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페미니즘책은 아니지만 지극히 페미니즘적인 책

글 입력 2017.11.03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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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철학사에 여성의 자리는 없었다.
여성 철학자는 ‘둥근 사각형’과 같은 형용모순처럼,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여성인 내게, ‘생각하는 여자’란 지극히 평범한 말이었다. 이제껏 끊임없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사유해왔고, 그것을 정리했으며, 나를 둘러싼 이들과 그것을 나누고, 고쳐나가는데 많은 시간을 쏟았다. 하여 ‘철학사’에서 여성의 자리가 없었다는 저자 김은주의 단호한 한마디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드는 건 당연했다. 나름대로 남성과 다르지 않은 교육을 받고 자라왔지만, 지금까지 읽었던 수많은 논문들과 저서들, 세상을 뒤바꿨던 이론들 모두가 대체로 남성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그간 몰랐다니. 아니, 몰랐다기보다는 교수, 학자, 철학자라는 단어의 몸통에는 여성이 아닌 남성의 얼굴이 얹어지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고 말하는 편이 더욱 적절할 것이다. 여성인 나조차도 말이다.
 
 처음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에 흥미를 느꼈던 건 순전히 6인의 여성 철학자를 소개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과연 책으로 소개될 철학자로 인정받을 만큼 대단한 여성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라는 정말 단순한 궁금증에서 비롯된 선택이었고 페미니즘과는 무관한 관심이었다. 하지만 이내 나는 여성이 철학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페미니즘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찬찬히 살펴보면,
타자는 아직 인간이 이해하고 설명할 수 없는 영역, 
인간적 지평 너머의 잉여 경험을 가리킨다.
러한 타자는 로고스가 설명하지 못하는,

그러나 거대한 힘을 가지는
괴물의 이미지로 세계에 등장한다.
유명한 신화들은 언제나 괴물을 목격하여
지혜를 얻은 자를 그린다.
 

 잠들기 전 몇 분은, 가장 은밀하면서 가장 나다울 수 있는 시간이다.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누워있다고 하더라도 막 잠들기 직전에는 모든 경계심과 긴장을 내려놓기 마련이다. 숨을 몰아쉬며 이불섶에 온 몸을 내맡긴 채, 자신의 무의식에 떠오르는 말을 어떠한 검열도 없이 둥둥 떠다니게 내버려 둔다. 바로 이 순간에, 책이 소개하는 6명의 생각하는 여성들은 자신을 싸매고 있는 ‘타자’의 허물을, 미지의 ‘괴물’로서의 자신을 떠올렸던 것이다. 때문에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는 것은 스스로를 타자로 인식했음을 의미하며, 이는 자괴감이나 절망감에 무기력해지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위치를 또렷이 파악하고 남성이 주도하는 세계 속에서 ‘타자’로서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시발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괴물이 라틴어 어원 monstrare(보여주다)에서 알 수 있듯, 타자, 괴물은 끝까지 감추어 질 수 없고, 나타난다. 사라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 동안 숨죽여왔던 수많은 타자들, 흑인, 장애인, 동성애자 등이 결국 세상 바깥으로 뛰쳐나와 온몸으로 그들의 존재를 백인, 비장애인, 이성애자에 의해서가 아닌 스스로가 직접 밝히고 설명했듯이, 여성도 마찬가지다. 여성 철학자들은 남성의 전유물인 사유와 철학을 여성의 것으로 옮겨오는 동시에 남성의 언어애서 벗어나 자신만의 언어로 그들은 괴물이 아님을 입증한다. 아니 어쩌면 ‘나는 괴물이 아니에요’보다 ‘나는 괴물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괴물이죠. 서로를 완벽히 이해하고 알 수는 없어요.’라고 주장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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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남성이 독차지 하고 있던 사유를 한다는 자체로, 사유는 곧 정체성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지기에, 페미니즘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지난한 사유의 결과물은 무엇인가? 프리뷰에서 철학자 개인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마쳤기 때문에, 이번엔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이들의 사상에 나의 이야기를 조금 덧붙여 보려 한다. (Preview 보러가기)





한나 아렌트(1906~1975, 독일)
 나는 나 자신에게 문젯거리가 되었다.
.

"자존심을 유지한다는 것은 물론
자신에게 말을 건다는 뜻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유를 하는 것이다.
전문적인 사유가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사유 말이다."


