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철학적 SF 연극 "산책하는 침략자"

두려움이 없기에 더 두려운 침략SF
글 입력 2019.09.08 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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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뒤에 나올 법한 무기, 공포에 질린 사람들. ‘침략SF’하면 떠오르는 모습들이다. 하지만 이런 장면 없이도 침략SF는 존재할 수 있다. 연극 <산책하는 침략자>가 그렇다. 두려움이 없기에 더 두려운 침략SF, 연극 <산책하는 침략자>를 보고 왔다.

 


사소하게만 느껴졌던 개념들. 실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가. <산책하는 침략자>는 개념을 빼앗긴 인간들과 개념을 습득한 외계인들을 통해, ‘개념’이라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추상적인 무언가가 어떻게 우리의 관계성을 보존해왔는가 설명한다. 더불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인간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외계인을 통해 인간의 면모를 짚는다니. 참으로 아이러니다.


 


시놉시스


전쟁의 기운이 감도는 해변가 마을,

외계인이 지구인의 몸에 침투한다.

지구정복을 위한 사전 답사다.


이들의 ‘일’은 인간의 개념을 수집하는 것.

‘나루미’의 남편 ‘신지’가 된 외계인은

산책하며 사람들의 개념을 빼앗는다.





개념을 빼앗기다, 상실 혹은 해방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아니, 백전백승이다. <산책하는 침략자> 속 외계인들은 요란한 침공 전에 사전 답사를 시작한다. 지구의 무기, 방어 능력 따위는 관심 없다. 그들의 사전 답사는 그 것보다 아주 현명하고 철학적이다.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개념에 대해 조사하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언어는 무수하다. 더구나 기표는 기의를 완벽하게 구현하지 못한다. 언어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가져가는 것이 훨씬 빠르고 정확하다. 너무 효율적이고 합리적이라 놀라울 정도다.


 

개념을 빼앗긴 사람들은 분명 같은 언어를 쓰더라도 그 안에 내포된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 ‘가족’의 개념을 예로 든다면, ‘가족’, ‘동생’, ‘언니’라는 단어는 알지만, 그 안에 내포된 돈독함이나 거리감, 가족애는 인식할 수 없다. 언어로는 그 개념을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빼앗긴 개념들은 본인을 괴롭게 만들고, 그들과 소통하던 이들 역시 곤란에 빠뜨린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분명 같은 대화를 해도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다시는 그 개념을 습득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와. 이보다 끔찍한 침략은 없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다. 누군가는 이 ‘산책하는 침략자’를 ‘구원자’라고 부르며 감사를 전한다. 세상 모든 개념이 옳고 좋은 것은 아니다. 필요악은 언제나 존재해왔다. 전쟁이 일어나길 원하던 마루오는 신지에게 소유의 개념을 뺏기고 큰 변화를 겪는다.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자본주의는 물론 전쟁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반전 운동을 하는 공산주의자 마루오. 그는 그가 뺏긴 개념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무언가에서 해방된 것 같아요. 무엇에서 해방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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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인간을 구성하는 것은, 개인이 알뜰살뜰하게 모아온 ‘개념’이다. 개념을 잃었다고 해서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살아오면서 몸에 쌓아온 습관이 있으니까. ‘가족’에 대한 개념을 잃어도 당장 가족을 남 보듯 하지 않는다. 같이 살아온 습관, 그들을 대해온 습관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습관으로는 부족하다. 관계는 습관으로 지속될 수 없기에.


 

그렇다면, 개념을 잃고도 인간은 인간으로 남을 수 있을까. 인간이라 불릴 수 있을까. 아마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라는 사실 자체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하지만 반대로 인간의 개념을 습득한 외계인들은? 인간의 개념을 갖추게 된 외계인도 여전히 외계인일 뿐일까?


만약 인간의 개념을 갖춘 외계인과 개념을 빼앗긴 인간을 비교한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인간답다’ 말할 수 있을까. 결국 우리는 이런 질문에 도달하고야 만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 극은 이 질문에 대한 끝없는 추궁의 연속이다.

