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예술가로 '규정'된 '사람'의 흔적 – 베르나르 뷔페전

예술을 해야만 했다고 '규정된' 사람이 아니었을지.
글 입력 2019.07.06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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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규정의 장(場)


 

왜인지 모르겠지만 전시를 보기 직전까지 꾸준히 생각하고 있었던 문제였다. 어쩌면 꽤 오래된 고민일지도 모른다. 예술가란 어떤 사람인지, 그 단어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단어인지. 단순하게 정의를 내리자면, 다시 말해 단어 자체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객관적인’ 지표에 따르자면 예술가는 예술작품이라 칭해지는 무언가를 창조하는 사람일 것이다. 국립국어원을 비롯한 수많은 공인 기관이나 사이트에서 규정하는 예술가의 단어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예술 작품을 창작하거나 표현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 아예 예술가를 직업의 일종이라 보고 있다.

 

이처럼 그 어떤 주관적인 판단도 배제한 상태에서 예술가라는 단어와 관련해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범주는 여기까지다. 개개인의 가치관이나 사고방식을 포함한 주관의 영역을 끌어오는 순간 논의는 복잡해진다. 도덕과 윤리의 문제, 사회라는 배경적 구속의 문제, 교육의 문제 등. 수많은 화살이 날아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예술가란 어떤 사람인지 정의를 내리기가 힘들어진다. 그러니까 ‘모두가 수긍할 만한’ 정의를 도출하기가 아주 힘들어진다.


이는 예술가를 바라보는 현대사회가 직면한 문제이기도 하다. 언어적인 지표만으로 대상과 현상, 혹은 인물의 성격을 정의하리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러한 방식으로 결정되는 ‘정의’는 정의 대상의 속성을 대표할 수 없다. 너무 당연하고 자명한 전제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당연히’ 예술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겠거니,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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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날, 오후.



그러면 돌고 돌아 논의는 원점으로 돌아온다. 예술가란 어떤 사람인지 되물어야 한다. 예술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예술가임이 자명하다면, 그들이 만드는 예술 작품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현대예술에서 통용되는, 소위 ‘~주의’로 칭해지는 예술 사조는 다원주의다. 말 그대로 무엇이든 예술 작품이 될 가능성에 종속된다. 지난 학기 전공강의를 들으며 읽었던 전공 서적에서 기억에 남았던 구절을 인용하자면, 이러한 연유로 현대예술은 “가능성의 홍수”다. 모든 것이 예술 작품은 아니더라도, 모든 것은 저마다 예술 작품이 될 가능성은 품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이렇듯 모든 것에 예술이 될 가능성이 부여된 상황에서 오히려 예술에 거리감을 느끼기도 한다. 달리 생각하면 가능성을 함의한 창작물은 아직 특정한 무언가로 ‘규정되기 전’이기도 한 것이다. 미규정의 상태에 놓인 작품들은 어떤 절대적인 사조에 묶여 있지 않기에, 언제든 예술 작품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예술을 바라볼 진입 장벽을 낮추어 준다. 그러나 동시에 창작물의 미규정성으로 인해 감상자로 하여금 ‘어렵다’, ‘난해하다’, ‘복잡하다’, ‘이해하기 힘들다’ 와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는 점에서 진입 장벽을 다시 높이기도 한다.

 

현대 사회에서 예술 작품이나 예술가를 바라보는 시선은 (지극히 내 주관이다)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까운 것 같다. 기본적으로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는 예술가는 어딘가 유별나다고, 이해하기 어려운 감성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렇다고 그들을 완전한 이방인으로 여기거나 그들의 예술 작품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뒤샹의 샘도 어쨌든 ‘예술 작품’으로 규정해주는 사람이 많으니까 뒤샹 개인전도 개최하고 하는 것 아닌가. 어쩔 때는 지나친 수준으로, 신에 가까운 존재로 예술가의 지위를 격상하기도 한다.


괴짜인 동시에 우리의 (사람들의) 감각 기관, 주관을 자극할 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 보통 이런 사람한테 특별하다는 형용사를 쓰곤 하니까. 우리는 예술가들을 긍정적인 의미에서든, 부정적인 의미에서든 어딘가 특별한 사람으로 규정하고는 있다. 예술 작품을 창작하는 사람이라는 전제 위에서. 무엇이 예술인지, 예술작품인지 하나의 정의로 귀결시킬 수 없는 것도 이렇듯 개인의 주관에서 비롯되는 규정의 다양성 때문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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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술가로 ‘규정’된 인간의 삶 – 예술을 ‘해야만’ 했다는.


