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예술은 공공재인가, 사유재인가? [문화 전반]

커뮤니티 아트와 미술 시장
글 입력 2019.11.01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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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공공재인가, 사유재인가? 이 고민은 나의 첫 기획 전시가 끝난 직후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처음 시작은 야심 찼다. ‘나는 기존의 전시와는 다른 이미지들을 보여줄 것이다.’ 즐거운 다짐에 마음은 시도 때도 없이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어찌 첫술에 배부를 수 있을까. 내 욕심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물과 식상하다고 느껴지는 기획들에 마음이 착잡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리고 그 고민의 끝에 나는 새로운 생각의 지점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기존과는 다른 것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예술’은 나에게 곧 ‘새로움’이었다. 내가 만들어낸 새로움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겠다는 꽤 거창한 다짐을 했더랬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 조급함은 허무함만 가져다주었을 뿐이다. 전시장에 상주하면서 관객들이 작품과 어떤 연결을 시도하고 어떤 감정들을 공유했는지 듣고 싶었다. 관객이 내 의도대로 작품을 읽었으면 하는 것은 아니었다. 작품과 교류가 있었는지, 있었다면 그건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벽에 걸어두거나 땅 위에 얹어놓은 작업물 사이사이를 지나다니고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금세 떠나버리는 발걸음들의 속이 궁금했다.

 

나 또한 가끔은 작품을 아무런 교감 없이 지나치기도 한다. 작업물을 충분히 맛보지 못했기에 ‘내가 이 전시를 봤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문득 든다. 특히 영상물은 시간이 꽤 긴데, 그 작업들을 모두 천천히 음미하기에 내 체력은 너무나도 약하다. 그렇지만 ‘이 작품을 충분히 느껴야 해!’라는 부담감 같은 것들은 최대한 배제하려고 한다. 의무감보다는 언제나 즐거움으로 그들과 마주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곤한 와중에도 작품과 더욱 가까워지는 순간은 참여형 작품을 만날 때다. 내 행위 또한 그 작품의 일부가 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흥미롭다. 새로움에 대한 갈망, 그리고 관객으로 참여하는 경험이 뒤섞여, 내 머릿속에 새로운 질문을 던져놓는다.. 관객을 좀 더 적극적으로 작품에 참여시킬 수 있다면 어떨까? 단순히 공간에 작품을 내려놓고 ‘이것들을 보세요’가 아닌, ‘여기 참여해보세요’를 적극적으로 제시해보는 거다. 물론 그 방식은 다양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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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의 죽어 있는 예술과 상반된 것으로 화랑이나 무대라는 상황을 벗어나 예술행위를 구체화하고, 사회적, 정치적 목적을 위해 특정 집단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욕구를 가진 일군의 예술가들의 활동. 공동체 예술가들은 특정 예술 형태들 사이의 특성을 초월하여 거리의 무대, 비디오, 벽화, 교통수단, 기구, 놀이구조 따위를 이용한 보편적인 매체 접근 방법을 쓴다.

 

 

‘커뮤니티 아트’ 단어를 알게 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커뮤니티 아트는 하나의 형식이나 형태로 정의할 수 없다. 주로 예술가와 비예술가가 협업하며 하나의 공동체에서 활동하는데, 예를 들어 ‘리슨투더시티’가 진행하고 있는 ‘메이드인을지로페스티벌’이 그와 같은 경우라 볼 수 있다. 재개발이라는 이유로 평생을 살아온 삶의 터전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 주민들과 협업하여 하나의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을지로에서 살아온 이들의 기억을 채집하고 이 공간의 기억들을 취합하며, 자료를 시각화하여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또한 을지로 투어를 진행하면서 관객들이 공간의 공기를 직접 마시고 생각하며, 사회 문제에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한다.

 

비슷한 맥락으로 공동체의 기억을 보존하는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 있다. 특히 제주도는 외부인이 많은 동네다. 그들이 오기 전 원주민이 기억하는 제주도의 모습은 어떠할까. 처음 제주도에서 공동체를 이루었던 이들의 인터뷰를 진행하고, 그에 대한 자료를 남기는 작업도 있다. 또 다른 예시로, 북한이탈주민 또는 북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커뮤니티에서 진행된 작업도 있다. 고향인 이북에 대한 구술 자료를 모아서 그것을 이미지로 구현해내는 것이다. 생생하게 나타나는 이미지를 보며 눈물 흘리는 그들은 제3자인 관객의 눈에도 쉼 없이 눈물이 흐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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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문화 예술을 창작하는 활동에 직접 참여하는 예술. 공공 예술이 전문가가 창작하여 대중에게 제공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예술은 대중이 직접 참여하여 문화를 만드는 데 중점을 둔다. 주민들이 자신이 사는 마을에 벽화를 그리는 일이 대표적인 예이다.

