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가을" 서평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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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을 받으면서 한동안 맨부커상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다. 수상 직후 매스컴은 연일 맨부커상이 얼마나 권위 있는 상인지 알리느라 여념이 없었고 그녀의 책은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비록 그녀가 받은 상은 맨부커상이 아닌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이었지만 '맨부커'라는 이름의 권위는 한국 문학계의 새로운 바람이 되기에 충분했다.
맨부커상은 스웨덴의 노벨상, 프랑스의 콩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거론될 만큼 그 역사가 깊지만, 한국에서는 그다지 인지도가 높지 않다. 전 세계 문학을 대상으로 하는 노벨 문학상과는 달리 맨부커상은 오로지 영어로 출간된 작품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2013년 이전에는 작가의 국적 제한까지 있었던 탓에 미국 작가가 최초로 수상하는데도 장장 48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이러한 지엽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맨부커상이 세계 3대 문학상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이유는 단연코 후보작들의 뛰어난 작품성 덕분이다.
2019년, 민음사에서 2017 맨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따끈따끈한 신간이 출간되었다. 바로 앨리 스미스의 <가을>이다. 이미 2014년 맨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전적이 있는 앨리 스미스는 <가을>을 통해 2017 맨부커상 최종 후보는 물론, 뉴욕 타임스 올해의 책에도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 <가을>은 최초의 '포스트 브렉시트' 소설로, 브렉시트 투표 이후 영국의 사회, 정치적 맥박을 정확히 짚어낸다. 사계절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이용해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날카롭게 묘사한 영국의 사계절은 아름답도록 독창적이다.
엘리자베스는 초등학교 시절 '이웃'을 조사하라는 학교 숙제를 하기 위해 '늙은 호모'로 소문나 있는 옆집 할아버지, 대니얼 글럭을 만난다. 그는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상상'이라는 발칙하고도 도발적인 도구를 사용해 '콜라주'를 가르친다. 바가텔 게임이라는 괴상한 법칙 속에서 그들은 마치 탁구처럼, 서로의 상상을 주고받는다. 물론, 여기에 그 어떤 성적, 육체적 욕망이 개입될 여지는 없다. 그들의 우정은 순수하게 필리아(Philia) 적이다.
소설은 다시 101세의 대니얼과 대학에서 미술사를 가르치는 시간제 강사, 엘리자베스를 비춘다. 브렉시트 이후의 세상은 (적어도 앨리 스미스의 말에 따르면) 최악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이다. 우체국의 직원은 여권 사진 속 엘리자베스의 머리 크기를 문제 삼고, 대니얼이 있는 요양원의 간호사는 밀린 수납을 재촉한다. 그뿐인가, 엘리자베스의 엄마가 머무는 동네 곳곳에는 '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낙서가 어지럽게 적혀있다. 사람들은 울타리를 세우고, 이민자를 가두고, 서로를 불신한다.
온 나라에서 나라가 갈라지고 여기에는 울타리가 서고 저기에는 담장이 올라갔으며, 여기에서는 선이 그어지고 저기에서는 선이 건너 졌다.
여기는 건너지 않는 선,
저기는 건너지 않는 편이 좋을 선,
여기는 아름다움의 선,
저기는 선무(線無),
여기는 있는 줄도 모르는 선,
저기는 감당할 수 없을 선,
완전히 새로 구축된 사선(射線),
전선(戰線),
선의 끝,
여기 그리고 저기.- 가을, 80쪽
<가을>은 브렉시트 이후 영국 사회의 민낯을 낱낱이 파고들지만, 첫 페이지에서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기까지 '문학'이라는 본질을 잃지 않는다. 찰스 디킨스의 역작, '두 도시 이야기'를 변용한 첫 문장은 <가을>이 왜 문단과 언론의 찬사를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다. 윌리엄의 바르도, 전략적 언어유희. 한 페이지가 넘어가도록 이어지는 지독한 운율은 그녀(여기서 그녀는 앨리 스미스일 수도, 엘리자베스일 수도 있다)가 느끼는 모든 감정을 정제하고 압축한 결정체다.
영국의 작가답게, <가을>의 곳곳에선 셰익스피어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직접적으로 셰익스피어가 인용되기도 하지만, 소설이 한 편의 희곡처럼 진행되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대사에는 현실성이 없다. 마치 고전 희곡 속 비극의 인물들처럼, 그들의 행동거지는 너무 과하고, 그래서 우스꽝스럽다. 시간의 흐름대로 단원마다 굵게 박혀 있는 날짜들은 자연스럽게 희곡의 해설을 연상시킨다.
소설은 또한 철저히 3인칭의 시점에서 전개되는데, 이 독창적인 스타일링은 과거와 현재가 모호하게 교차하는 지점에서 한 편의 부조리극이 되어 독자들의 뒤통수를 매섭게 내리친다. 작가는 독자가 소설 속 인물들에 이입하는 과정을 철저히 차단한다. 그녀는 브렉시트 이후 차별에 시달리는 난민 1이나 남성의 폭력과 억압에 시달리는 여성 1 따위를 전면에 내세우며 동정을 유발하는, 흔해빠진 공감의 방식에서 탈피한다. 오히려, 누구나 한 마디쯤 거들고 싶어 하는 문제를 흐릿하게 처리하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저 한 마디씩 툭, 던질 뿐이다.
나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총을 든 남자가 말했다. 말썽을 원하지 않아요. 그래서 이 총을 갖고 다니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 같은 사람들에게 유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나 같은 사람들이라니 무슨 뜻이죠? 나무 옷을 입은 사람이 말했다.
말 그대로예요. 한심한 팬터마임용 나무 옷을 입은 사람들 말이지요. 총을 든 남자가 말했다.
뭐가 잘못됐나요? 나무 옷을 입은 사람이 말했다.
-중략-
내 부모님에게, 그리고 내 조부모님과 증조부님에게도 살 만한 마을이었다면요(‥)하지만 가만 놔둔다면 당신이 우리 아이들에게도 나무 옷을 입히고 여자들에게도 나무 옷을 입힐 거예요. 싹부터 잘라야 해요.
- 가을, 164쪽
<가을>이 최초의 포스트 브렉시트 소설이라고 해서 오로지 이웃 간의 사랑과 난민 혐오 문제 정도만을 다룰 거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마치 태피스트리처럼 촘촘히 짜인 이야기는 폴린 보티와 메릴린 먼로로 대변되는 페미니즘부터 사회 안전망과 동성애를 넘나든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소설은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주제들을 능숙하게 엮는다. 같은 음자리표에서 널뛰듯 진행되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가을>은 독자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 시대를 담은 하나의 작품이 된다.
<가을>에 등장하는 폴린느 보티의 그림
그녀(역시, 앨리 스미스 본인일 수도, 엘리자베스일 수도 있는)가 들려주는 시대의 감수성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본 소양이다. 물론 독자는 그녀의 이야기에 동조할 수도 있고, 아니면 적극적으로 반대할 수도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녀는 절대로 우울한 삶의 단면만을 부각하며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을>은 그런 의미에서 양극화되고 퇴보하는 사회에 대한 진심 어린 한숨에 가깝다.
그러나 <가을>은 한숨일지언정 체념은 아니다. 지난한 가을이 지나고 더 매서운 바람만이 나리는 겨울의 초입에서 작가는 덤불 위에 아직 빨갛게 피어있는 장미를 가리키며 소리친다.
"저 색깔 좀 봐."
[김나경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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