를 계획해서 목표를 성취하는 유형의 사전적 정의상의 완벽주의자라면, 남한테 피해는 안 준다. 그런데 나같이 게으르고 아프고 악바리같은 완벽주의자형 인간은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 왜냐하면 데드라인에 맞추어서 일을 진행하지 않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서다. 게다가 어떻게든 꾸역꾸역 나름의 결과물을 내놓을 때, 본인은 티를 내고 싶지 않아도 말에서나 몸에서나 “얘가 진짜 말 그대로 죽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라는 사인을 상대방에게 전달한다. 그래서 정작 잘못한 건 본인인데 애꿎은 상대방에게 본인을 향한 측은함이나 안타까움, 미안함, 위로의 감정 등... 오히려 갑을관계(?)가 뒤집힌 결과를 자아낸다.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에 있는 버릇이다. 평생 동안 이걸 고칠 수 있을 지도 의문이다.

 

원래는 이 복귀 글도 훨씬 일찍 작성해야 했음에도 저런 습관들이 발휘되고, 요 며칠간 나를 지나칠 정도로 괴롭혔던 여러 난제들이 겹치는 바람에 11월의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글을 겨우겨우 쓰게 되었다. 그래서 굉장히 괴로웠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는 반드시 뱉어내어야만 하는 글이었다. 앞으로의 내 행보를 위해서. 나름대로 의미 있는 글자를 생산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렇게 나를 되찾기 위해서, 언젠가는 써 내야만 했던 글이다. 꽤나 긴 시간 동안 나의 글들을 어떻게 써 내려갈지 그래도 고민했다. 믿기지는 않겠지만 이 글도 새로운 구성의 첫 걸음에 해당하는, 그럭저럭 체계적인(?) 결과물이다.


노랑눈이처럼 정말 음식을 먹기만 하다 보니 이제 소화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 그녀가 작품의 최후반부에서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먹었던 케이크를 다시 토해냈던 것처럼. 나도 칼럼을 다시 토해내고자 한다. 한 가지 변한 점을 말하자면 칼럼 작성을 쉬기 전의 나와 재개한 지금의 스스로의 태도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어떤 태도냐면 글을 대하는 태도다. 이전의 내가 사전 그대로 삐딱한 관점에서 현대의 문화예술을 고찰하기 위한 글들을 쓰고자 했다면, 지금의 나는 앞서 언급했듯이 강박적이고 게으르고 완벽주의적인(...) 나로서 “삐딱한” 관점에서 글을 쓰려고 한다. 모종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세상과 타협하는 방법을 터득했기에 문화예술이 소속된 사회적 보편성이나 일반성의 틀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으려 한다. 아, 한 쪽 분량 정도의 조각글은 매 칼럼의 말미에 작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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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선생님 안녕하세요

 

 

 

3. 예고: ‘해야 할 일(The Next Right Thing)’에 관하여


 

<겨울왕국 2> 줄거리 포함.

결정적 스포일러 주의.

 

 

Can there be a day beyond this night?
내일이 오긴 올까, 오긴 할까?

 

I don't know anymore what is true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르겠어

 

I can't find my direction, I'm all alone

어디로 가야 할까, 나 혼자서

 

The only star that guided me was you

내 길을 밝혀주는 너 없이

 

How to rise from the floor

난 도대체 어떻게 바닥에서 일어나야 할까

 

When it's not you I'm rising for?

내 길을 밝혀주는 사람이 네가 아닐 때

 

Just do the next right thing

뭐든 해야만 해

 

Take a step, step again

한 걸음 또 한 걸음

 

It is all that I can to do

다시 넘어져도

 

The next right thing

나는 뭐든 해야만 해.

 

크리스틴 벨, "The Next Right Thing" 중 일부 (영화 <겨울왕국 2> OST)

 

 

11월 셋째 주에 개봉한 <겨울왕국 2>의 메인 테마 중 하나인 안나의 솔로곡 “The Next Right Thing.” 엘사도, 올라프도 모두 자신의 곁을 떠났다고 생각했을 때 그녀가 느꼈을 절망의 강도는 감히 가늠하기 어렵다. 그녀는 변화를 두려워했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그녀는 엘사와의 관계가 계속해서 사소한 일 하나로 틀어질까봐 매 순간을 전전긍긍하며 보냈고, 북쪽에 위치한 마법의 숲에 갔을 때에도 엘사가 혹여나 정령들에게 위협을 당할까봐 가는 곳곳마다 그녀를 저지했다.

