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당신의 사랑은 지금 얼굴을 하고 있습니까? - "수수께끼 변주곡" [도서]

글 입력 2019.08.04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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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그해, 여름 손님》으로 이름을 알린 작가 안드레 에치먼의 소설 《수수께끼 변주곡》이 출간됐다. 이 소설은 ‘사랑의 인사’로 유명한 영국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의 관현악 곡 ‘수수께끼 변주곡’과 이름이 같다.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은 자신의 아내를 위해 연주한 선율을 여러 스타일로 변주한 곡으로, 각 변주에 주변 사람의 이니셜을 붙이고 그의 성격을 녹여냈다는 특징이 있다.


소설은 엘가의 곡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 파올로(폴)는 어릴 적 시간을 보내던 이탈리아의 한 섬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첫사랑 ‘난니(조반니)’를 떠올린다. 강렬하지만 잡을 수 없던 첫사랑은 그의 연애에서 끊임없이 변주된다.


권태와 상대에 대한 의심으로 끝맺음 한 ‘모드’와의 관계, 설렘을 준 ‘만프레드’, 불 같은 사랑을 함께 한 ‘클레어’, 사랑의 불씨를 틔워놓고 사라진 ‘애빙던 광장의 그녀’까지. 폴의 사랑은 가질 수 없는 것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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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파올로(폴)은 어른이 된 뒤 어릴 적 시간을 보내던 남부 이탈리아에 도착한다. 그를 맞이한 건 다 타버려 집터만 남은 별장이다. 그곳에서 그는 첫사랑 ‘난니’를 떠올린다. 어린 파올로에게 난니는 사랑의 대상이자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의 무릎과 난니의 무릎이 닿았을 때의 설렘, 어떻게든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한 행동들. 잡고 싶었지만 잡을 수 없던 사랑의 기억은 별장의 집터처럼 남아있다. 어른이 된 폴은 마을 주민을 통해 그의 아버지와 난니가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암시를 듣는다.


폴은 집에 돌아와 난니에게 편지를 보낸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좋아할 것 같아 사진을 보낸다는. 폴은 난니의 답장을 기다리지 않는다. 첫사랑을 이제서야 놓아준 것이다.




봄날의 열병



레스토랑에 있는 그들을 보는 순간 시선을 돌리고 입구에 붙은 메뉴를 보는 척한다. 렌조&루치아 레스토랑에서 최대한 멀어지려고 서둘러 메디슨 애비뉴를 걸을 때에야 비로소 떨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충격 때문이다. 아니, 질투 때문이다. 혹은 분노다. 정정한다. 두려움 때문이다. 사실은 수치심 때문이다.

2번째 챕터인 ‘봄날의 열병’은 폴의 질투심과 권태에 대해 다룬다. 폴은 파트너인 ‘모드’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가 본 것 외의 일-모드가 그 남자와 함께 아파트로 들어가고 시간을 보내는 것-을 생생하게 상상한다. 상상을 거듭할수록 ‘모드가 바람피운다’는 그의 생각은 사실이 된다. 폴은 ‘사실’을 숨기려 한다. 독자는 모드를 의심하다가 새로운 지점을 맞이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도시, 책을 위해 만든 도시와 다를 게 없어요. 그곳에 있어도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지 않죠. 황혼과 새벽을 구분할 수 없는 곳. 종잡을 수 없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욕망의 도시.


상대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상대를 사랑하고 있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 때가 있다. 사랑하는 마음이 떠났음에도 사랑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한다. 너를 사랑하는 건지 아닌지 헷갈려. 폴도 그렇다.


그의 상상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 질투심을 가장한 권태. 헤어지고 싶지만, 딱히 이유가 없을 때. 네가 나를 떠나줬으면 좋겠어. 폴은 모드에게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그녀의 오점을 찾아 집요하게 상상한 건 아닐까. 그녀에게 짐을 지우기 위해서 말이다.


오늘 레스토랑에서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일을 처음 목격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녀인 듯하다. “지금까지 난 그 대상이 클레어라고 생각했어.” 굳이 다른 말을 할 필요는 없지만 택시에 탄 지금 이 순간 나는 알고 있다. 우리 두 사람 중에서 길을 건너 반대편으로 간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나라는 것을.


봄날의 열병에 걸린 건 폴이다. 모드는 폴을 잃는다.




만프레드



이 챕터는 폴이 ‘길을 건너 반대편’으로 간 이유를 보여준다. 폴은 같은 테니스 코트를 이용하는 ‘만프레드’에게 반한다. 그가 ‘봄날의 열병’에 걸린 이유다. 폴이 만프레드에게 쓴 편지 형식으로 구성된 이 장은, 그의 절절한 마음을 보여준다.


