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역사와 보통 사람, "알리바이 연대기" [공연예술]

글 입력 2019.11.14 0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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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플렛에 쓰여 있는 호평과 <알리바이 연대기>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에 꽂혀 공연을 예매했다. 11월 7일 목요일, 저녁 7시 30분 명동예술극장. 남명렬 배우와 정원조 배우의 연기는 좋았지만, 여러모로 내가 기대한 내용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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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처럼 노란 조명이 무대를 비추고 낡은 책이 빼곡히 차 있는 책장이 보인다. 1998년 아들 재엽이 방위군 훈련장에 가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아들을 배웅하는 아버지 김태용은 눈물을 훔친다. 내레이션이나레이션이 잔잔하게 흐른다. '그때는 아버지의 눈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윽고 이어지는 아버지의 역사. 1930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조선말보다 일본어가 익숙했던 어린 김태용. 격동의 1940년대 살아있던 이들이 다 그렇듯 폭격에 벌벌 떨고 얼떨결에 해방을 맞는다.

 

해방 때 부산으로 넘어와 경북 구미에서 박정희와 한동네에 살기도 한 김태용은 경상도 사람으로서 한국 근현대사를 거쳐 간다. 한국전쟁을 겪고 서울 광화문에서 삽질하는 등 아버지는 한국 현대사의 큰 사건들을 두 눈으로 직접 보는 인물이다. 이런 아버지의 연대기는 아들인 재엽과 재진에게 이어져 둘은 한국의 80년대 대학생으로서 시위와 집회 등에 열정적으로 참가한다. 이 연극의 줄거리는 간단히 말해 한국 현대사에 발맞춰 살아온 아버지의 삶과 그런 그의 뒤를 쫓는 아들의 감상적인 회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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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0년대, 뉴스와 신문으로 보여주는 정치/역사적 사건들, 그때 그 시절 물건들(풍로곤로, 세로글자 책, 미소라 히바리 등)로 신기함과 추억을 동시에 불러오는 일, 나는 이 연극과 '응답하라 1988'이 상당히 비슷하다고 느꼈다. 시대상, 가족 사이의 애틋한 정서, 소시민의 삶과 현대사를 병치시키는 방식 등이 그렇다. 이 연극은 여성 배우가 한 명뿐이고,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남성 유대가 중심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나는 <알리바이 연대기>라는 제목에서 엄청난 비밀과 그 비밀이 밝혀지는 강렬한 서사를 기대했다. 사실 아들을 군대에 보내며 우는 태용을 보고 군대와 관련한 비밀이 있는 게 아닐까 두근거렸다. 틀린 예상은 아니었지만, 강렬하지는 않았다. 엄청난 비밀도 아니었고. 나는 초반부터 불편함이 슬금슬금 기어올랐고, 마지막에는 물음표만 잔뜩 띄우고 극장을 나왔다.


아버지는 정직하고 아들은 성실하지만, 그런 장점이 연극의 진부함을 가리진 못한다. 이 연극의 중심이 굴곡진 현대사가 아니라 아버지의 한 많은 삶이기 때문에 조명은 계속 아버지를 비추는데, 나는 왜 내가 이 인물에 주목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아버지가 현대사를 몸소 살아온 분이기 때문에? 하지만 그가 겪은 경험은 1930년생 남성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법한 일이고 (해방, 한국전쟁, 반공 적출, 시위 등) 그를 딱히 역사적 인물로 간주해야 할 만한 특징이 있는 건 아니다(국회의원이 되거나, 공산주의에 빠지거나, 수감되는 일도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그가 오히려 그가 소시민이기 때문에 주목해야 하는 걸까? 우리는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당당히 자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여기지만, 사실 그 언저리에서 묵묵히 자기 삶을 지키고자 살아간 사람이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걸까? 작가의 목적은 후자일 테지만, 그래도 불편함은 여전하다.


일단 굴곡진 현대사에 비추어 보면 김태용이 안정적인 삶을 지킨 게 신기하다. 경상도 출신에, 빨갱이 가족도 없고, 대졸 학벌에 교사라는 직업까지, 김태용은 모두가 꿈꾸는 평범한 삶을 그 삭막한 시기에 살았다. 김태용 자신이 몸을 사린 덕도 있겠지만, 과거의 폭력은 개인이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말을 잘못해서 죽은 게 아니라, 그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살해당하고, 잡혀가 고통받은 목숨이 몇 개인가. 김태용의 아버지는 가족들의 품에서 죽었고, 아내도 있고, 아들들은 자기 임종을 지킬 때까지 살아남았다. 그와 비슷한 삶을 살았을 한 가족은 민청학련에 연루되어 젊은 아들을 억울하게 잃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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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용의 정치성은 <사상계>를 탐독하거나, 남몰래 장준하를 흠모하고 김대중 같은 정치인을 지지하는 대사 (행동이 아니다)로 나타난다. 그가 어찌 됐건 폭력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원한다는 건 분명하다. 검소하고 진실하며 뉴스에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국가 폭력에 가슴앓이한다는 건 공연 내내 충분히 드러난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한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모른 척해야 했다는 씁쓸한 고백이 그의 무죄를 증명해 주지는 않는다. 언제나 행동만이 진실이니, 김태용의 삶에서 역사는 뉴스였고 신문이었고 다른 누군가가 겪는 사건일 뿐이다. 광화문에서 삽질하다 박정희를 봤다는 게 민청학련이 아들을 뺏어갔다는 진술과 같은 무게를 갖지는 않는다.