 

하지만 운명 또는 섭리라 불리는 “변화”를 막기에 안나의 노력은 역부족이었다. 엘사는 아토할란으로 떠난 뒤 섬 안에서 너무나도 깊은 곳으로 들어간 나머지 선대의 치부를 목도하긴 했으나 그대로 얼어버렸다. 어찌 보면 죽음을 맞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녀가 마법을 쓸 수 없게 되자 그녀의 마법으로 육체와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던 올라프도 사라졌다. 안나는 절망했다. 올라프의 마지막을 함께한 뒤 그녀가 극중에서 불렀던 곡이 바로 저 노래다. 그녀는 절망에 빠졌지만 자신의 내면이 만들어내는 동굴 깊숙이까지 구태여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마음을 굳게 고쳐먹고 지금의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해내고자 한다. 그리고 용감하게도 숲의 댐을 부수러 바위 거인들을 유인한다.

 

그렇게 섭리를 바로 잡으려 스스로의 목숨까지 불사한다. 아렌델의 옛 호위군들과 연인 크리스토프의 도움을 받아 그녀는 극적으로 살아난다. 바위 거인은 댐을 부순다. 댐이 무너지고 그간 막혀있던 폭포의 흐름이 되돌아오면서 숲의 저주도 풀리고, 엘사를 감쌌던 얼음의 흔적들도 흘러내린다. 저주에서 해방된 그녀는 재빠르게 물의 정령을 타고 아렌델로 향한 후 폭포의 범람을 국경 코앞에서 막는다. 이후에 안나와 재회하고 올라프도 자신의 마법으로 원상복귀 시킨다. (아무리 그래도 올라프를 하늘나라로 보낼 순 없었을 게 분명하다. 어린이 관객들의 미움을 사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말이다.)

 

영화의 결말은 당연하게도, 우리 모두가 예상하듯이 해피엔딩이다. 엘사와 안나는 또 한 번 자신들에게 닥친 위기를 극복하고 성장한다. 1편에 비교했을 때 가시적으로 달라진 것은 그녀들이 결말에서 물리적으로 분리되었다는 점이다. 엘사는 마법의 숲에 남아 숲을 수호하는 정령이 되고 안나는 아렌델의 여왕이 된다. 작품을 둘러싼 관람객들의 평가는 전작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지근하다. 전작에서도 물론 짧은 러닝타임 안에 극적인 서사 요소들을 가미하려고 시도했던 탓에 전개 과정이 매끄럽지 않다, 후반부로 나아갈수록 영화의 호흡이 불안정해진다는 등의 비판이 제기되곤 하였으나. 이번 편은 그러한 비판의 강도가 더욱 거세졌다. 내러티브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보다 자세하게 기술하고자 한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의 캐릭터성은 1편보다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되었다. 안나를 예시로 들어 짧게 언급하겠다. 그녀는 코앞의 미래가 어두운 와중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일을 행했던 아주 주체적인 인물이다. 서사가 급속도로 전개되는 와중에 돋보였던 것은 그녀의 용기였다. 그녀는 절망스러운 와중에 동굴의 출입구까지 어찌어찌 올라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바위 거인들을 유인한다. 몇 번이고 거인에게 공격당해 죽을 뻔 한다. 댐을 파괴해서 섭리를 바로 잡겠다는 그 마음이 자신의 목숨을 걸 정도로 중요한 것임을이 잘 드러난다. 영화를 감상하는 내내 안나의 용맹함에 감탄했다. 분명히 그녀의 용맹함은 클리셰에 가깝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험난한 과정을 거쳐 과업을 이루어내는 인간상은 여러 영화에서 모범적인 인물을 제시하기 위한 기제로 많이 사용해 왔다. 디즈니 영화를 비롯한 각종 애니메이션, 더 나아가 현실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실사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나는 진부한 기제임을 알면서도 이렇게 매번 스크린의 “마술”에 넘어간다.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을 나오면서 사유의 화살을 나에게로 돌렸다. 나는 그동안 현실에 치여 살면서, 목전에 닥친 일들을 그때그때 수습하고 그것들이 나에게 가져다주는 버거움에 끙끙대느라 내가 진정으로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망각하며 살았다. 내가 책임을 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나는 그저 회피하기에 바빴다. 스크린 너머에서의 안나가 보여주는 모습들은 그간의 내가 저질러 온 잘못들을 되돌아보도록 종용했다. 영화는 이런 차원에서 신비롭다. 문학이 아니면서도 문학적인 장치들을 가지고 있다. 한편 매우 사진적인, 모든 것이 물리적인 자연과 현실에서 비롯된 요소들로 꽉 차 있는 기술적인 이미지들로 스크린을 채운다. 그 안에서 인간에게 “무언가를 전달한다”는 기제를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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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글에서는 이처럼 언어체계로서,

언어로서의 영화가 어떻게 성립할 수 있는지.

그러한 설명이 유효한지.

영화의 힘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겨울왕국 2>를 통해 살피며

정말 본격적으로 칼럼 연재를 재개하고자 한다.

예정된 연재 주기보다 빨리 돌아올 것이다. 정말이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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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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