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떠나려는 마음과, 그럼에도 사랑하는 마음 [영화]

영화 '레이디버드(Lady Bird, 2018)
글 입력 2018.08.20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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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죽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조그만 상업 단지의 초중고가 하나씩 있는 작은 동네다. 길목마다 추억이 있고, 그래서 계절이 변할 때마다 수많은 지난날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는 곳이자, 나의 고향이다.

그렇지만 나는 요즘 이 동네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아니 어쩌면 고등학생 때부터 이곳을 벗어나야겠다, 더 넓은 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내 인생은 계획되고 있었다. 스무 살이 되면, 혹은 대학생이 되면, 을 꿈꾸며 내가 기대하는 활동 반경은 이미 그때부터 그 작은 동네를 벗어나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나가야 지하철이 시작되는 종점역에 닿을 수 있고, 30분 정도 대중교통에 몸을 실으면 서울에 갈 수 있었다. 점점 서울이란 곳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나에게, 나의 동네를 벗어날 때와 그리고 다시 돌아갈 때 보이는 산과 시골의 풍경들이 점점 마음에서 멀어져 감을 느꼈다. 이 풍경들을 그만 보고 싶다, 눈에도 마음에도 참 편하고 익숙한 곳이지만 나도 이제는 정말 다른 곳에서 살아보고싶다, 도시에 가는 게 아니라 그곳에서 살고 싶다, 하고.



레이디 버드
(Lady Bird,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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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name is LadyBird!'

자신을 '크리스틴'이라 부르는 엄마에게
내 이름은 '레이디버드'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소녀

이 소녀는 자신이 새로 지은 이름을
학교에서도, 친구들에게도, 그리고
가족들에게도 불러줄 것을 당당히 이야기한다

자신의 본래 이름이 아닌 
새로운 이름으로 앞날을 꿈꾸는 레이디버드

뉴욕에서의 대학 생활을 꿈꾸며
오래 지내온 고향과 가족들을 떠나려는 그녀와
한편 비슷하지만 또 다른 마음으로,
그 과정들을 받아들이는 가족들의 마음


곧 있을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어느 대학을 가야 할지 고민하는 기로에 서있는 주인공 레이디버드. 자기 자신을 ‘레이디 버드’라고 부르는 이 소녀는 자신의 고향을 벗어나 미국의 대도시에서 자신의 스무 살을 펼치고 싶어 한다. 그녀의 당찬 바램과는 달리, 가족들은 근교의 대학을 가라거나, 동네 근처의 대학 이름들을 언급하며 그 학교 괜찮더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달리는 차에서 엄마가 그녀의 당찬 꿈을 반대하는 식으로 이야기라도 하면, 그녀의 선택은 그 즉시 달리는 차의 문을 열고 뛰어내려 버리는 것이다. 수학을 잘하는 편이 아니지만 수학 올림피아드에 나가볼까 생각을 하고, 성적은 못 미치지만 '예일대 정도는 힘들겠죠?'라고 이야기하는, 내가 하고 싶은 일과 가슴이 뛸 것 같은 일은 꼭 입 밖으로 꺼내봐야 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쯤에 무슨 문제가 있겠냐는 그녀다.

보통은 나의 현재 지표에 맞춰, 그리고 일반적인 통념이나 시선에 맞춰 내 인생의 계획들을 하게 되기 마련인데, 레이디버드는 그저 '내가 해보고 싶으면, 해 보면 되지 뭐가 문제야?'라는 성격이다. 차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에서 그녀가 불효자라거나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철부지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던 건, 오히려 가슴 시원하고 통쾌한 자기만의 방법이었다는 생각이 든 건, 나 역시도 내가 나름 오랜 시간을 보내온 곳을 벗어나고 싶은 처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태 자신이 속해있던 공간들로부터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 다른 풍 속에서 새로운 계절들을 그려나가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도 잘 이해되는 건, 그녀가 곧 고등학교 졸업을 앞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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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에게는, 그리고 나보다도 당찬 레이디버드에게도 역시, 집을 떠나기 전 생각할 것이 있었다. 익숙함을 지나 이젠 질리는 것도 같다고, 더 이상 내게 영감을 주지 못한다며 이미 마음에서 벗어난 듯한, 그러나 역시 마음 한편에는 ‘집이라면 편한 게 좋지 않을까’하며 부딪히는 고민 말이다. 내가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잘 자리 잡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역시 고민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가족이다. 내 주위의 많은 친구들이 이미 학교 기숙사에서 살거나 자취를 하고 있기에 20대 이후의 외떨어진 생활이 아주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지만, 막상 나의 문제가 되니 마음에 가장 걸리는 것이 가족이었다. 나의 로망을, 그리고 나의 자유를 누리자고 내가 집 밖으로 뛰쳐나가는 건 아닐까, 내가 과연 어떤 좋은 걸 누리자고 밖에서의 삶을 택하는 걸까, 하고. 그리고 내가 먼 일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독립이, 지금 정말 시작되어버리는 건가 하는 두려움 역시 있었다.