 

1부가 끝나면서 <알리바이 연대기>라는 제목의 의미가 드러난다. 그 억압과 폭력의 세기를 지나기 위해 우리는 모두 속에 알리바이를 품고 살 수밖에 없었다는 회한.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가슴 아프다. 하지만 감상에 젖어서 이 말을 가만히 듣고 있을 수만은 없는 법. 알리바이란 본래 범죄가 일어난 때에, 자신이 그 장소에 부재했다는 사실을 증명함으로써 혐의를 벗어나는 방법을 뜻한다. 이렇게 보면 김태용의 <알리바이 연대기>는 성립할 수 없다. 그는 범죄가 일어난 때에 (국가 폭력이 일어나는 일상에) 그 장소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아들은 아버지가 일본, 영어, 다양한 외국 서적을 탐독하며 마음만은 자유로운 해외로 떠나 있는 알리바이를 만들고 있었다고 말한다. 알리바이를 '만드는 건' 혐의자나 제삼자나 누구나 할 수 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아버지 김태용이 사실은 사악한 폭력의 가담자였다는 비난이 아니라, 딸린 몸이 많고 두려워서 어쩔 수 없었다는 게 면죄부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죄일 수 없다. 우리가 보고 겪고 들은 것이 있기 때문에 의도와 상관없는 폭력을 저지르고 안일한 태도로 대다수의 논제를 바라보기 일쑤다.

 

김태용은 계속해서 자신의 부끄러움에 대해 말한다. 이건 정말 어떤 행동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도덕적인 죄책감에서 나오는 부끄러움이다. 더러운 세상에서 벗어날 수세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괴로움을 아들이 자랑스럽지만 안타까운 눈으로 지켜본다. 이 작품의 치명적인 단점은 김태용이라는 인물이 너무 평면적이다. 별 탈 없이 살아가면서 오사카를 그리워하기만 하는 인물은 지금 현실이 불만족스럽다는 사실 말고 뭘 알려 주는가? 그가 김대중을 응원하고 전교조를 지지했다니 반갑지만, 딱히 손뼉 칠박수칠 일은 아니다.

 

이 연극은 어디까지나 둘째 아들 재엽이 본 아버지의 모습일 뿐이다. 아버지의 단점이나 실수는 드러나지 않고, 그렇기에 그가 아버지가 정말 어떤 사람이었는지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어머니가 보았을 아버지의 모습, 형이 보았을 아버지의 모습은 알 수 없다. 내레이션은나레이션은 거의 아들의 설명과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들은 말을 토대로 한 대사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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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역사 주체가 아니라, 소외되어 있던 대중들의 일상과 삶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극작가의 의도는 자기 아버지에 대해 말하고 싶다는 의도와 맞물렸다. 그리고 그의 삶은 충분히 의의가 있다. 그건 '국제시장' 덕수의 삶이 의미 있는 것과 같은 이유다. 순박한 사람이 몇십 년의 세월을 고달프게 살아온 내력은 그 자체만으로 감동적이다.
 
하지만 나는 관객이고, 공적인 서사에 등장하는 인물을 궁금해할 자격이 있다. 왜 김태용인가? 왜 '소외되어 있던 대중의 일상과 삶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인물로 김태용이 등장해야 하는가? 그의 삶은 어떤 의미를 품고 있고 어떤 진실을 암시하는가? 자식이나 가질 법한 연민이나 나르시시즘 없이 주인공이 주인공일 때는 그 근거가 있어야 한다. 선량함이나 성실함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런 불만은 김태용이 내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아들도 아니고 내 아버지는 경상도 출신이 아니며, 평생 불안정한 노동으로 입에 풀칠해온 분이다. 그도 보통 사람이지만, 연극의 아버지와 같은 삶은 살지는 않았다. 이렇게 '보통 사람'이라는 단어는 무수히 많은 위치와 계급으로 다시 나뉜다. '보통 사람'인 게 도대체 무엇인가? 가정이 온전한 사람? 감옥에 가지도 않고 과도한 정치적 주장을 하지도 않은 사람? 역사를 살펴보면 보통 사람이란 그저 운이 좋은 사람의 다른 말이 아닐까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역사는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제3의 대중들로 분류되지 않는다. 역사는 모두가 복잡하고 지저분하게 얽히는 법정이다. 누구도 무대에서 관객석으로 내려갈 수 없다. 우리가 다른 나라에 태어난 다른 나라의 국민이지 않은 한 알리바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물론 나는 폭격과 죽음의 공포에 숨죽여야 했을 한 아버지의 삶을 이해한다. 군대가 강요하는 폭력에 괴로워하면서도 말 한마디 꺼낼 수 없던 시대를 생각하면 탄식이 나온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자유와 존엄에 대한 인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쉽게 견딜 수 없을 만큼 잔인했다. 하지만 그 역사를 '그때는 그랬지' 하고 노란 조명 아래 병실에 누운 사람 입에서 듣기에는 아직 끝나지 않은 일이 많지 않은가. 남북은 여전히 분단 상태고, 군대 폭력, 세월호 참사 등 해결해야 할 일투성이다. 이 정도면 많이 변했지, 하고 과거를 돌아보는 시선을 만날 때마다 나는 겁이 난다. 여기서 멈출까 봐. 과거를 과거로 남겨두기 위해, 우리는 폭력의 기억을 토대로 계속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연민보다는 두려움을 가슴에 품고서.

 




[김나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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