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올해의 작가상 - 백현진 [시각예술]

세상을 바로 본다는 것
글 입력 2017.11.12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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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되는 일반적인 것에 대하여]

‘실직, 폐업, 이혼, 부채, 자살‘
이 단어들을 본 적이 있다. 아니, 많이 봤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서 봤다. 티비에서, 교과서에 나온 ‘원미동 사람들’에서, 뉴스에서, 주변의 지인에게서 그리고 우리 부모님에게서.

하지만 흔하디흔한 저 단어들이 내 피부에 직접 닿은 적은 없다. 직장을 다니고 있고, 개업(開業)아나 결혼은 해본 적도 없고, 자살은 더욱 그렇다. 부채라면 아직 남아있는 학자금대출 정도랄까? 이유야 어찌 됐건 나에게 저 단어들은 흔히 관찰할 수 있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야기지만 결코 와 닿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다면 나와 상황이 비슷한 많은 사람에게 있어 백현진의 작품은 ‘어디서 보고 들어서 아는 누군가의 이야기’정도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시공간은 구경하러 온 수많은 사람들의 공감할 수 없는 일에 대한 심심한 위로로 가득 채워지겠지.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지만, 작가 역시 흔해 빠진 저 단어를 모두 경험하지는 못했다. 작가 인터뷰에서 언급한 것처럼, 주변에서 들리는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겪어본 적도 없는 ‘실직, 폐업, 이혼, 부채, 자살’에 대해 이야기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누군가의 애달픈 이야기로 당당하게 휴게실을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그 공간에 들어가면 알 수 있다. 이것은 비판이나 조롱, 동정의 어조가 아니다. 더욱이 공감하고, 위로하고, 아파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마치 신문기사처럼 일상을 기록한 것이다. 다만 어두운 부분을 외면하지 않은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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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게실]

#1
써니킴의 전시공간을 끝으로 왼쪽을 보면 박현진이라는 이름 석 자가 있다. 그리고 오른쪽을 보면 흰 벽에 락카로 ‘실직폐업이혼부채자살’이 겹쳐져 쓰여 있고, 밑으로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선반이 있고 그 옆에 가지런히 쌓인 식당용 검은 의자들이 있다. 커다란 나무문에는 ‘들어오시오, 당기시오, Pull’ 이라고 쓰여있다. 마치 들어오지 말라는 것처럼 쓰였다. 여기가 휴게실의 입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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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을 열면 암막이 보인다. 암막을 걷어내고 들어간 내부는 합판으로 이뤄져 있지만 생각보다 아늑했다. 전면에는 네온으로 ‘실직폐업이혼부채자살휴게실’이라고 쓰여있고, 양쪽 벽의 위쪽에 각각 4점씩 총 8점의 그림이 걸려있다. 그리고 그 밑으로 각종 물건들이 놓여있다. 특별할 것 없는 의자와 탁자, 신발, 마른 나뭇가지, 돌, 플라스틱 화분, 나무토막, 수납장 등. 때때로 무언가를 태운 흔적과 촛대, 향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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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 번이라도 노동자들의 휴게실에 가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안다. 네온과 그림만 빼면 그들의 휴게실이 꼭 이렇게 생겼다. 그리고 그들과 이야기해본 사람이라면 안다. 그들의 삶 속에 얼마나 많은 실직, 폐업, 이혼, 부채 그리고 자살이 담겨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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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림과 네온이 왜 있는지 생각해본다. 그리고 왜 이렇게 높게 걸려있는지 생각해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알 수 없다. 따지고 보면, 그것들이 있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냥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한다.


#5
이제 보니, 이 휴게실은 연극무대 같다. 책상 위에 시나리오가 있다. 종이를 펼치면 연극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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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람이 있다. 어렵게 취직을 했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실직했다. 어렵게 가게를 열었지만 폐업했다. 설상가상으로 이혼을 하게 됐다. 사람은 떠났지만, 부채는 남아있다. 그 사람의 친구는 누군가의 장례식장에 갔다 온다. 며칠 후 그 사람의 친구 중 한 명이 지금 내가 머무는 휴게실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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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

달빛 속에선 흑인 아이들도 파랗게 보이지. 너도 파랗구나. 이제 널 그렇게 불러야겠다. ‘블루’
-영화 문 라이트(moon light) 中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을 나누지 않고, 존재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 누군가의 아픔에 위로의 손짓을 건네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도 그들처럼 아플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이해해보는 것. 나는 이것이 연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백현진의 <실직폐업이혼부채자살 휴게실>이 그러했다.

비록 노동자들이 편하게 몸과 마음을 뉠 수 있는 휴게실은, 문밖에는 처절한 외침이 있고 안쪽으로는 특이할 것 없는 잡동사니가 널브러져 있는 환경, 딱 그 정도다. 만약 이곳이 하나의 단어로 가득 채워져 있다면, 아마 ‘현실’이겠지. 백현진은 이 공간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리고 여느 휴게실이 그러하듯 그림도 걸고 네온사인도 만들어 예쁘게 담아냈다. 이용하는 사람이 불편하지 않게 손상될 수 있는 그림과 네온을 위로 올렸다. 공간에 이름도 지어줬다. ‘실직폐업이혼부채자살휴게실’이라고.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많은 경우에 우리가 이 단어를 보고 할 말은 없다. 이야기를 통해서 들었고 추측할 뿐이니까. 만약 어떤 감정의 동요가 있었다면, 그것은 아마 연민일 것이다. 운 좋게도 이 단어들을 외면해왔던 우리가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같은 세상에 사는 사람으로서 가지는 감정.


[공정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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