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 마음에 담은 영시 한 편 - 애너밸 리 [사람]

글 입력 2019.08.02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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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넓은 세계를 마주하는 방법 중 하나를 배우다"



필자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 당시 국어 선생님은 한국 사람이라면 꼭 암송해야 하는 시라고 말씀하시며 정지용 시인의 "향수"를 가르치셨다.


적어도 열 편 정도의 시를 암송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보다 더 넓은 세계를 가지게 되는 거라는 말씀에 코웃음 치던 아이들 옆에서 나는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새로운 세계의 문고리를 잡은 듯 마음이 설레였다.


이후 시 몇 편, 마음속으로 외우며 스스로 뿌듯함을 가진 것도 잠시, 점점 게으름에 암송은커녕 필사도 꾸준히 하지 않은 필자에게 다시 마음을 다잡게 된 기회는 생각지 못한 데서 찾아왔다.



[크기변환]애너밸리1.jpg



대학생 때 들었던 영문시 강의는 영문학을 주전공 또는 부전공으로 이수하기 위해서는 수강해야 하는 필수 과목이었다. 강의를 맡은 교수님은, 수업을 듣는 학생 반 이상이 수업 시간 내내 책상과 하나가 된 듯 엎드려 있어도 그저 무표정으로 강의하시고 그 날 나가야 할 진도는 꼭 나가는, "나는 나의 길을 간다." 타입인 분이었다.


수업의 첫 시간에 교수님께서는 수행평가는 영시 암송으로 하겠다고 말씀하시며 내용이 긴 시의 경우, 추가 점수가 있다고 덧붙이셨다. 평가 기준은 내용을 정확히 외웠는지, 발음의 정확성, 그리고 시에 담긴 의미를 잘 표현했는지 정도이고, 점수는 시 암송이 끝난 후 바로 발표할 거라고 하셨다.


주변 학생들 사이에서는 한숨과 짜증의 탄식이 나오고 있었지만 필자는 아주 오랜만에 잊고 있었던 설렘을 다시 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행평가의 시들 중에서 가장 길었던 시가 에드가 앨런 포의 "애너밸리"였다. 아래는 "애너밸리"의 원문 및 번역이다.



[크기변환]애너밸리2.jpg
 


"내 사랑의 무덤, 나 그 옆에 함께 누워있네."



It was many and many a year ago,
In a kingdom by the sea,
That a maiden there lived whom you may know
By the name of Annabel Lee;
And this maiden she lived with no other thought
Than to love and be loved by me.
I was a child and she was a child,
In this kingdom by the sea,

But we loved with a love that was more than love—
I and my Annabel Lee—
With a love that the wingèd seraphs of Heaven
Coveted her and me.
And this was the reason that, long ago,
In this kingdom by the sea,
A wind blew out of a cloud, chilling
My beautiful Annabel Lee;
So that her highborn kinsmen came
And bore her away from me,
To shut her up in a sepulchre
In this kingdom by the sea.
The angels, not half so happy in Heaven,
Went envying her and me—
Yes!—that was the reason (as all men know,
In this kingdom by the sea)
That the wind came out of the cloud by night,
Chilling and killing my Annabel Lee.
But our love it was stronger by far than the love
Of those who were older than we—
Of many far wiser than we—
And neither the angels in Heaven above
Nor the demons down under the sea
Can ever dissever my soul from the soul
Of the beautiful Annabel Lee;
For the moon never beams, without bringing me dreams
Of the beautiful Annabel Lee;
And the stars never rise, but I feel the bright eyes
Of the beautiful Annabel Lee;
And so, all the night-tide, I lie down by the side
Of my darling—my darling—my life and my bride,
In her sepulchre there by the sea—
In her tomb by the sounding sea.



아주 여러 해 전
바닷가 어느 왕국에
당신이 아는지도 모를 한 소녀가 살았지.
그녀의 이름은 애너벨 리
날 사랑하고 내 사랑을 받는 일밖엔
소녀는 아무 생각도 없이 살았네.

