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하나레이 베이, 그들의 비극, 그리고 치유 [영화]

마이너에 대한 고찰 15
글 입력 2019.06.12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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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오피니언에는
영화 <하나레이 베이>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핑으로 두 모자는 갑작스러운 죽음과 상실을 경험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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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타카시는 말한다. 서핑 보드를 사달라고. 나는 하와이로 가야겠다고. 평소에 대단한 유대감을 가진 사이는 아니었지만, 엄마 사치는 타카시의 부탁을 들어준다. 그렇게 아들은 빨간 서핑 보드를 가지고 하와이로 떠났고, 그것이 타카시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하와이 하나레이 해변에서 서핑을 하다가 상어에게 다리를 물려 죽은 아들. 서핑은 타카시에게는 죽음을, 사치에게는 상실을 가져다줬다.

허망한 타카시의 죽음 직후, 사치는 담담하다.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아들의 유품을 보고 아들의 유골함을 고르면서 가슴이 턱 막히는 순간도 있었지만 생각보다 고요하게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일본으로 돌아가려다, 공항에서 어떤 이의 서핑 보드를 바라본다. 그러다 문득 사치는 다시 하나레이 베이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는다. 튼튼한 렌트카를 빌리고 괜찮은 숙소를 구하고 바다 앞 풀밭 위에 의자를 깔고선 책을 읽는다. 그렇게 사치는 10년 동안 같은 시기에 하와이를 방문해 그녀만의 시간을 갖는다. 누군가와의 불필요한 관계를 맺지도 않고, 특별한 무언가를 즐기지도 않으면서.

그러다 사치는 우연히 타카시 또래의 일본인 소년 둘을 만나게 된다. 사치는 타카시처럼 서핑을 하러 하와이에 온 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차츰 타카시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고, 그들이 떠나기 전 해준 ‘일본인 외다리 서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커다란 감정의 동요를 겪는다. 정신없이 하나레이 해변을 걸으며 타카시일지도 모르는 외다리 서퍼를 찾아다니고, 슬픔에 받쳐 끄떡 않는 나무를 움직여보려 안간힘을 쓰기도 하며, 10년 동안 받지 않았던 타카시의 손도장을 받아들고는 마침내 엉엉 눈물을 터뜨리기도 한다.

그렇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하와이와 서핑은 두 모자에게 상실의 아픔을 겪게 했다. 그러나 뼈를 깎는 아픔 뒤에 그들을 치유해준 것 또한 하나레이 베이의 자연과 서핑이었다. 아픔을 전달한 주체이자 치유의 통로가 되어준 하와이와 서핑. 죽도록 미워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는 이 존재들은 타카시와 사치에게 무슨 의미였을까?



자연과 서핑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자 놓아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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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핑을 하는 이는 자신의 의지만으로 파도 위에 설 수 없다. 바다가 밀어주는 파도는 매순간 달라지고, 보드 위에 서기 위한 타이밍도 그에 따른 것이기에, 파도를 타기 위해 서퍼들은 바다에 모든 걸 맡겨야만 한다. 그래서 서핑은 바다에 나를 맞추는 것이고, 자연으로부터 받아들여지는 과정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연을 컨트롤할 수 없다. 노력은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결과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놓아줌’이고 ‘받아들임’이다.

처음 사치가 하와이에 머무를 때 그녀는 하와이의 무언가를 즐기지 않는다. 바다 앞에 자리를 잡고 그저 책을 읽을 뿐이다. 그토록 아름다운 풍경을 앞에 두고 그녀는 하와이에 ‘무관심’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미워했다지만 아들을 앗아간 하와이였으니, 그곳이 백 번 아름다웠다 해도 예뻐 보였을 리가 없다.

그런 사치에게 하와이의 사람들은 사치에게 말한다.
“자연은 죄가 없어. 자연은 모든 것을 치유해줄 뿐이지.”

그에 대해 사치는 말한다.
“난 이 섬을 받아들이려고 했지만
이 섬은 날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내가 그것마저 받아들여야 하나요?”

그러다 하와이에서의 사치가 활발해진 것은 소년들을 만난 이후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서핑을 배우면서 사치는 처음으로 하와이에서 미소를 짓는다. 바람을 타고, 햇볕을 받고, 그들을 믿으면서 웃는다. 사치의 ‘놓아줌’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러다 외다리 서퍼를 찾기 시작하면서 ‘아들이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자 부정을 경험하면서 사치는 온 하와이를 헤맨다. 그때가 지난 10년의 기간 중에서 하와이의 풍경을 가장 많이 본 순간이었을 것이다. 영화도 별 다른 코멘트나 설명 없이 카메라로 그곳을 헤매는 사치와 아름다운 풍경을 번갈아 비춘다. 그러다 사치는 곧고 굵은 나무 앞에 선다. 그리고 힘껏, 땀을 뚝뚝 흘리면서 나무를 밀어내기 시작한다. 이 나무가 조금이라도 움직여지면 외다리 서퍼는 타카시이고, 타카시는 살아있다는 그녀만의 상상과 부정이 진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처럼, 그러나 나무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저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킬 뿐이다.

그때부터 사치의 진짜 ‘받아들임’과 ‘놓아줌’은 시작된다. 한사코 거절해왔던 타카시의 마지막 흔적인 손도장을 받아오고 그것을 꺼내 보면서 소리 내어 울부짖는다. 급하게 쑤셔 넣었던 타카시의 짐을 다시 꺼내고 정리하기 시작한다.

사치에게 서핑과 자연은 타카시를 앗아간 재앙의 시작이었지만, 동시에 그녀의 상실을 깨우치고 받아들이게 한, 타카시를 놓아줄 준비를 하게 한 존재였다. 어쩌면 예상치 못한 불행을 겪은 사치에게 무언가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특별한 이유가 없었던, 그래서 더 거짓말 같았던 타카시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타카시의 죽음은 일종의 자연의 자연스러운 과정 중 하나였고, 사치는 10년이 지난 시점에 감정의 동요를 겪으면서 그것을 차츰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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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하나레이 베이>는 관객에게 그 의미를 전달하는 방식 또한 그것의 (놓아줌이나 받아들임에 관한) 주제 의식과 함께한다. 영화는 관람하는 내내 관객이 빈 여백을 느낄 만큼 어떠한 수식이나 설명을 친절하게 나열하지 않는다. 그저 주인공의 감정, 하와이의 풍경, 서핑을 하는 모습 등을 상세히 카메라에 담을 뿐이다.

우리는 말로 듣는 설명 대신 이 모든 것을 시각적으로 경험하면서 주제의식에 스며든다. 특별히 많은 생각이나 해석을 요하기보다도 보이지 않는 것을 그대로 느끼게 하는 이 영화의 방식은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확실하게 전달한다. 상실을 마주하는 법과 자연에서의 받아들임, 이 사이에서 우리는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김윤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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