마치 내가 나름의 고민을 하며 챙긴 나의 조그만 물건들이, 그리고 내가 끌고 나갈 작은 캐리어나 메고 갈 짐가방이, 여행이라도 떠나는 듯한 그 모습을 떠올리는 게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나에게 이 동네를 떠나는 건, 그리고 가족을 떠나려 가방을 짊어지고 등을 지는 건, 마치 가족에게서 등을 돌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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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그리는 모습을 이루기 위해 아버지의 도움으로 장학금과 관련한 대출을 받거나, 대학의 서류들을 지원하면서 레이디버드는 조금씩 자신만의 절차를 진행해 나간다. 아버지처럼 지지해주고 그녀를 도와주는 사람도 있지만, 그 떠남이 막연하기만 해 일단 설득해보려는 사람도 있다. 그녀의 엄마는 근처의 학교들도 괜찮다면서, 혹시나 그녀가 허상에 사로잡혀 무작정 떠나기만을 바라는 건 아닌가 하는 심정으로 딸의 행동들을, 그리고 그 결심들이 뜬구름이라는 듯 이야기한다.

나 또한 대학 진학을 앞뒀을 당시, 근처의 학교들이 딱 좋을 것 같다며, 너무 멀리 나가면 힘들다고 이야기했던 가족이 있다. 그 모두가 좋은 학교인 건 나도 알고 있었지만 나는 먼 곳이라도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가겠다, 가까운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마음이 확고했다. 지금보다도 철없었던 때라 그런지, 나는 마치 가족이 날 ‘붙잡으려 한다’는 생각에 내 꿈을 높게, 끝없이 높게만 펼치는 걸 막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왜 나를 자유롭게, 자유롭게만 풀어 주지 않는 걸까. 그 마음으로 영화 속 레이디버드를, 그리고 또 다른 레이디버드로 느껴지는 나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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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다른 삶을 그리는 레이디버드의 반대편에는, 아니 어쩌면 반대편이 아닌 바로 옆에는 역시나 새로운 변화와 떠남을 막연해 하는 가족이 있다. 아직 부모님의 마음을 다 알 수 없기에, 그리고 나는 여전히 내가 그리는 삶과 꿈이 중요하기에 가끔 내 기준에서 아주 원대하지는 않은 듯한 방안을 듣게 될 때면 참 답답했다. 그렇지만, 그런 나 역시도 나의 떠남이 슬프다는 마음 하나만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떠나는 자유로움, 그러나 분명 내가 떠나기에 보고 싶은 마음, 그리운 마음, 그리고 나와 부모님 모두에게 처음 있는 일이기에 다시 돌아올 걸 알면서도 일단 애달픈 그 마음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레이디버드가 마치 그녀의 집과, 동네와, 가족들이 아닌 다른 먼 곳을 향해 온 시선을 둘 때 그녀의 어머니 역시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 영화를 이야기하며 ‘떠나려는 마음과, 그럼에도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큰 제목을 붙인 이유도, 영화가 꿈을 향해 나아가는 레이디버드뿐 아니라 한 편 딸을 언제나 응원해주고 싶지만 막상 떼어 보내려는 마음에 부모로서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그 과정을 지켜봐야 하는 이의 마음 역시 다르지 않은 비중으로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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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핑크색 벽지와 학창시절의 모든 좋아하는 것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벽을 정리하고 페인트를 칠하는 레이디버드를 바라보며, 나는 마치 떠날 준비를 하는 내 미래의 행동들을 미리 보기라도 하듯 그녀의 행동들을 바라보았다. 나의 꿈 많았던 시간들이 모두 녹아있는 공간의 벽지를 바꾸며, 지난 어린 나를 모두 덮고 새로운 색을 칠하면서, 그 기분이 어떨까 하고.

그녀가 도시의 학교를 가기 위해 부모님의 차를 타고 공항으로 향할 때,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뒷자리에 앉은 레이디버드 모두 말이 없다. 레이디버드는 떠나는 입장으로서 반쯤은 슬프고, 반쯤은 오롯이 혼자가 되는 순간을 앞두고 설렜을 것이다. 앞자리에서 카메라에 더욱 가까이 비치는 아버지와 운전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몸소 운전대를 잡고 딸을 공항 길에 데려다주긴 하지만, 마치 딸이 지금이라도 집에 가겠다고 하면 바로 차를 돌릴 것 같은 표정이다. 시원섭섭하다는 단어로는 모자라는, 슬프다고 하기에는 참 복합적인 마음이라고밖에는 마음의 이해가 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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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올해로 스물세 번째 해를 지내고 있고, 이제는 나만의, 내가 선택한 풍경에서 새로운 익숙함을 찾고 싶다는 생각을 더 자주 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마치 나의 발전보다는 원점으로 돌아가는 듯한 답답함이 되는 게 슬프기도 하다.  벗어나고 싶지만 이 동네를 정말 사랑한다는 걸 마음 속으로 알고 있다.  사랑하지만 떠나고 싶은 경우도 있는 걸까. 혹시나 이 나이에는, 어떤 나이에는 떠나고만 싶은 심리가 아주 강하게 작용하는 게 일반적인 걸까. 나는 또 다른 레이디버드이고, 나는 떠나고 싶지만 내가 언젠가 떠나보내야 할 것들을, 그럼에도 사랑하고 있다.


[남윤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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