 

그래서 베르나르 뷔페의 작품을 감상하기 직전에 잠깐 멈칫했던 걸까. 정확히 기억나는 문구들은 많이 없지만 전시된 작품들의 사이사이에 삽입된 다양한 문구들은, (적어도 나에게는) 전부 뷔페를 예술가로 규정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보였다. 다시 말해 예술가 베르나르 뷔페의 작품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베르나르 뷔페라는 한 인간을 예술가로 규정하기 위해서 전시회를 연 것처럼 보였다.


다른 예술가들의 (정확히는 예술가로 불리는 자들) 호평을 포함해 그를 찬사하는 수많은 말들. 스스로가 스스로를 예술가로 규정하는 말들도 보였다. 전시회 내부의 촬영이 불가능했던 만큼 세부적인 내용을 공개하긴 어렵지만 대충 이런 뉘앙스의 말이었다. 자신은 필연적으로 예술을 해야 할 사람이라고. 예술을 해야만 하는, 타고나길 예술가로 태어난 사람이라고. 그리고 그를 향해 쏟아졌던 찬사들도 비슷한 의견이었다. 뷔페는 예술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이었다는 거다. 프랑스가 사랑한 스타 아티스트, 고독한 예술가 베르나르 뷔페.

 

사실 나는 확신을 못 하겠다. 그가 정말 예술가인지, 나에게 그를 예술가라고 찬양하는 일련의 문구들이 설득력 있었는지. 나는 그가 생전에 남긴 작품들을 감상하고, 작품들에 주어진 평과 해설들을 읽으며 예술가로서 가능성을 지닌 뷔페를 떠올렸을 뿐이다. 억지라고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단지 가능성을 지닌 한 인간의 창작물들을 둘러본 것이다. 나에게 뷔페가 예술가라고 규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전시회장의 모든 것들은 그를 예술가로 규정하자고, 나를 독촉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내가 이 전시회를 부정적으로 평하는 게 아님을, 충분히 발길을 멈추게 했던 작품들이 있었음을 말하고자 한다. 이목을 끌었던 세 개의 작품을 소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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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 상대적으로 덜 뚜렷한 풍경화들이 눈길을 끌곤 했다.



 

3. 첫 번째 작품 - “여장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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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첫 번째로 선정한 이유는 뷔페의 작품 가운데 인물화가 보여주는 특징들을 한 곳에 담아놓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다른 인물화들을 보면 알겠지만, 기본적으로 뷔페는 인물의 얼굴을 굉장히 길게 그린다. 길게 그리면서 상당히 날카로운 얼굴형을 만들어내는데, 희한하게도 그렇게 그려진 인물의 얼굴은 힘이 없고 축 처졌다는 느낌을 준다.


보통 날카롭고 긴 얼굴형은 강인하거나 지적인, 혹은 총명한 느낌을 주기 마련인데 뷔페가 구현하는 인물들의 얼굴형은 전혀 그렇지 않다. 앞서 말했듯 축 처진 느낌을 주는 얼굴형은, 이후에 그려지는 이목구비들로 하여금 우울, 혹은 이와 유사한 정서를 표현하라고 명령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작품의 전반이 보여주는 진하고 뚜렷한 윤곽선들은, 우중충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심화하는 데에 일조한다. 신체를 표현할 때 사용된 회색, 검은색, 흰색 계열의 색들—이로 인해 뷔페의 인물화는 전반적으로 창백하다는 느낌을 준다. 분명히 살아있는 사람임에도 죽은 사람마냥 생기가 없는 인간들.