 

 

 

 

 

사이언스 픽션 멜로 드라마 플레이


 


철학적인 질문을 담고 있는 이 극의 장르는 SF 멜로 드라마다. 다소 길고 지저분해보이지만 정확한 설명이다. 색다른 SF, 이렇게 명명하면 차라리 편할까. SF에 대한 편협한 생각을 날리고 싶다면, 이 작품을 추천하고 싶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극에서는 흔히 떠올리는 SF적 요소들-상상하기 어려운 무기, 침공, 과학적 발전-이 대부분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딱 하나 겹치는 것이 있다면 ‘외계인’이다.


 

“외계인이라고 해봤자 아무도 안 믿잖아요.”


하지만 지구인들은 대응할 생각이 없다. 아주 평화롭다. 외계인들이 만만해서가 아니다. 믿지 않아서다. 불신하고 코웃음 친다. 오히려 지구 내에서는 자기들끼리 전쟁하기 바쁘다.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 침략. 아무도 믿지 않은 침략자. 두려움이 없기에 더 두렵다는 말은 바로 이 작품의 침략을 두고 하는 말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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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침략에는 나루미라는 변수가 존재한다. 극을 본 관객이라면, 공포스러운 ‘개념 뺏기’가 더없이 멜로 드라마적으로 바뀌는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나루미의 선택은 꽤나 현명했다. 그리고 다른 의미로 신지에게 잔혹했다. 자신의 감정을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을 얻은 동시에, 정작 그 감정을 나루미는 이해할 수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 마냥 여유롭게만 느껴졌던 ‘산책하는 침략자’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인간에게서 가장 중요한 개념, 사랑을 자각했을 때.


 

이쯤 되면 이 극이 ‘사이언스 픽션 멜로 드라마 플레이’라는 것에 이견 없겠다. 다른 말로, 절대 뻔 할 수 없는 SF.


 

***
 

 

 

특색 있는 SF가, 특색 있는 창작집단 LAS를 만났다. 낭독극, 초연을 거쳐 재연으로 돌아온 만큼 극의 구성은 아주 탄탄했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동시에 극적 재미를 함께 잡았다. 110분 모두 만남과 대화로만 이루어지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배우들의 열연도 한몫했다. 개념을 빼앗긴 인간, 개념을 채워가는 외계인,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나루미와 사쿠라이. 각자의 캐릭터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의 역할을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덕분에 <산책하는 침략자>는 따뜻하지만 생각보다 따뜻하지 않은 극, 차갑지만 결코 냉정하진 않은 극의 여운을 남겼다.


 

작집단 LAS의 연극 <산책하는 침략자>는 오는 11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되며, 그 뒤를 이어 2019 아르코 파트너들의 작품이 10월 6일까지 계속된다.



 


 



 

 

낯선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섯 예술가가 던지는 질문

 

2019 아르코 파트너

 


8.28(목) ~ 10. 6(일)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


 

박순호 안무

〈Gyeong in_경인京人〉


 

장우재 연출, 아모스 오즈 「친구 사이」 원작, 김연재 각색

<이제 내 이야기는 끝났으니 어서 모두 그의 집으로 가보세요>


 

이기쁨 연출, 마에카와 토모히로 작

〈산책하는 침략자〉


 

허성임 안무

〈WE ARE YOU〉


 

권령은 안무

〈당신은 어디를 가도 멋있어〉


 

서지혜 연출, 뻬뜨르 젤렌카 작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 기획공연 ‘아르코 파트너’는

우리 시대 주목할 만한 예술가를 선정하여

공동 제작으로 작품을 선보인다.

각자의 뚜렷한 작품 세계를 꾸려온

여섯 명의 연출가와 안무가의 시선을 통해

우리 사회의 모순과 결핍, 욕망과 이기심을 담담히 짚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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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아르코 파트너

이기쁨 <산책하는 침략자>


 

공연일자

2019.8.30(금) ~ 2019.9.11(수)


공연시간

평일 오후 8시 / 주말 오후 3시 / 월 쉼


공연장소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단체명 : 창작집단 LAS,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연출 : 이기쁨


원작 : 마에카와 토모히로


출연 : 윤성원, 한송희, 권동호, 김대웅, 김희연

고영민, 임현국, 장세환, 한수림, 김연우


입장료 : 균일석 20,000원


관람등급 : 만 13세 이상(중학생 이상)


관람시간 : 1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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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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