 

 

같은 ‘커뮤니티 아트’에 대한 정의이지만, 이는 좀 더 창작자의 비중에 ‘대중’을 높게 두고 있다. 공동체 문화개발, 즉 예술가-기획자와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의 협업적 실천을 가리키는 용어 또한 같은 맥락으로 설명될 수 있다. 미국의 예시로, 길거리에서 흔히 말하는 불량 청소년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그 안에서 그들만의 창작 활동을 하고 그 작업물들을 파는 작업들을 진행한 프로젝트가 있다. 이처럼 공동체에서 이루어지는 문화개발은 구성원들이 예술과 삶을 좀 더 깊게 부대낄 수 있게 한다. 예술가는 여기서 사회 변형을 이끄는 매개자 역할을 수행한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파견예술’이라는 단어도 있다. 말 그대로 임무가 주어진 사람이 어디론가 이동하는, 즉 예술가가 파견을 가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진행하는 ‘예술인파견지원사업’이 있다. “예술인파견지원사업은 예술인의 사회적 가치 확장을 위해 다양한 예술직무영역을 개발하고 사회와 협업을 기반한 직무를 제공함으로써 적극적 예술인 복지를 실현하고자 진행하는 사업이다.”

 

즉, 예술가들은 특정 공간에 파견을 간다. 그곳에서 문화 예술을 많이 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예술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파견 간 회사의 직원들과 함께 연극놀이 체험을 하며 협동심을 기르고, 다 같이 회의실을 꾸미며 회의 문화 개선에 힘쓴다. 회사 공동체 활성화, 문화 예술에 대한 접근성 향상 등 다양한 긍정적 효과가 있을 것이다. 또한 그런 프로젝트를 통해 예술인의 일자리 확장도 기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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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파견예술’이라는 단어는 ‘민중미술’과 좀 더 연관성이 있을 것이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이 있을 때였다. 공장 앞 쪽에 희망텐트촌이라고 하는 귀엽고 예술적인(?) 텐트들이 들어섰다. 해고노동자들과 파견미술팀이 함께 꾸린 작업이었다. 현장으로 파견을 간 예술가들은 그들과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예술로 사회에 개입하고, 새로운 문화로 서로의 마음을 보듬었다.

 

‘민중미술’은 1980년대에 등장했다. “기존의 심미주의적 형식주의가 판치는 미술계에 대한 반성으로, 미술을 통해 사회에 대해 발언하고 민주화 운동을 함께 해야 한다는 미술인들의 자각으로 일어났다.” 특히나 80년대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이 있었고 그에 대한 정부의 무력 진압에 반대하면서 민중미술은 더 활발히 일어났다.

 

물론 사회에 개입하지 않는 예술이 어디있겠냐마는, 이처럼 공동체 예술이라 불리는 것들은 좀 더 다양하고 적극적으로 현실에 개입한다. ‘포스트-민중미술’ ‘현장미술’ ‘파견예술’ ‘공공예술’ ‘공동체 예술’ ‘새장르 공공미술’ ‘행동주의 예술’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다양한 만큼 표현하는 방식 또한 다양하다. 본인의 작업이 이렇게 규정화된 단어로 설명되는 것을 거부하는 작가도 있다. 민중미술과 현장미술이 너무 사회 문제들에 집중한 나머지 미술에서 본질적인 ‘미’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현장에서 사회에 스며들되, 자신만의 미학적 신념을 잃지 않겠다 다짐하는 작가도 있다.

 

