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대학생 진아 씨와 남대생 민수 씨가 사는 세상 [도서]

이 땅의 대학생들을 위한 페미니즘 도서, '대학생 진아 씨와 남대생 민수 씨'
글 입력 2018.08.21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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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대생이다. 여자 대학생이라서 여대생으로 불리기도 하고, 여대에 다니는 학생이라서 여대생으로 불리기도 한다. 아마도 우리 학교가 갓 생겨났을 시기에는 여성이 대학에 다니는 경우가 적었기 때문에 특수성을 띤다고 여자 대학생들을 일컬어 여대생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명칭은 시간이 흘러 흘러 여성 대학 진학률이 남성 대학 진학률을 넘어선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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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달 전쯤인가, <대학생 진아 씨와 남대생 민수 씨>라는 책 출간을 위한 텀블벅 후원에 참여했다. 우연히 학교 커뮤니티에서 학생들의 응원에 힘입어 책의 출간을 위한 텀블벅 후원을 진행하게 되었다며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게시글을 접하고 나서였다. 책의 제목은 '대학생' 진아 씨와 '남대생' 민수 씨. '누가 봐도' 페미니즘 도서였다. 남대생이라는 말은 거의 쓰이지 않는 말이니까 그랬다. 작가는 이 책을 단 한 푼의 수익금도 남기지 않고 출간하려 한다고 했다.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는 말에 환멸이나 되려 출간 과정의 적자도 본인이 감수하기로 했다고 했다. 이 어린 대학생이 그렇게까지 하며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들어보고 싶어서 후원에 기꺼이 동참했다. 후원은 달성률 641%를 기록했고 후원자는 나를 포함해 855명이었다.

그리곤 사실 기억에서 잊어버리고 있었다. 한참 지나서 책이 도착하고 나서도 읽어봐야지, 하고선 펼치지 않았다. 두껍거나 큼직하지도 않은 아담한 크기의 책이었는데도, 진득한 게으름 때문에 며칠 전에야 드디어 책을 펼쳐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평소 책만 펼치면 집중력이 떨어지고 읽는 속도도 거북이 뺨을 쳐 책 한 권을 읽는데 짧게는 2~3일에서 길게는 일주일이 넘게 걸리는 편인데도, 하루 만에 책을 모두 읽어버렸다. 그만큼 책이 쉽게 읽혔다. 간결한 문체와 일상적인 내용이 공감을 자아냈다. 외국의 페미니즘 서적처럼 다른 환경의 이야기가 아닌 현재 대한민국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을 다뤘고, 82년생 김지영처럼 사회생활을 경험했거나 가정주부가 되어버린 여성들의 이야기가 아닌 현재 내 또래 대학생들의 이야기였다. 나 자신과 내 아는 언니, 내 친구, 내 후배의 이야기였기에 더 빨리 읽혔고, 더 자주 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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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세계관은 '미러링'을 떠올리면 간단하다. 남성과 여성을 바꿔 놓았다. 남성의 신체적 특징(힘이 더 세고, 키가 더 큰)을 그대로 여성에게 옮겨놨고, 다만 성기와 임신 가능 여부는 현실과 동일하다. 작품의 모티브가 된 <이갈리아의 딸들>에서는 여성이 출산능력을 바탕으로 사회적 권력의 우위를 점하는 설정이지만, 이 책에서는 여성에게 현재 남성이 가진 물리적 힘의 우위를 부여해 사회적 권력 차이를 만들었다. 덕분에 현재 여성과 남성 간의 관계를 출산능력 부분만을 빼면 그냥 반대로 뒤집은 세상이 이 소설의 배경이다.

작품을 읽다 보면 머릿속으로 내용을 이미지로 그리게 되곤 하는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 자신의 편협한 시각을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남대생 민수 씨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소설의 초반부에, 나는 그가 겪는 성적 차별(소설에서는 남성이기 때문에 겪게 되지만 현실에서는 여성이기 때문에 흔히 겪게 되는)에 자연스럽게 머리가 길고 치마를 입은 이미지를 대입했다. 그러다가 민수 씨가 상대방을 누나라고 부르거나 그가 남성이라는 것이 부각되는 문장이 나오면, 머릿속의 이미지가 와장창 깨져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런데 그런 나 자신을 의식하고 민수 씨에게 짧은 머리를 대입해가며 소설을 마저 읽다 보니 소설 속 민수 씨는 진짜로 긴 머리에 화장을 하고 다닌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도 모르게 여성과 남성의 외모에 대한 고정된 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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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사회적으로 빈번히 논의되고 있는 여성의 외모 코르셋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부분이었다. 소설 속에서는 여성이 물리적 힘을 가진 존재로 권력의 우위에 위치한다. 이런 경우 활동에 불편함을 주고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긴 머리, 화장, 달라붙는 옷 등을 입는 것은 자연스럽게 권력이 낮은 남성이 됐을 것이다. 그러한 것들을 왜 '코르셋'이라고 지칭하며 '꾸밈 노동'에서 벗어나자고 촉구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만드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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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1장은 남대생 민수 씨의 관점에서 진행되고 2장은 대학생 진아 씨의 관점에서 진행되는데, 이 두 사람이 각자의 이름만큼이나 평범한 인물을 대표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좋았던 것 같다. 아마 이 두 사람이, 그리고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과 상황들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건과 인물이라는 데에 부정적인 사람들도 다수 있을 것이다. 이를 염려한 듯 각 에피소드의 마지막에 구체적인 통계자료를 제시한 것이 눈에 띈다. 책의 등장인물들이 대학생이기 때문에 에피소드들은 대부분 출산이나 경력단절과 같은 소재보다는 데이트 폭력과 혐오 표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흔히 연인 간의 일로 치부되어 심각하다고 않은 일로 여기거나 자신의 말과 행동에 여성 혐오가 깔려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구체적 통계치 제시와 성별 미러링은 자신을 돌아보는 데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한다.

개인적으로 약간 아쉬운 점은 통계치마저 성별을 바꾸어 제시해 읽다가 헷갈리거나 대충 넘겨버릴 우려가 든다는 것과 텀블벅 후원을 통해 배포된 책이라 페미니즘에 이미 큰 관심을 가진 사람들만 읽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 책은 읽기 쉬운 만큼 페미니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추천하고 싶은데 말이다. 펀딩이 끝나 책을 읽어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가진 이들을 위해 소설을 편 단위로 읽어볼 수 있는 링크를 남긴다. 사회에는 각기 다른 계층과 나이, 직업의 여성들이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차별받고 있다며 20대 대학생의 목소리를 내준 이 책의 작가와 같이, 더 많은 여성이 더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어주길 소망한다.




[박찬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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