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충동소비러이다. 맘에 드는 물건을 발견했을 때 금전적인 여유가 된다면 바로 구매를 하고 돈이 부족하다면 사진을 찍어두거나 캡쳐를 해 다음 달 알바비가 들어오면 물건을 구매하는, 아주 무분별하고 무계획적인 소비패턴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물건을 살 때 이 물건을 어디에 쓸지, 얼마나 자주 쓸지, 가격 대비 합리적인 물건인지 와 같은 고민을 별로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러던 내가 구입 전 꽤나 오래 고민한 물건이 있는데 바로 필름 카메라이다. 인스타그램에서 필름 카메라 열풍이 불면서 제일 먼저 관심이 갔고, 당일치기 여행에서 친구가 가져온 수동 필름 카메라를 보며 '오 이거 좋은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촤르륵 돌아가는 필름과 결과물을 예측하기 힘든 작은 뷰 파인더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몇 주 뒤, 친구에게 인화한 사진을 받은 순간, 아 이건 사야겠다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굳은 결심을 내렸다.
그런데 웬걸, 타이밍이 안 맞아도 이렇게 안 맞을 수가. 원하는 카메라가 중고 매장에 뜨면 내 지갑이 너무 얄팍했고, 월급날이 다가오면 마음에 쏙 드는 카메라가 없었다. 필름 카메라는 물건이 더 이상 생산되지 않고 시중에 출시되었던 카메라들로만 거래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달 동안 판매 사이트들을 전전하다가 마음에 쏙 드는 카메라를 발견했고, 마침 알바비가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아 단숨에 카메라와 필름들을 구매했다!

입문자용 필름 카메라를 검색했을 때 가장 많이 나오는 답변은 '무조건 저렴한 것'이었다. 나도 딱히 카메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카알못이기 때문에 성능이나 기능을 깊게 살펴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한가지 딱 하나 포기하지 못하는 기능이 있었는데 바로 데이터 백(사진에 촬영 날짜가 표시되는 기능)이었다. 나에게 필름으로 촬영한 사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약간 빛바랜 느낌 속 사진의 오른쪽 하단에 디지털 숫자가 새겨진 장면이기 때문이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캐논의 오토보이 라인을 알게 되었고, 마침 자주 살펴보던 사이트에 오토보이 s2가 올라와 있길래 바로 구매하게 되었다. 3일 뒤쯤 배송된 카메라는 놀랍게도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조금 빛이 바랜 박스 안에 설명서와 보증서, 가격표까지 고스란히 들어있었고 가죽케이스와 어깨 끈, 심지어 무선 리모콘까지!(게다가 작동까지 완벽했다.) 보증서에 적혀진 구매 날짜는 2002년. 아마 카메라는 그보다 더 예전에 생산되었을 것이다. 거의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누구의 손을 거쳐왔는지 괜스레 카메라의 역사가 궁금해지면서 누군가의 추억을 물려받은 듯한 오묘한 기분도 들었다.


얼마 전 필름 카메라로 찍은 첫 롤을 드디어 인화했다. 첫 롤은 원래 망하는 것이라는 공식을 보고 마구잡이로 찍긴 했지만 그래도 필름이 아깝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어 무엇을 찍을지 고심하다 보니 필름 한 롤(36컷)을 채우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 롤을 다 채우고 나서도 필름 사진을 인화해주는 곳을 찾고, 또 그곳으로 향하는 데에도 시간이 꽤나 들었다. 2월 말의 추억이 담긴 사진들을 뒤늦게 받아봤을 때 들었던 생각은 '와! 생각보다 더 좋은데!'였다.
36장의 사진들을 확인하면서 제일 먼저 느낀 점은 필름 카메라 촬영에서는 빛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다지 어둡다고 생각하지 않은 실내였어도 자연광이 들지 않거나 조명이 약하면 사진이 굉장히 어둡게 나왔다. 광중광은 자연광이라더니...를 제대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빛을 받지 못한 사진은 약간 아쉬웠지만 빛을 잘 받아 정말 마음에 드는 사진도 있었다.
바로 위의 사진들인데 두 사진은 지난 2월까지 아르바이트생으로 근무했던 도서관의 어느 한 부분을 찍은 사진이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과 계단이 어우러져 매우 포근하고 따뜻한 사진이 담긴 것 같다. '오 여기가 이렇게 분위기 있는 공간이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늑하게 촬영되어 아주 마음에 쏙 드는 사진들이다.

다만 구도는 약간 아쉽다. 찍으면서도 나름 수평이나 여백을 맞춘다고 맞췄는데 작은 뷰 파인더로 찍다 보니 잘 맞춰지지 않았다. 창화루의 간판은 가운데에 두고 찍었다고 생각했고, 아래 사진 또한 도로를 정 가운데 두고 찍은 것 같은데 말이다. 아무래도 이건 내 감에 달린 문제이니 여러 번 더 찍으면서 위치나 여백에 대한 감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만간 필름을 맡기러 현상소에 가야겠다.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이번에는 현상에 사진 출력까지 반드시 해와야지. 제주의 푸른 하늘이 어떻게 담겼을지 무척이나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