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현대예술의 위기 [문화 전반]

수단으로 전락해버리다.
글 입력 2019.10.25 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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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는 “예술은 타자를 그 현전성(존재자가 존재하는 방식)에 고정시키기를 거부함으로써 타자를 구원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한편, 니체는 최초의 예술이 축제의 예술이었다고 보았다.

 

 

과거에는 모든 예술 작품들이 드높고 황홀한 순간들에 대한 기호이자 기념비로서 인류의 드넓은 축제의 거리에 전시되었다. 지금은 인류의 거대한 고통의 거리에서 지치고 병든 불쌍한 자들을 꾀어 옆으로 데리고 가서 한순간 욕정을 채워주는 데 사용된다.  

 

 

스피노자가 말한 예술대로, 황홀한 시간으로서 과거의 축제는 평범한 노동시간이었을 일상을 정지시켰다. 하지만 니체의 말에 따르면, 현대의 축제는 그렇지 못하다.

 

 

 

1. 노동과 축제 사이의 경계선


 

과거에는 ‘축제의 예술’ 자체에 주목할 수 있었기에 축제 예술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축제의 시간(현전성에서 탈피하는 시간)과 노동의 시간이 분리되어서 생각되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나타나는 축제들의 형태는 그렇지 않다. 일상에서 노동의 시간이 전면화되어 노동과 축제 사이의 뚜렷한 경계선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시는 청년들을 타깃으로 한 축제들이다. 이러한 페스티벌들은 대부분 지친 청년들에게 위로를 준다는 테마, 혹은 잠시 쉬고 가자는 테마로 기획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이 글은 현대 사회에 나타나는 공연예술의 양상과 관객들의 소비 관점에 대해 분석한 글로 공연기획, 운영에 대해서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

 

‘올해도 수고한 나를 위한 선물’, ‘먹고, 쉬고, 놀자‘, ‘노오-력 금지’ 등의 슬로건은 청춘들이 견뎌내야하는 사회의 압박에 대한 소심하고도 용감한 반항을 아주 잘 나타낸다. 이러한 페스티벌의 공감적 메세지와 훌륭한 운영체계, 화려한 라인업으로 큰 인기를 얻었고, 2013년부터 2019년까지 매년 개최되고 있다. 이러한 현대 축제의 양상은, 2010년대 초반부터 지치고 피로한 현대인들에게 트렌드 키워드로 부상했던, 그리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힐링 열풍‘의 한 현상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청년들을 타깃으로 한 많은 페스티벌 기획자들은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관객들에게 ‘노동에서 잠시 쉬어가는 축제’를 꾸미기 위해 노력한다. 이를 소비하고 즐기는 관객들의 관점도 마찬가지이다.

 

오랜 전통을 이어왔던 대학가의 축제들 또한 그렇다. 대학 축제는 축제 예술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학창생활 힘든 지적노동을 달래기위한 필수수단으로서 존재한다. 학창시절의 황홀한 순간과 대학 문화를 담아 기획을 한다기 보다는, 학생들의 스트레스를 얼마나 더 날려줄 수 있을지, 그러기 위해 얼마나 재밌고 인기있는 가수를 섭외하는지에 더 초점이 맞춰져있다. ‘예술적인 대학 축제’는 존재하지않거나, 혹 존재하더라도 ‘재미없음, 시시함‘이라는 단어로 점점 사라지고 있는 추세다.

 

이러한 현대의 축제는 과거와 다르게 노동의 시간과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다. 노동으로부터 회복한 후, 자신을 온전히 노동과정에 제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다. 연예사업의 부흥과 이와 결부된, 한정된 축제 콘텐츠 또한 이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친다.

 

 

 

2. 상업화


 

 

박수근 그림, 홍콩 경매시장서 23억에 팔렸다

시위에도 서울옥션 홍콩세일 '선방'

낙찰률 79%, 낙찰총액 약 66억원

이우환 '동풍'은 20억원에 팔려

 

  

또한 예술은 거래와 전시를 통해 상업화되었다.

 

즉, 예술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이 소비되는 것이다. 거래소에서의 예술작품은 가치를 잃은 채 순수하게 투기가치로만 판단이 된다. 오늘날 이 투기가치는 예술 작품의 최고의 가치로 드러난다. '미'가 시장의 논리에 따라 판단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최근 인기있는 전시회들을 검색해보면, 수많은 인증샷들을 아주 쉽게 접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수요를 파악하여 전시 기획자들은 인증샷을 위한, 소위 ‘인스타를 위한 있어보이는 전시회’들을 계속해서 개최한다. 이러한 현상들을 예술의 위기라고 말하기엔 큰 비약인 것 같아 보이지만, 그들이 예술을 접근하는 방식에 주목해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들은 철저히 본인만을 위해 예술작품을 소비한다. ‘…하기 위해서’라는 말이 붙는 순간, 즉 이해관계를 수반하는 순간, 예술작품은 고유의 가치를 잃는다. 앞서 말했던 현전성에 고정되는 것은 물론이고, 황홀한 순간들에 대한 기념비 그 자체가 아닌 사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리기 때문이다.

 

*

 

쉴러는, 유용성이라는 거친 저울에 달아보면, 예술의 비물질적인 공로는 전혀 무게가 나가지 않으므로 위기를 맞았지만, 인간은 아름다움을 통해 자유에 이르기 때문에 미적인 길을 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란스럽고 피로한 시대, 예술에 대한 고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참고문헌>

 

한병철, 「아름다움의 구원」

문학과지성사, 2016

 

 

[태예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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