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전혀 그렇지 않다, 매우 그렇다, 조금 그렇다 [사람]

스테이크 굽기는 미디움, 가끔은 미디움 레어
글 입력 2019.08.19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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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니스프리를 좋아한다. ‘이니스프리’ 하면 바로 떠오르는 초록색, 싱그러움, 자연 같은 뚜렷한 분위기가 좋다. 좋아하는 잡지나 카페도 같은 이유다.


인기 있는 브랜드는 이렇게 확실한 자신만의 색깔을 가지고 있는데, 구체적인 브랜딩을 잡아 스토리를 만들면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 쉽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면접관이 좋아하는 인재는 뚜렷한 자신만의 스토리가 있는 사람이고, 사랑 받는 가수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음색과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스테이크 굽기는 어떻게 해 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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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심리테스를 하면 ‘조금 그렇다.’, ‘보통이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와 같은 문항을 고르는 사람이다. 스테이크 굽기는 미디움, 가끔은 미디움 레어로 하는 평범한 사람. 그래서 ‘좋아한다.’라는 감정이 참 어렵다.


나는 오렌지를 가장 좋아하지만 과일이 한 상 가득 차려져 있으면 무화과도 먹고 복숭아도 먹고 사과도 먹는다. 지브리 노래 중에서 ‘돌이킬 수 없는 날들’을 가장 좋아하지만 반복해서 듣는 것보다 플레이리트 하나를 랜덤으로 틀어 뒀다가 문득 이 노래가 나오는 순간이 더 좋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하루 종일을 혼자 보내면 외롭다. 무늬 없는 심플한 옷을 좋아하지만 가끔은 꽃무늬 원피스도 입고 싶다. 나는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한 사람. 이럴 땐 좋고 저럴 땐 싫은 변덕이 많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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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OUND>라는 매거진에서 이런 문구를 읽은 적이 있다. 좋아한다는 말을 하려면 내 일상의 한 부분을 그 속에 뚝 떼어 넣을 수 있어야 한다고.


나는 “좋아한다”라고 말할 때 굉장히 주저하는 사람이라서 너무나 공감이 되었다. 떼어 넣을 수 있을 정도로 열렬한 마음이 없다면 좋아한다고 하기까지 망설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 대상이 사람이든, 또는 일이든 상관없이.


항상 한 발은 빼 놓고 눈치를 보고 있기 때문에 내가 좋아한다고 할 수 있는 것, 내 속내를 온전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은 극히 적다. 얼마 안 되는 나의 일상 속에 뚝 하고 들어 있는 나의 순간들을 소개해 보면 아래와 같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목구멍까지 차오른 스트레스를 달콤함으로 녹여버리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아몬드가 들어간 초콜릿과 가볍지 않게 꾸덕꾸덕한 케이크가 좋다. 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해 연락을 기다리면서 혼자 두리번거리며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


여름에는 시원한 카페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좋아하고, 재즈나 피아노 음악이 노곤노곤하게 흘러나오는 카페에서 글을 쓰는 시간을 좋아한다. 커피 맛은 아무렴 좋다. 대신 디저트가 맛있는 곳이 좋다. 찐 단호박, 삶은 계란, 예쁘게 썰어 놓은 아오리 사과 등등 엄마만의 재료들이 한데 어우러진 샐러드를 좋아한다.


아무것도 없는 메모지에 오늘의 할 일을 죽 쓰고 노란색 색연필로 죽죽 긋는 것이 좋다. 바람에 흩날려 잔뜩 헝클어진 앞머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쓸어 넘기는 것을 좋아한다. 손을 잡아도 반걸음 뒤에서 서서 그의 어깨를 올려다보면서 걷는 시간을 좋아한다.


사진을 찍는 것도, 찍은 사진을 아무런 광택 없이 바삭하게 뽑아서 손으로 쓸어보는 느낌이 좋다. 잔잔하게 <카모메 식당>이나 <오눅 브이로그>를 보다가 스르르 잠들어 버리는 순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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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헐거운 정신, 혹은 그 무엇도 오래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태도는 어쩌면 삶에 대한 용기가 부족해서일지도 모른다. 어느 무엇에 자신을 걸고 끝까지 그것을 믿고 그것과 함께 가려는 태도. 제대로 좋아하는 마음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신념에는 어떤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몰입하는 일은 용기의 문제이며, 이때 용기는 흔히 말하는 이상과 같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한 완벽한 삶을 믿는 마음에서 생겨나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틈을 보이지 않는 것, 실수하지 않는 것. 완벽한 것만을 목표로 삼는다면 우리의 삶에는 좋아한다고 말할 것이 점점 사라질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매년 새롭게 말하기 위해서, 두 개의 경기장에 발 하나씩을 딛고 갸우뚱대며 균형을 잡아볼 것이다. 넘어지면 어때, 나는 넘어지는 것도 좋아하는데. 이런 마음을 먹어가면서.


- 매거진 <AROUND> 52호 中


 

단단한 사람이고 싶었다. 옷 입는 스타일에서도, 방 분위기만 보아도 취향이 확고하게 드러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불완전하고 휘청휘청하다. 노란색을 좋아하지만 항상 노란색만 고를 수는 없다는 생각에 물건 하나 가지고도 한참을 고민하는 사람이다. 스스로에게 단단한 신뢰도 없고 용기도 없다. 이렇게 '좋아한다'라는 하나 가지고 한 편의 글을 썼지만 아직도 좋아한다는 게 뭔지, 또렷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래도 이렇게 불완전한 사람의 삶이 궁금해서 당신이 이 글을 끝까지 읽었다면, 당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의미가 있어서 좋을 것 같다.


이 글을 올리고 나서는 내가 좋아하는 카모메 식당을 다시 한 번 봐야지!
 


[이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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