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부산행"은 꼭 그 장면을 넣었어야 했을까. [영화]

글 입력 2019.09.15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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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를 다룬 서사는 많다. 서툴거나 모자라고 심지어 도의적인 책임감도 결여된 개인이 마찬가지로 서툴고 모자라지만 의협심으로 충만하고 친절한 개인들과 관계를 맺는다. 관계는 연대로 확장되고, 개인에게 남아있던 생채기의 흔적은 연대에 의해 마침내 제거된다. 관계와 연대를 통해 개인은 상처를 봉합하고 더 나은 어른이 된다는 서사는 아주 익숙한 서사다. 구태여 예를 들 필요도 없다.

'가족주의' 서사는 이미 익숙한 연대를 다루는 서사 중에서도 가장 게으르고 관습적이다. 흠집으로 점철돼 있고 거의 단절된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위기에 봉착하면 서로 간의 끈끈한 연대의식을 확인한다. 애당초의 흠집과 단절의 원인은 제거되긴커녕 여전히 그대로지만 그런 것쯤이야 금세 극복 가능한 것이었다는 듯. 위기의 순간을 겪고 결말에 이르러서, 가족간의 관계는 회복되고 그들은 화목하기 그지없는 사이로 돌변한다.

가족주의 서사에선 관계 악화의 원인을 규명하려는 시도가 없고, 어떻게 하여 다시 끈끈한 연대로 뭉치게 됐는지에 대한 설명이 생략돼 있다. 일정한 규격을 갖춘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공산품들이 특히 그렇다. 거기서 가족은 평화로운 평소의 일상보다 재난과 위기를 이겨내는 순간에서야 화목한 '가족'처럼 군다. 구성원 각자의 상처는 재난이라는 거대한 위기에 의해 매장된다. 서사는 종종 가족의 상처나 구성원 각자가 지닌 응어리를 지나치게 편의적으로 처리한다.

<부산행>역시 가족주의를 표방하는 닳고 닳은 서사의 일종일테다. 자녀의 생일선물과 어린이날 선물도 구별하지 못하는 무신경한 아빠는 좀비아포칼립스가 닥치자 딸을 구원하는데 온갖 수단을 동원하며 진정한 부성의 전형처럼 행동한다.

닳고 닳은 흐름으로 전개되고, 하나의 장르로 봉착한 신파의 서사를 그대로 답습하지만 <부산행>의 가족주의는 못봐줄 정도는 아니다. 서사를 구현하는 배우들의 연기와 연출은 무난했다. 종종 인상적인 장면도 등장한다. 제한된 공간에서 서스펜스를 제공하고자 하는 장면들보다 재난영화의 일종처럼 보이는 장면들이 특히 인상적이다. 서스펜스를 제공하기엔 <부산행>의 좀비들은 너무 약하다.

지능이 없다는 점은 좀비 아포칼립스가 꾸준히 써먹은 것이니 차치하고, <부산행>의 좀비는 마동석과 공유가 휘두르는 주먹 한방에 나가떨어진다. 열차가 터널에 당도해 사위가 어두워지면 등 뒤로 지나가는 인간 기척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시야도 협소하다. 명과 암을 이용한 액션시퀀스는 그래서 어떤 긴장감도 유발하지 못한다. 좀비는 도무지 어둠에 익숙해지는 기미가 없고 생존자들이 초라하게 마련한 소리 장치에 기계적으로 응신할 뿐이다. <부산행>의 좀비는 너무 쉽다. 재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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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소한 공간에서 서스펜스를 전달하고자 할 때 이 영화의 화법은 낡고 진부하지만 <부산행>은 좀비를 거대한 재해처럼 다루는 지점에서 도드라진다. 역사의 유리창을 뚫고 열차 위로 우수수 떨어지는 좀비 인파들이 조명될 때 <부산행>의 좀비들은 그제야 진짜 '좀비'가 된다. 대규모의 좀비떼가 서로 연쇄된채로 달리는 열차에 붙어있는 시퀀스 또한 창의적이며 오싹하다.

통속적인 드라마와 있으나마나한 서스펜스, 인상적인 재난 시퀀스들 사이에서 적정한 수준으로 줄타기하던 <부산행>은 구태여 동반할 필요 없는 플래시백을 등장시키며 스스로 영화의 질을 떨어뜨린다. 딸의 생존을 위해 좀비에게 물린 아빠는 자살하기 직전 딸이 태어나던 순간을 떠올린다. 흰 보자기에서 으앙 하고 우는 아기, 그것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아빠. 온통 흰 바탕에 흰 옷을 입고 있는 공유.

분명한 장, 단점을 가진 아쉬운 영화, 라는 느낌이 거기서 깨졌다. 영화속 부성은 안온한 일상에선 누락돼 있다가 왜 꼭 위기의 순간에만 발휘되는가란 짜증이 증폭되는 순간이었다. 마지막의 플래시백만 사라졌어도 <부산행>이 일궈낸 성취에 주목했을 거다. 국산 장르영화로써의 성취는 희석됐고 영화는, 국산 신파 영화의 단점을 여전히 세습한 그저 그런 수준이 됐다. 굳이 그 장면을 삽입했어야 했나.

<부산행>은 영화로써의 성취에 애당초 관심이 없는 작품이었을 테다. 창의적이며 날카로운 연상호의 인장보다 거대 자본에 의해 기획된 작품으로써의 면모가 훨씬 진하다. 어쩌면 부산행의 신파 답습은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상업영화의 애당초 목적은 흥행이다. 얼마나 티켓값을 벌어들일 수 있느냐다. 배급사의 투자 방침도 그것을 최우선으로 고려한다. 연상호 스스로가 고유의 인장을 구현하는 것보다 절대다수의 대중을 대상으로 한 블록버스터 제작에 방점을 뒀던 건지, 무난한 장르물을 제작함으로써 안정적으로 주류 영화계에 진입하려던 건지, 아니면 <부산행>이 연상호와 NEW의 적당한 타협 지점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나를 비롯한 영화팬들이 <부산행>에 기대한 건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서사 속에서 종종 날카롭게 파고드는 연상호 고유의 비판의식이었다. <부산행>이 그걸 이뤄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중을 기만하는 무능한 정부가 초반에서 빠르게 스케치되지만 그건 너무 얄팍하고 옅은 비판이다.

애석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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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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