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 죽음에 대하여 [영화]

글 입력 2019.01.10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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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시리게 푸른 색감의 포스터와 감성적인 제목,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 단순하지만, 이것이 내가 이 영화를 보기로 한 이유였다. 청량하면서도 몽환적인 포스터는 영화의 영상미를 기대하게 했고, 영화의 제목은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난 내 멋대로 이 영화를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감성에 영상미를 더한 소년과 소녀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일 거라 단정 지은 뒤 영화를 재생했다.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인 것이 조금 의아하긴 했다)


내가 착각했다는 걸 깨달은 것은 영화가 시작하고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영화는 내 기대보다 훨씬 심오하고 난해했다. 영화를 본 후, 머릿속에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이 이리저리 떠다녔다. 그래도 이 생각들 사이에서 비교적 선명하게 다가오는 메시지가 있었기에 지금부터 그것을 풀어보고자 한다.

 

*


죽음이란 무엇일까. 지금까지 수많은 이가 이 질문의 답을 구하고자 했으나 아직도 명확한 답은 얻지 못했다. 지구를 넘어 우주의 비밀까지 밝히는 인간에게도 죽음은 그야말로 미지의 세계이다. 이렇게 죽음에는 정해진 답이 없기에 그에 관해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죽음은 누군가에게는 소멸이며, 누군가에게는 유토피아로 가는 관문이다. 이 외에도 그 사람이 어떤 신념을 가졌느냐에 따라 죽음은 다양한 의미가 된다. 이토록 다양한 의미로 존재하는 죽음이지만, 죽음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있다.


그것은 죽음을 맞이하면 육체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다는 것이다. 죽음 후에는 먹을 수도, 사랑하는 이를 안아줄 수도 없다. 그래서인지 죽음은 흔히 비극적이고 부정적으로 여겨진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를 보고 나면 이런 의문이 든다. 죽음은 정말 비극적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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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살아 숨 쉬는 아마미섬에 사는 소녀와 소년, 쿄코(요시나가 준)와 카에토(무라카미 니지로). 쿄코의 엄마는 병으로 죽음을 앞두게 되고 이에 쿄코는 죽음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사람은 왜 태어나고 죽고 하는 걸까?” 쿄코는 남자친구인 카에토에게 묻지만 카에토도 그 답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이다. 한편, 쿄코는 기도를 하기 위해 사당에 갔다가 그곳에서 큰 무녀님을 만나게 된다. 큰 무녀님은 쿄코에게 엄마가 죽어 몸의 온기는 없어지더라도 마음의 온기는 있으며, 그 온기는 쿄코의 마음속에 있을 것이라 말해준다. 하지만 큰 무녀님의 이런 말에도 쿄코는 ‘그걸로는 부족해요’라고 대답한다. 쿄코에게 죽음은 아직 받아들이기 힘들기만 하다.

 

죽음을 어려워하는 쿄코와 달리 쿄코의 엄마는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신을 모시는 사람인 쿄코의 어머니는 신이 계신 곳을 알고 있기에 죽음이 두렵지 않다. 또 그는 자신의 생명은 쿄코에게 이어져 있고 다시 쿄코가 낳은 아이를 통해 이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쿄코의 어머니에게 죽음은 소멸이 아니며 미지의 세계 또한 아니다. 이런 그가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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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조금 흐르고, 쿄코의 엄마에게 생의 마지막 날이 찾아온다. 쿄코 엄마의 마지막을 배웅하기 위해 모여 있는 사람들 속에서 쿄코의 엄마가 원하는 것은 다름 아닌 노래이다. 쿄코의 엄마가 원하는 노래를 부를 줄 아는 한 사람은 기꺼이 그를 위해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한다. 힘없이 누워있는 쿄코의 엄마이지만, 그의 영혼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음을 그의 표정이 말해준다.


노래가 끝난 후, 쿄코의 엄마는 또 다른 노래를 요청하고 이번에는 모여 있던 마을 사람 모두가 노래를 부르며 춤춘다.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쿄코의 엄마도 미약하게나마 손을 움직이며 자신의 즐거움을 표현한다. 곧이어 쿄코의 엄마는 ‘행복하다’라고 말한다. 죽음과 행복. 이 얼마나 어색한 조합인가. 쿄코의 엄마는 곧 자신을 마중 나온 어머니를 따라 긴 여행을 떠난다. 흡사 잔칫집 같던 분위기에서 그는 그렇게 행복한 죽음을 맞이한다.

 

애달픈 통곡도 슬픈 선율의 음악도 없다. 오히려 죽음을 앞둔 이를 앞에 두고 한바탕 춤판을 벌여서 보는 이를 당황스럽게 한다. 이렇게 영화는 죽음에 비극적인 수식어를 부여하는 것을 자제하고 담담한 시선으로 죽음을 바라본다. 그 시선 속에서 깨닫는 것은 죽음은 그냥 죽음이라는 것이다. 특별히 비극적이거나 안타까운 것이 아닌, 죽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삶의 절차라는 것이 그 시선 속에 담겨있다. 그저 이 땅에 한 생명으로 태어난 이상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이자 자연의 순리인 것이다.

 

그렇다. 죽음은 자연의 순리이다. 태어난 것은 언젠가 죽는다. 그리고 죽음이 있기에 새로운 탄생이 존재한다. 죽음과 탄생의 선순환 속에서 세상은 돌아가고 자연은 유지된다. 죽음 없이 탄생만 반복되는 세상을 상상해보라. 끔찍하지 않은가. 이런 이유로 ‘죽음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이 영화의 답은 ‘순환’이다. 자신의 생명이 쿄코에게 이어질 것이라는 쿄코 엄마의 말에서 알 수 있듯 영화에서 죽음은 소멸이 아닌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자연과 자연의 일부인 인간 속에서 순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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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어린 쿄코는 처음에는 이런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죽음은 소멸은 아니지만 어찌 됐든 이별이 따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의 형체가 없어져 몸의 온기를 느낄 수 없다는 것은 쿄코가 단번에 납득하기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쿄코의 곁에는 쓸쓸함을 나눌 카에토가 있었고 그로 인해 쿄코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성장한다. 영화의 끝에서 쿄코와 카이토는 맨몸으로 바다에서 유영한다. 푸른 바닷속에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유유히 나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신비롭고도 아름다웠다. 바다와 이질감 없이 어우러지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그들이 자연과 자연의 순리를 받아들였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정지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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