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가장 찬란한 순간을 함께, 연극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

숨 쉬는 법을 알려줄게.
글 입력 2019.10.09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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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의 시대다. TV에서는 연예인이 해외여행을 가는 모습으로 마음을 다독여주고, 온라인에선 먹방 등이 유행을 끌며 대리만족감을 채워준다. 서점가에 괜찮지 않아도 되며 네 잘못이 아니라는 의미가 담긴 책이 전시된 지 오래고 편의점조차 우유와 과자 곽에 긍정적인 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런가 하면 소확행이라는 단어가 유행하면서 사소하고 즉각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양상을 보인다.

 

안정적인 생활을 하기에는 경제가 힘들고 커다란 행복을 누리기엔 사람들이 피로하니 짧은 글귀, 물건, 영상으로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는 것이다. 연극계에도 힐링의 열풍이 불고 있다. 인간의 본성, 진실과 거짓, 도덕의 모순 등 크고 무거운 주제보다 위로와 응원, 밝고 긍정적인 내용의 이야기가 이전보다 더 자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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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연극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는 이런 힐링 열풍에 같이 걸어가면서도 완전히 휩쓸리지는 않는다. 단순히 다 괜찮다고 응원하는 대신 아픔을 가진 사람이 모여 서로에게 기대고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제 이름은 이찬란입니다. 한평생 찬란하게 살라고 찬란. 아무래도 엄마는 대책 없이 순수한 사람이었나 봅니다. 평범한 외모, 평범한 속도, 평범한 욕심을 가진 나는 당연히 평범하게 살아갈 줄 알았으나 특별히 가난한 관계로 조금 바쁘고 가끔 비굴하고 다소 고립된 느낌으로 살아낸달까, 버텨낸달까 하고 있습니다.

 

 

웹툰의 첫 구절로 나오는 이 문장은 연극에선 마지막 장면에 나온다. 이제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찬란하지 않은 인생이 고되고 힘들어 하고 싶은 일이나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던 이찬란과 상처를 공유하고 치유한 뒤에 찬란하지 않아도 이대로 다 괜찮다고 말하는 이찬란이 똑같은 줄기에서 시작된다는 건 뭉클한 일이다.
 
짧은 시간 동안 긴 웹툰 에피소드를 다 담아내야 하는 한계 때문에 아쉬운 점이 더러 있기는 하다. 서로를 믿는 연습을 하기 위해 몸을 뒤로 눕혀 상대가 잡아주기만을 믿는 바닷가에서의 훈련이나 연극부에서 올리는 공연의 내용이 찬란과 유, 두 배우의 생각과 이야기를 접목해 만들었다는 사실의 언급 등 웹툰에서 꽤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는 이야기가 삭제되었다. 대신 노래나 춤을 넣어 좀 더 다양한 볼거리를 준비했다. 찬란, 유, 도래, 시온, 혁진 개개인이 처한 상황이나 가족과의 갈등이 몇 대사와 행동에 한정되어 있고 해소하는 부분은 드러나지 않는 것도 아쉽다. 연극은 가족과의 갈등을 줄이는 대신 연극부 서로 간의 관계에 집중한다.
 
