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예술가의 비윤리, 이해해야할까요?

연극 '애들러와 깁'
글 입력 2018.10.29 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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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끝까지 예술가들만 나오는 연극이 있다. 바로 지금부터 이야기할 애들러와 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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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애들러와 깁>은 한 학생이 자신의 논문을 읽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처음 그녀는 자신의 학번과 학점 등을 말하며 지금부터, 자신은 지속적으로 나와 연극의 진행을 도와줄 것을 암시한다. 말 그대로 ‘진행자’인 셈이다. 이 영화에서 중심인은 아니면서, 함께 무대에 올라와 있는 또 다른 사람이 있으니 이 인물은 작품의 배경, 소품, 분장가, 동물 등을 연기하며 작품에 구체성을 더한다. 소개만으로도 느껴지지만, 필자가 보고 온 이 연극은 ‘예술’영화에 가까웠다. 예술가들의 예술영화인 셈이다.




01. “점점 생명력이 살아나고 있어”, 동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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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연극의 시작은 모든 등장인물들이 허공을 바라보며 대사를 ‘읊는 행동’을 하는 것이었다. 모두들 관객이 바라는 ‘연기’의 모습을 무시하고 있었다. 분명 배우들에겐 그것 또한 연기였겠지만 말이다. 어쨌건 그들은 울고 웃고 일상적인 행동을 하는 척을 하기보다는 서있기를 택했다. 충격이었다. 그렇게 뻣뻣한 채로 그들은 신음소리를 내고, 애들러와 깁의 집으로 가 철장을 자르고 집으로 침입하기에 이른다. 실제로 그런 ‘척’을 했다면 매우 역동적인 장면이 될 수 있었겠지만 그들은 그것보다는 잔잔하고 뻣뻣하게 목소리만으로 장면을 보여주기를 택했다. 무슨 의미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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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의 의미를 알아보는 것의 가장 쉬운 방법은, 그것과의 ‘반대’와 비교하는 일이다. <애들러와 깁>에서의 장면 전달 방식은 ‘처음’의 부분과 ‘마지막’의 부분에서 상반되기에 둘을 비교하기로 한다. 마지막 장면을 설명하자면, 애들러의 실제 모습을 연기하고 싶어하던 루이즈가 성공하여 시상식에서 수상 후 소감을 발표하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 루이즈의 감정은 폭발한다. 손을 올렸다 내리고, 상을 처다보았다가 앞을 바라보고, 또 종국엔 눈물을 흘린다. 이 마지막 장면과 처음 장면에서 달라진 것은, 처음의 루이즈는 ‘애들러를 갈망하는 상태’이고 마지막의 루이즈는 ‘애들러에 도달한 상태’라는 것이다. 연극은 루이즈가 ‘애들러’에 닿아가며 변화하고 있다. 누군가의 말처럼 생명력을 찾아간다.


‘예술'의 경지에 이르는 일은 결국, 생명력에 닿는 일이다.




02. 퀘스쳐너리 마크. 예술가의 비윤리는 이해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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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극의 핵심 질문은, 가짜가 진짜를 연기하면 진짜가 될 수 있을까인 것같은데, 저항정신이 강한 필자는 또 다른 질문을 던지게 될 것 같다. 연극의 내내 머리에 머문 것은 이것뿐이었어서 따로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 필자가 요즘 보고 있는 드라마의 인물은 필자에게 “What? Are you hippie?(뭐? 너 히피니?)”할 것이다.


주인공 루이즈는 예술가 ‘애들러'에 닿기 위해 모든 일을 불사한다. 동경하던 예술가 애들러와 그녀의 애인이 살던 오두막을 찾고 또 그 안으로 무단으로 침입한다. 말그대로 모두 비논리고 비윤리다. 예전 우리나라에도 이런 비슷한 내용의 예술가 소설이 있었는데, 바로  <광염소나타>다. 이 소설에서 음악비평가 K는 ‘사회 교화자 모 씨’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며, ‘백성수’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 속 백성수는 천재 작곡가로 작곡이 잘 진행되지 않을 때에는 방화, 살인, 사체 강간을 하며 영감을 얻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비윤리적인 행위 끝에 길이길이 남을 만한 예술작품을 하나씩 내놓아 버린다.


이 소설을 쓴 사람은 ‘김동인’이라는 작가로, 그는 ‘유미주의’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바로 ‘예술은 예술이어야한다’는 정신이다. 달리 말하자면 아름다운 것이 최고다 정도의 사상이 되겠다. 아마 그는 루이즈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주었을 것이다. 루이즈가 애들러의 무덤을 파헤치긴 했지만, 자신의 영감을 위해 10년도 더 된 사체에 손을 대긴 했지만, 무단으로 남의 집에 침입하고, 개를 죽였지만 모두 그건 ‘예술’을 위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극단적이다.


김동인의 생각은 여기까지 하고, 필자가 던지게 될 질문은 이것이다. “예술을 위해서라면 이 모든 일은 괜찮을까?” 모든 범죄와 비윤리는 예술의 명성 아래 용서받을 수 있을까? 사실 정확한 답을 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필자의 성격과 질문의 특성 상 확답을 내리진 못할 것 같다.


백성수와 루이즈 둘 다 가치있는 것을 남겼다. 이 예술 작품들은 아마 길이길이 사랑을 받을테고, 누군가에겐 영감을 누군가에겐 감명을, 그리고 위로와 재미를 선사할 것이다. 이들이 남긴 예술작품이 없었으면 불가했을 감정들이다. 어떤 이들은 감명깊게 본 예술품들에 ‘이런 작품을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한다. 만약 그들이 없었다면, 그들의 영감과, 그 영감의 원천이 없었다면 불가했을 ‘감사 인사’다. 그 시작이 어쨌건 그들은 대단한 가치를 남긴 것이다. 하지만 문제인 것은 그들의 행동은 피해자를 낳는다는 것이다. 연극 속 루이즈가 피해를 입힌 것은 개였고 그 피해내용은 생명이었다. 또 현실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피를 흘리지 않았나.


이런 창작은 괜찮을까, 예술가들의 비윤리는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면죄부를 받아 용서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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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속 표현된 애들러와 깁,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영화가 궁금해지는 연극이다. 아마 이런 감상을 느끼게 하였으니 꽤 괜찮은 연극이라고 해도 좋을테다. 예술과 윤리, 그리고 진짜와 가짜에 대해 고민해보게 하는 기회를 제공했던 애들러와 깁은 아직, 그곳에 살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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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러와 깁

예술공간 서울

극단 코끼리 만보

2018.10.12 ~ 2018.10.28 (종료)


[손민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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