 

 


4. 두 번째 작품 - “만개한 분홍 사과나무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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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를 같이 보러간 인간이 잠시 동안 멍하게 감상하던 작품. 사전에 확인하고 갔던 뷔페의 작품들은 대개 인물화였고, 풍경화를 그린 작품들 가운데에도 인물화를 그렸을 때처럼 뚜렷한 윤곽선과 어두운 색들을 활용하여 (밝은 톤의 색들도 사용했지만 그림들의 톤이 기본적으로 다들 어두웠다) 그린 것들이 많아서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데. 그런 와중에 감상했던 이 작품은 나에게도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물감을 ‘튀긴 듯이’ 그린 벚꽃의 잎들이 이 작품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벚꽃나무의 전경이 굉장히 섬세하고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나뭇가지 부분으로 다가갈수록 꽃잎의 세밀함은 극명해지는데, 그에 맞추어 꽃잎의 색깔도 진해져서 나뭇가지 근처는 마치 피가 튀긴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같이 작품을 감상했던 인간도 이러한 세밀함에 놀랐던 것 같다. 또한 분명 우리가 일반적으로 그리곤 하는 ‘밝은’ 벚꽃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지만, 오히려 색깔의 톤이 낮아진 상황에서 그려진 벚꽃나무가 나에게 더욱 선명하고 ‘화사한’ 이미지로 다가왔다. 그러한 와중에도 벚꽃나무라는 이미지가 통상적으로 나에게 주는 ‘화사하고 따뜻한’ 느낌을 놓치지 않은 작품이라 생각한다.



  

5. 세 번째 작품 - “이브닝 드레스를 입은 아나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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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보자마자 이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대체 사랑은 뭘까.” 이 작품은 자신의 아내인 아나벨 뷔페의 초상화를 그린 것들 중 하나인데, 아마 이 작품이 전시된 공간이 아나벨과 베르나르 뷔페의 운명적인 사랑을 설명한 구역이었을 거다. 대충 연애사를 읽어보니 웬만한 영화는 뺨을 칠 수준의 사랑 일화들이 가득했다. 서로가 첫눈에 끌려서 폭풍 같은 사랑을 나누었다는, 정말 고전적인 동시에 비현실적인 일화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 코너였던 것 같다. 유독 이 코너에서 관람객들이 오랫동안 멈춰서 있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이 작품이 내 이목을 끌었던 이유는, 앞서 말했듯 사랑의 힘을 숙고하게 할 정도로 이 작품이 여타 인물화들보다 가장 이질적이었기 때문이다. “여장 남자”라는 작품에서도 알 수 있었듯 뷔페의 인물화는 대체적으로 우울하고, 어둡고, 우중충하고, 어쩌면 피폐해보이기까지 하는 분위기를 자랑한다.


그런데 이 인물화는, 물론 아나벨의 모습이 흑백의 색깔로 표현되고 있긴 하지만 절대로 어둡고 우울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선홍빛에 가까운 분홍색의 유채 배경이, 흑백으로 묘사된 인물의 색감을 중화시켜주고 있다. 그래서 아나벨을 바라보는 뷔페의 시선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가 바라보는 아나벨은 다른 인물화의 인물들과는 달리 피가 온전히 도는, 생기 있고 발랄한 ‘건강한 인간’이다.


  


6. ‘~로 규정함’과 죽음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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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의 마지막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뷔페가 남겼던 작품들로 장식되었다. 뷔페는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심각한 신체 질환에 시달려, 그림을 더 이상 그리기 힘든 지경에 다다랐다. 그는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자살 원인은 작가 본인이 아닌 이상 정확히 알 수 없겠지만, 나는 그의 자살에 규정의 문제가 관여했다고 느낀다.


스스로를 예술가라 규정한 상황에서, 그리고 타인들로부터 예술가라는 규정을 확인받은 상황에서 ‘예술가로서’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절망감. 그럼으로써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을 수 없다는 좌절감. 더 이상은 예술가로 ‘규정될 수 없겠’다는 공포감과 무력감. 한 순간도 예술가로 규정되지 못하는 삶은 스스로가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박이, 그로 하여금 자살이라는 선택지를 고르도록 뒤흔든 건 아니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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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은 다 저렇게 엉망진창으로

작업을 하는게 주특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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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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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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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nonymous
    • 글 잘 읽었습니다. 글 전체를 관통하는 '예술가로 규정되는 것'이라는 주제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끝까지 긴장하면서 글을 읽도록 만드는 것 같습니다. 갑자기 뷔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시작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 속에서 탁월하게 균형감각을 유지하시면서 읽는 사람을 흡입시키는 탁월함에 놀랐네요. 그러다가 작품들에 대한 세심한 분석으로 분위기를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는 솜씨까지. 글의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로 단숨에 읽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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