당신을 원하는 마음이 나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당신이 내 이름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마치 좋아하는 연예인에게 쓴 편지 같기도 하다. 폴은 만프레드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한다. 그의 이름을 검색해보기도 하고, 그와 마주칠 법한 곳을 걷기도 한다. 이 챕터를 읽다 보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의 감정이 떠오른다. 상대의 반응에 수십 번씩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한다. 이 옷을 입으면 나를 봐줄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끊임없이 생각한다.


폴은 우연한 기회로 만프레드와 테니스 시합을 하고 그와 가까워진다. 사이가 가까워질수록 폴은 만프레드를 욕망한다. 그와 함께 쇼핑하거나 일상을 보내는 상상을 한다. 마치 모드가 바람피웠다고 상상했던 것처럼. 만프레드를 향한 그의 팬심과도 같은 사랑은 마침내 결실을 맺는다. 둘은 비 오는 날 테니스 코드에서 만나기로 한다.




별의 사랑



폴은 대학 때 잠깐 데이트했던 클로이를 생각한다.


“날 봐.” 그녀가 침대에서 간절하게 말했다. “내 눈을 보고 절대 놓지 마.” 쳐다보지 않는 섹스는 슬픔 없는 사랑이나 수치심 없는 쾌락처럼 시시한 것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눈이 내 눈에 고정되어 있었다.


4년 뒤 클로이와 폴은 똑같은 아파트에서 열린 파티에서 다시 만나고, 4년 전처럼 불같은 밤을 보낸다. 둘은 이메일 주소를 교환한다. 더 솔직한 언어로 서로와 나눴던 사랑에 관해 이야기한다. 클로이는 폴과 메일을 주고받을수록 헤어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에 빠진 느낌을 받는다. 폴은 그녀가 자신의 사생활로 들어오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클로이는 폴이 사생활 안으로 들어왔다고 화를 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주고받다 더는 메일을 교환하지 않았다.


또 4년 뒤, 파크 애비뉴의 출판기념회에서 둘은 재회한다. 다시 불같은 사랑을 하고 또 불같이 싸운다. 애증의 관계 같다. 소설에 나왔던 것처럼 폴과 클로이는 하나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사랑하기도 상처를 입히는 말을 하기도 한다. 장소를 옮겨가며 밀회를 즐기던 폴과 클로이는 대학 캠퍼스로 향한다. 그곳에서 대학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다 서로의 몸을 탐한다.


“우린 절대 끝나지 않아.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절대 끝나지 않아.”


폴과 클로이는 날이 밝으면 헤어질 것이다. 그들이 4년 전, 또 4년의 4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난니가 폴의 사생활로 들어오지 않았던 것처럼. 둘은 서로에 대해 아는 만큼 서로를 모른다. 둘이 4년 주기로 만날 수 있던 이유는 둘 사이에 쌓인 다른 역사가 없기 때문이다.


폴은 의도적으로 클로이가 거리를 둘 여지를 남긴다. 그녀가 거부할만한 말을 던진다. 폴이 그녀의 사생활에 들어가고, 그가 클로이의 일상이 되면 ‘별의 사랑’은 사라질 테니까. 환상의 사랑은 환상으로 남아있어야 한다.




애빙던 광장



《수수께끼 변주곡》의 마지막 장인 ‘애빙던 광장’은 중년으로 추정되는 폴의 이야기를 그린다. 만프레드는 독일로 갔으며 클로이는 지루한 결혼 생활을 견디고 있다. 싱글이 된 폴은 젊은 여성을 마음에 품는다. 둘은 두 시간 내내 코트도 벗지 않고서 애빙던 광장의 한 커피숍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폴은 그녀와의 만남을 통해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서로의 삶에 개입하는 것은 꺼린다. 사랑을 느낀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쁜 나이가 돼서일까. 결국, 폴은 그녀와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한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애빙던 광장을 걷는 것처럼 서늘하고 슬프다. 폴은 희망을 놓지 않는다.


당연히 나는 이 일을 쉽게 이겨 내고 무심해질 것이다. 확신하건대 가장 친애하는 당신, 으로 시작하는 이메일이 앞으로 계속 올 것이고 그녀의 이름이 화면에 뜰 때마다 심장이 철렁하면서 희망을 품겠지. 나는 여전히 약할 테고 여전히 똑같은 감정을 느낄 거라는 뜻이다 좋은 일이다. 상실과 아픔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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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설렘, 망설임, 권태와 같은 사랑의 여러 층위를 등장인물을 통해 그려낸다. 《수수께끼 변주곡》은 그의 대표작 《그해, 여름 손님》과 다르게 주인공들의 이름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주인공의 이름이 없기 때문에 독자는 파올로가 된다. 사랑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이 없다. 당신의 사랑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안드레 에치먼의 작품을 읽으며 확인해보길 바란다.



[김나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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