‘예술’ 그리 가볍게 느껴지는 단어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저 두 글자에는 묵직함이 느껴진다. 수년간의 역사와 이야기들은 겹겹이 쌓여 단어에 무게감을 부여한다. 예술이라는 단어는 무언가 신비스러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예술을 공부하고 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놀라움과 경이로움 등의 반응을 보인다. 예술가는 어딘가 다른 사람, 일반 사람들과 사고 체계가 다르며,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사람, 천재 등의 수식어로 불리기도 한다. 이 대부분의 상황들 역시, 예술에게 부여된 무게감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혹자는 미술 학교에서부터 이런 인식을 조금씩 허물어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예술은 특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질이라고 이야기한다. 생각해보면 정말로 학교에서 미술의 기능이나 미술의 역할에 대해 깊게 배운 적은 없다. 미술을 위한 미술을 주로 배운다. 어떻게 하면 더 새로운 표현법을 연구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새로운 사고방식과 표현 방식에 대한 작업들을 진행한다. 혹자는 미술 학교에서 진행하는 그러한 수업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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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예술이 개인의 소유이냐, 공동의 소유이냐 하는 문제 또한 이야기할 수 있겠다. 학교에서는 하나의 시각적 물질을 창조하는 형태로 작업하기 때문에 그 작업은 작가의 소유라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미술 작품은 시장에서도 많이 거래되고 있다. 개인이 소유한다는 개념이 어쩌면 더 보편화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공공예술, 공동체 예술에서 말하는 미술 소유의 개념은 조금 다르다. 예술은 모든 사람이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으며, 대가를 치르지 않더라도 소비 혜택에서 배제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와 관련하여, 재미있게 본 작품이 있다. <콜렉터스 초이스>에서 작가 오재우는 오형근, 앤디 워홀, 피카소 등 유명 현대 미술가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콜렉터를 섭외하여 이들의 소장품을 소개하는 전시를 기획하였다고 밝힌다. 관객들은 이 영상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마어마한 소장품에 감탄하지만, 곧이어 따라오는 이미지는 관객에게 이 이야기가 허구일지도 모른다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데미안 허스트 작품은 화장실에 걸려 있고, 앤디 워홀과 피카소의 작업은 얇은 종이에 인쇄된 복제품이다.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 만 원도 안 되는 가격에 거래된다.

 

 

오재우는 각 콜렉터를 찾아가 그 작품을 소장하게 된 경위를 영상 인터뷰하고 작품이 콜렉터의 공간에 어떻게 위치되어 있는가를 사진으로 찍어 전시한다. 그러나 이 작업 전체는 우선, 작가가 콜렉터로 소개되는 참여자들에게 그들이 소장하고 싶은 작품 이미지를 받아 이를 최대한 비슷하게 보이도록 제작해준 후, 그 모작을 소장하게 된 콜렉터들에게 이 작품을 소장하게 된 경위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진품을 소장해본 적 없는 모조품 콜렉터가 진품 소장의 경위를 상상해서 만들어 낸 이야기는 이들 마음속 진짜 예술품의 거래 모습, 그 상상의 폭과 한계를 드러낸다. 그리하여 이 허구의 이야기도 팩트에 근거한 이야기만큼이나 예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한 단면을 드러낼 수 있다.

 

 

예술 시장에서는 특히 그 ‘아우라’를 중시한다. 아우라는 작품이 희소가치가 있을 때 더욱 커진다. 모나리자가 사랑받는 여러 이유 중에 한 가지는 그것이 단 하나의 유일무이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달력에 그려진 유명한 작품들이 그리 비싸지 않은 것도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모나리자는 꼭 내가 돈을 주고 구매하여야만 소유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 마음속에 저마다의 모나리자는 다 하나씩 가지고 있지 않을까? 작가는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의 생각에 질문을 던진다. 예술의 소유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말하는 인터뷰이를 통해 관객 또한 스스로의 생각으로 작품에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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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아트’에도 아직 답해지지 못한 질문들이 남아있다. 모두가 함께 만드는 예술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결국에는 기획자라는 개인 한 명이 모든 성과를 독식하게 되는 것. 예를 들어 벽화 작업을 하면서 함께 벽화를 그린 사람들의 것이 아닌, 결국 그 프로젝트를 기획한 한 명이 모든 성과를 가져가게 된다는 것이다. 공동체 미술에서 작가는 없으며 그곳의 모든 사람이 작가이자 창작자임을 표방하지만, 작품이 유명해지면 성과는 기획자가 모두 가져간다. 과정 중심을 외쳤지만, 결론적으로는 결과 중심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모두가 소유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표방하였지만, 또다시 누군가에게 귀속된다. 사회를 이야기하는 작업을 하기 위해 민중들을 대상화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어떤 작가는 ‘내가 개인적인 작업을 위해 사회 문제를 그냥 소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예술은 우리의 삶에 틈을 만들어 낸다. 그 틈에서 누군가는 숨을 돌리고, 누군가는 새로운 일들을 개척해나가기도 한다. 최근에는 사회 이전에, 공동체에서 그 틈을 만들어 내고 서로의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늘어나는 추세다. 방식이야 어찌 되었건, 예술이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은 명백하다. 그 다양한 방식 속에서 당신의 생각이 듣고 싶다. 당신에게 예술은 어떤 의미인가?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인가, 모두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자질인가, 사회 고발의 도구로 사용되어야 하는 것인가, 그만의 독창적인 분야를 계속 개척해나가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 모두를 아우르는 것인가?


 

[장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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