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우리라는 이름의 울타리, ‘우리가 아직 살아있네요'
글 입력 2018.07.01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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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연극 '우리가 아직 살아있네요'떼아뜨르 봄날의 언어는 먹구름 잔뜩 낀 장마철의 보통날과 다를 바 없다. 우중충한 하늘을 뚫고 내리는 비가 대지에 정화를 가져다주는 것처럼, 봄날의 언어와 호흡 또한 유의미한 삶에 대한 카타르시스로 다가온다.‘우리’라는 단어가 주는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가족은 우리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비로소 가족이라 불릴 수 있을까? 연극 ‘우리가 아직 살아있네요’는 ‘우리’라는 이름의 울타리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던진다. 생과 사로 억지로 분리시킨 후에야 비로소 보이는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형성된 빌어먹을 운명의 고리인건지, 연극은 묻고 또 묻는다.현식과 은주는 어린 두 딸과 함께 가정을 꾸리며 살아간다. 그러나 경제적 압박에 못 이겨 두 딸을 결국 포기하게 된다. 부모로서 자식에 대한 최고의 도리는 못해도 최선을 다하며 살자고 다짐해왔던 이들이지만 결국 돈 앞에서 부모 자식 간의 인연을 끊어버리고 만다. 포기는 단순히 좋은 옷을 입혀주지 못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이지 못하는 상황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이들은 봄기운이 생동하기 시작하는 어느 겨울의 끝자락에, 어린 자녀 둘을 죽이고 만다.자식을 죽이고 뒤따라 죽음을 택했지만, 어찌된 이유에선지 현식과 은주는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자식에게 몹쓸 짓을 했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로 다시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다. 글쎄, 자녀들은 죽고 싶었을까? 분명 살고 싶었을 것이다. 현식과 은주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지만, 자녀들의 생각까지는 미처 품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죽고 싶다는 건 잠깐 스쳐지나가는 찰나의 감정에 불과할지 몰라도 살고 싶다는 생(生) 앞에서의 발악은 영원하고 또 영원하기 때문이다.어린 자녀를 보내고 현식과 은주 앞에는 도피의 연속 그 자체인 삶이 놓여진다. 이때 삶은 어떠한 목적의식도, 윤리적 기준도 없는 그저 하루하루 버텨가며 겨우 이어지는 삶을 의미한다. 이리 저리 떠돌다보면 자신들의 죄가 사라질 수 있겠지, 아이들이 있었던 여느 평범한 가족의 순간이 흩어지겠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사실들을 마주하고자 이들은 달아나고 또 달아난다. 자식을 죽이고 나서 초반에 부부는 ‘자식을 죽였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낀다.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시간의 흐름 앞에서 부부는 점차 사실에 대해 무뎌진다. 자식을 죽였다는 명백한 사실이 존재하지만, 그 사실 앞에 느끼는 감정의 무게는 점점 가벼워지고 마는 것이다.삶이란 건 때때로 지나치게 진지하거나 지나치게 싱거운 면이 있다. 하루하루 버티면 한달이 되고 일 년이 된다. 그저 버티기만 하면 시간은 찌꺼기처럼 쌓여 인생이 된다. 현식과 은주에게도 삶은 이러한 존재였을까. 낯선 시골에 새롭게 정착한 부부는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삶을 마주한다. 자식들은 저 멀리 호주로 유학 보낸 상태고, 부부는 함께 있단 사실로 너무나도 완전하고 행복하다. 스스로 자기 최면에 빠진 것이다.두 딸과 함께하는 ‘가족’이란 이름의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현식과 은주 두 사람의 ‘우리’만 존재할 뿐이다. 극 후반에 이르러서는 우리의 개념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현식과 은주의 도피 장면에 나레이션처럼 깔리는 두 자녀의 목소리가 진정한 우리인걸까. 신에게 사죄하듯 미친 듯이 울고 미친 듯이 웃는 두 사람의 모습이 진정한 우리인걸까. 아니면 부족하지만 그래도 서로 살아있다는 사실만은 놓지 않고 살아가던 질곡의 나날들이 우리였던 걸까.‘우리가 아직 살아있네요’는 네 사람의 가족, 두 아이의 존재, 부부의 위태로움마저도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 놓고 다각도로 바라본다. 우리는, ‘우리’라는 이름 안에 너무 많거나 너무 단순한 담고 있다. ‘우리’의 무게가 무거웠더라면 현식과 은주는 어린 두 자녀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익숙함에 속아 소중한 ‘우리’의 가치를 잊고 살고 있다.[이다선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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