무언가 실수를 했을 때, 어떤 사람은 잘못한 것 이상으로 자신을 몰아세운다.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 자책이 학습된다. 자기를 몰아세우는 습관을 지녔다는 이유로 다시 자괴감을 느낀다.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의 등장인물도 똑같다. 왜 더 잘하지 못하고 남에게 피해만 주는지 걱정하는 찬란이나, 연인과 헤어진 후 더 잘해주지 않았다는 걸 아쉬워하는 혁진이 그렇다. 바닷가에서 혁진과 찬란이 서로의 이름을 외치며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다, 자체로 아름답다고 격려한다. 시온은 본인에게만 모진 혁진에게 네가 잘못한 만큼만 자책하면 좋겠다고 말한다. 등장인물과 다른 상황이나, 비슷한 고민을 한 관객들은 대사로 위로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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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이 자신은 그렇게 한가하지 못하다고 말했음에도 연극부에 끌고 와 마음대로 하는 도래에게 화를 낸다. 힘들 때마다 도움을 주는 이유가 무엇이냐, 내가 그렇게 불쌍해 보이느냐, 아니면 조종하기 쉬워 보여서 그러냐. 언뜻 보면 찬란에게 의사를 묻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해서 화내는 거 같지만, 그렇지 않다. 자꾸 도움만 주는데 갚을 방법은 없어 미안하고, 개인적인 상황이 안 좋아져 불안하고, 왜 이런 불운이 자기에게만 일어나는지 몰라서 화날 뿐이다. 분노하고 싶은데 옆에 있는 사람이 마침 도래였다. 찬란이 볼 때 인생이 더 나아 보이고 더 괜찮아 보이는 존재. 그러니 이용하기 쉬우니까 동정하고 연민하는 거냐고 화낼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아는 도래는 이렇게 묻는다.
 
내가 너보다 더 나은 상황이니까
나를 마음대로 헐뜯고 상처 줘도 괜찮은 거 같지?
 
도래의 말은 나를 돌아보게 했다. 생각해보면 짜증이나 화를 낼 때 그 상대가 정말 화가 날 짓을 했을 때보다, 가장 만만하고 화를 받아주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는 경우가 더 많다. 누구도 그런 이유로 상대를 헐뜯고 상처를 줘도 괜찮은 건 아닌데, 그렇다고 상대가 아프지 않은 건 아닌데, 나의 분노에 취해 그래도 되는 것처럼 행동한다. 공연을 보고 며칠이 지났는데도 계속 떠오르며 나를 쿡쿡 찌른다.
 
찬란이 상황에 숨 막혀 늘 그를 끌고 다니는 도래에게 말을 쏘아붙인 후 도래가 사과하는 부분도 길게 기억에 남는다. 찬란이 홧김에 뱉은 말이 완전한 화풀이는 아니었다. 의도가 어찌 되었든 지나치게 잘해주는 도래를 거북하게 느낀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인정하고, 절대 찬란을 낮잡아보거나 무시해서 그런 행동을 한 건 아니었다고 진솔하게 말한다. 그렇게 생각하게 하여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고, 왜 오해받을 행동을 했는지도 정확하게 언급한다.
 
친구와 사이가 좋기 위해선 싸우지 않는 기술보다 싸우고 나서 잘 화해하는 기술이 더 중요하다. 그러나 사과하는 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다. 잘못은 인정하기부터 쉽지 않고 서로의 감정이 상한 상태에서 솔직하게 사과하는 건 굉장한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해야 한다. 얼렁뚱땅 다시 친해진다고 싸웠을 때의 상처가 아무는 것은 아니고, 한 번 떠난 인연은 대개 영원히 돌아오지도 않는다. 비 온 뒤 땅 굳는다고, 뉘우침과 사과는 싸우기 전부터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기도 한다. 찬란과 도래가 그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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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이란 무엇일까. 이 세상을 살면서 찬란하다고 느껴진 순간이 얼마나 있었는지 생각해보면 그렇게 손에 꼽을 정도다. 친구들과 같이 크리스마스를 보냈을 때, 정말 너무나 아름다운 하늘을 봤을 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적지만 소중하게 기억하는 찬란한 순간은 힘들 때 웃게 하고 슬플 때 위로해준다.
 
연극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는 역설적이게도 다섯 친구의 찬란한 한순간을 보여준다. 타인이 말하는 행복, 성공과 거리가 멀 수는 있지만, 방황하고 아파하면서도 서로를 의지하고 위로하며 나아가는 다섯 명은 분명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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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

일자 : 2019.10.05 ~ 2019.11.10

시간
평일 8시
토 3시, 7시
일/공휴일 2시, 6시
(월 공연없음)

장소 :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3관

티켓가격
전석 50,000원

주최/기획
콘티(Con.T)

관람연령
중학생이상 관람가

공연시간
100분
 

 

[김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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