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여백 속에서 영원해지는 전통 [시각예술]

글 입력 2019.10.11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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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하지 않음이 두려울 때가 있다. 치열하게 살아낸 하루들이 흔적도 없이 잊힐까 봐 죽음이 두렵고, 그래서 세월이 흘러도 여전한 것에 위안을 받는다. 복잡하게 작열하는 도심의 빛에 피로하던 눈이 그러나 그보다 밝게 뜬 달에 머무는 이유는, 오래전에도 세상을 비췄을 그달이 이 밤 중 유일하게 여전하고 또 여전할 빛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고즈넉한 고궁이나 옛 문인의 글씨를 볼 때 숭고한 문화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를 정감과 편안함이 느껴지는 이유이다. 하지만 이전의 것을 고쳐서 새롭게 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새로운 관습이 되면서 그 가치는 빛바래졌다. 전통은 진보를 위해 극복되어야 할 존재가 되고 새롭게 펼쳐질 미래의 걸림돌이 되었다.

 

특히, 시대의 변화를 가장 먼저 반영하는 거리는 누구 하나 마음 편히 머물 곳이 없을 정도로 밀려오는 급류로 메워진다. 전통예술의 미적 가치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지만, 그것조차도 도시의 거리가 아닌 박물관에 고이 머물러져 있어야 마땅한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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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예술이 박제된 상태가 아닌 살아 숨 쉬는 모습으로 전승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시시각각 변화하는 시대에서, 급물살이 거친 거리에서 그것은 훼손되지 않고 원래 모습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을 담은 전시를 두 곳 들렀다.

 

한 곳은 전통에 현재를, 한 곳은 현재에 전통을 가져다 놓은 듯했다. 그러나 그 공간을 다 둘러보고 오면 결국엔 전통과 현재, 그리고 미래를 관통하고 하나로 융합하는 무언가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과 서울관에서 열리는 《덕수궁-서울 야외 프로젝트: 기억된 미래》와, 홍대 써드 뮤지엄의 개관전 《3색광경전》을 다녀왔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과 서울관에서 열리는 《덕수궁-서울 야외 프로젝트: 기억된 미래》는 두 전시관의 역사적 배경을 기반으로 한 다섯 점의 야외설치작업을 통해 백 년 전 시도되었던 근대화를 재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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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관에서 가장 먼저 관객을 맞는 작품은 입구에 있는 광명문에 설치된 스페이스 파퓰러의 '밝은 빛들의 문'이다. 문 한가운데에 디지털 화면을 설치하여 문이 여닫히는 애니메이션이나 스마트폰에서 볼 수 있는 픽토그램 등 미래적인 이미지를 띄운 것은 옛것을 바탕으로 새것을 참고한다는 ‘구본신참’의 주제가 집약된 듯하다. 문을 지나 뒤돌면 보이는 화면의 뒷면은 특이하게도 거울로 되어있어 전통과 미래의 경계선을 지난 관객 자신의 현재를 비춘다. 우리는 한 시대 안에 머무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시대와 시대를 잇는 연결고리라는 것처럼.


중화전 앞에 있는 OBBA의 '대한연향'은 오색 반사필름으로 만들어진 설치작업으로, 플라스틱 재질이나 모빌의 형태 등은 전통적인 것과 다소 동떨어져 보이지만 반사필름이 우연히 담은 빛과 스친 바람에 의해 흔들리고 소리를 내며 빛을 되쏘는 것은 우연성을 예찬하는 동양적인 미학과 맞닿아있다. 또한 필름에 거울처럼 비춰지는 덕수궁의 풍경들은 색다른 모양으로 서로 부딪치고 교차하여 또 하나의 생경한 풍경을 창조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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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3, 전환기의 황제를 위한 가구

 

 

서울관 마당에 있는 오브라 아키텍츠의 '영원한 봄'은 가을과 겨울에 걸친 전시 기간 동안 봄의 온도를 유지하게끔 설정되어 있는 초대형 파빌리온 온실이다. 역사에 찾아오는 긍정적인 전환점이 봄으로 비유되는 것에서 착안한 제목이라고 한다. 이상화 시인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떠올랐다. 시인은 일제의 식민지가 된 조국을 빼앗긴 들에, 해방을 봄에 비유한다. 일제강점기는 끝났으나 우리는 여전히 어디선가의 해방을 갈망하고 자유를 노래한다. 예술이 우리에게 영원한 봄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