바닷가 그 왕국에선
그녀도 어렸고 나도 어렸지만
나와 나의 애너벨 리는
사랑 이상의 사랑을 하였지.
천상의 날개 달린 천사도
그녀와 나를 부러워할 그런 사랑을.

그것이 이유였지, 오래전,
바닷가 이 왕국에선
구름으로부터 불어온 바람이
나의 애너벨 리를 싸늘하게 했네.
그래서 명문가 그녀의 친척들은
그녀를 내게서 빼앗아 갔지.
바닷가 왕국
무덤 속에 가두기 위해.

천상에서도 반쯤밖에 행복하지 못했던
천사들이 그녀와 날 시기했던 탓.
그렇지! 그것이 이유였지(바닷가 그 왕국 모든 사람들이 알 듯).
한밤중 구름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와
그녀를 싸늘하게 하고
나의 애너벨 리를 숨지게 한 것은.

하지만 우리들의 사랑은 훨씬 강한 것
우리보다 나이 먹은 사람들의 사랑보다도
우리보다 현명한 사람들의 사랑보다도
그래서 천상의 천사들도
바다 밑 악마들도
내 영혼을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영혼으로부터 떼어내지는 못했네.

달도 내가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꿈을 꾸지 않으면 비치지 않네.
별도 내가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빛나는 눈을 보지 않으면 떠오르지 않네.
그래서 나는 밤이 지새도록
나의 사랑, 나의 사랑, 나의 생명, 나의 신부 곁에 누워만 있네.
바닷가 그곳 그녀의 무덤에서
파도 소리 들리는 바닷가 그녀의 무덤에서.


포는 아내가 죽은 후,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시를 썼다고 한다. "애너밸 리"는 천사들의 시기 질투로 연인은 세상에 없지만 그녀와 자신의 사랑은 그럼에도 영원하다는 주제가 낭만주의 연애시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해석이 있으며 시 안에 담긴 낭만주의적인 주제 외에도 운율적 구조로도 큰 평가를 받는다.


시를 처음 읽은 순간부터 수행평가를 하기 직전까지 암송을 연습할 때마다 필자는 밤바다에 연인 없이 홀로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더 이상 달빛도 별도 볼 수 없는, 이제는 세상에 없는 연인을 전처럼 계속 사랑할 수밖에 없는 괴로움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마음이, 파도 소리만 자리한 밤바다 옆 연인의 무덤에 나란히 누운 화자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리고 시를 필사하고 소리 내어 암송할 때면 전에 국어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더 넓은 세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게 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이루지 못한 사랑, 시로 쓰여 영원이 되다."



[크기변환]애너밸리3.jpg
 


긴장과 설레는 마음으로 교수님과 다른 학생들 앞에서 암송을 하고 몇 년이 지난 지금, 매일 몇 편의 시를 필사하고 암송하고 그렇게 살아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쳇바퀴 같은 일상을 보내다가 문뜩 생각날 때면 "애너밸리"를 암송해보고, 원문과 비교해서 틀리거나 잊은 부분이 적으면 괜스레 뿌듯해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리고 거기에 더 여유가 있으면 그를 포함한 다른 시들을 필사하는 시간을 가진다.


영원할 것 같은 사랑이 떠나고, 시인은 괴로워하며 그 아픔을 시로 담았다. 그도 오래전 세상을 떠났지만 남겨진 시는 사람들에게 알려져 시인이 갈망했던 영원한 사랑은 지금까지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에게도 기억되며 불멸이 되었다.


새로운 시와 글을 읽어보고 필사하고 외워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내가 경험하지 않은 인생의 이야기가 마음에 닿아 감명하는 순간이 작가가 담은 글이 영원한 삶을 얻는 과정일 것이다. 동시에 나를 더 넓은 세계로 가게 하는 한 걸음걸음가 될 것이라고 희망해본다.



[강지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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