건축은 미래를 현재로 데려오는 작업이라는 소개가 인상적이다. 건축가들은 공간을 미래에 향유할 사람을 상상하며 건물을 짓는다. 이 전시는 그렇게 과거의 건축가들이 꿈꿨던 미래를 현재로 데려온다. 그렇다면 미래를 현재로 데려오는 것이 아닌, 과거를 현재로 데려오는 곳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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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색광경전》은 지난 9월에 개관한 써드 뮤지엄의 개관전이다. ‘젊음의 거리’, 홍대 한복판에 놓인 전시장이다. 과거 예술의 중심지라고 불렸던 것과 다르게 상업화로 변질된 홍대 거리에 제3의 공간을 설치한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전시장은 최정화 작가가 총괄한 개관전을 통해 민화와 추사, 우석의 작품을 소개한다.


지금 홍대의 거리는 그야말로 과거와 단절하고 현재만을 좇는, 현재의 중심지다. 거리공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차트에 있는 가요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옷가게에서는 트렌드에 맞는 옷을 팔며 음식점은 SNS 유행에 맞춰 우후죽순 생겨나고 또 사라진다. 덕수궁과 경복궁, 창덕궁 등 고궁과 인접한 현대미술관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여기 한복판에 조선의 서예와 민화가 놓인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실험이다.


차분한 전통의 분위기와는 한눈에 봐도 다른, 네온사인이 빛나는 펑크 분위기의 외관을 뒤로한 채 내부로 들어가면 최정화 작가가 설치한 거대한 조형물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공기나 요강 등의 놋쇠그릇이 플라스틱 모형과 접합된 조형물은 전통과 미래라는 일관된 주제를 담아내는 듯하다. 그리고 곧이어 펼쳐지는 우석 최규명과 추사 김정희의 예스러운 서예는 마젠타색 인공조명 아래서 네온사인처럼 보이며 현대적 미를 발산한다. 공간을 가로질러 가장 후면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민화 연작은 강렬한 오방색으로 전체를 밝히는 역할을 한다. 문인의 예술이었던 서예와 서민의 예술이었던 민화는 지극히 현대적인 이미지로 점철된 공간에서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하나 되고, 또한 현대와 어우러진다.


정신수양의 수단이었던 서예가 인공조명이 번쩍번쩍 빛나는 ‘젊음의 거리’ 한복판에 놓여 누구나 격식 없이 즐길 수 있는 장르가 될 줄 과거의 예술가들은 알았을까. 당대의 풍속을 형상화한 민화가 시대를 초월하고자 하는 전시의 목적에 부합할 줄 알았을까. 선조들이 강조했던 여백의 미는 그저 물리적인 빈 공간이 아니라 앞으로의 세월까지도 담아낼 수 있는 만큼의 여유와 배려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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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조금 다른 방향으로 담아낸 두 전시를 보며 지금의 건축과 예술은 무엇을 상상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효율성의 맹목적인 추구 속에서 여백의 미는 사라지고 상업성이 배가되어 오히려 즐기지 못하는 자가 늘어나고 있지는 않은가. 자연에 인위를 가하지 않고 인간을 자연에 맞추는 선조들의 오랜 미학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디지털 화면이 놓인 덕수궁과 홍대 거리에 놓인 서예와 민화처럼 전혀 다른 시대를 잇게 한 선조들의 여백을 우리는 전승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전통은 영원하지 않음이 두려울 때 그럼에도 여전히 세상을 비추는 달의 위로 같은 역할을 한다. 밤하늘을 볼 여유도 없이 바삐 흘러가는 도시의 거리에 달빛을 흘려주는 전시였다. 선조들이 그랬듯이 현재에 침잠하지 않고 끊임없이 미래를 상상하며 그들을 위한 여백과 시대의 달빛을 남겨주고 싶다. 그렇게 전통은, 그렇게 우리는 영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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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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