 문제거리로 자신을 인지하고 그런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사유한다. 한나 아렌트는 ‘사유’를 중시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양차대전을 경험하면서 그 누구보다도 독일 시민이자, 유대인이고, 여성이라는 스스로의 문제적 정체성을 분명히 인지했을 거라 예상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유대인이라서 공격을 받았다면,
그 사람은 유대인으로서 자신을 옹호해야 한다."

 철학자라는 남성적인 직업을 가졌다는 인터뷰어의 말에 자신은 철학자가 아니라고 답했다는 한나 아렌트처럼, 우리는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공격을 받았다면, 여성으로서 자신을 옹호해야 한다. 근본을 해결하지 못하면, 여성에 대한 폭력은 언제가 됐든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어있다.  따라서 이는 유난스러운 것이 아니며, 여성으로서의 당당함과 여성이 가진 위치에 대한 통찰력의 결과물이다.
 
 사유에 대한 고찰의 연장선상에서, 한나 아렌트는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이는 개념을 제시했다. 아이히만이 유대인 말살이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것은 남다른 악마성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생각 없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고력을 결여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한나 아렌트를 알아간다는 것은, 그가 평생에 걸쳐 수행한 정체성과 사유에 대한 ‘사유’의 결과물을, 다시금 사유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 『혁명론』, 『폭력론』, 『공화국의 위기』, 『정신의 삶』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1942~, 인도)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서발턴Subatern이란, 안토니오 그람시가 지배계층의 헤게모니에 종속되어 권력이 없는 하위계층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로, 스피박은 이들 중에서도 영국의 제국주의와 가부장제하에서 이중으로 억압되는 인도 여성의 목소리에 주목한다. 이러한 고민은 남편이 죽은 후 ‘스스로’ 뒤따라 목숨을 끊으려 장작더미에 오르는 인도의 사티 제도에서 시작되었다.

 사티는 영국의 식민지배 시기에 폐지되지만, 지배자인 영국의 입장에서 이는 ‘백인 남자가 황인 여자를 황인 남자에게서 구해주고 있다’는 문장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티를 여성의 선택에 의한 낭만적인 죽음으로 포장하며 사티의 폐지는 민족 전통 말살 정책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면 사티 제도에 대한 논쟁에서, 여성의 입장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이 지점이 바로 스피박의 시선이 가닿는 부분으로, 그는 ‘그래서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가 아니라 ‘말할 수 없는 환경과 조건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으로 귀결된다. 더불어 스피박은 서발턴의 목소리가 외부에 의한 ’재현‘으로는 대표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며, 여성이든, 성소수자든지 간에 모든 타자의 자존감을 한껏 드높이고 있는 것이다.

:) 『나는 자신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다른 세상에서』  『스피박의 대담』  『교육기계 안의 바깥에서』  『상상의 지도들』  『스피박 독본』  『포스트 식민 이성 비판』  『경계선 넘기』 『지구화 시대의 미학 교육』 『칼리를 위한 노래』(공저)



주디스 버틀러(1956~, 미국)
내가 겪는 어려움은 고집 때문도 아니고,
의지가 흐려져서 생기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이중적 진리에서 나온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걸 알았던 주디스 버틀러의 삶과 학문은 오롯이 스스로의 자아에 깊이 뿌리를 내린 채 이어져 온 듯하다. 주디스 버틀러는 남성과 여성, 이성애자와 동성애자와 같은 이분법적 사고를 해체하고자 했으며, 이는 진정한 ‘포스트 모더니즘’의 주창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욕망들을 제도 바깥에서, 사회로부터 벗어나서 충족시키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인정’받고자 했고, 이를 위해 개인의 정체성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닌 ‘규범’을 바꾸고자 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녀는 페미니즘이 이성애주의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수행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어떠한 행위는 특정 규범과 반복적인 습관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주장하는 등 오늘날 젠더 이론의 바탕이 되는 다양한 논리들을 제시하고 있다.

 현재 주디스 버틀러는 전 남편과 낳은 아이인 이삭과 오랜 시간 파트너로 지내온 브라운과 함께 살고 있다. 이삭에게 여자 둘이 부부인 가족이 이상하지 않느냐고 버틀러가 물었을 때 이삭은 “그건 저에게 이상하거나 어려운 게 아니고요, 진짜 어려운 건 집안에 두 명의 학자가 있다는 거예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녀의 담론이 옳았음을,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내재하고 있었음은 바로 이삭이 증명하는 게 아닐까.

:) 『젠더 트러블』,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안티고네의 주장』 『젠더 허물기』 『불확실한 삶』
『윤리적 폭력 비판』 『혐오 발언』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공저)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스피박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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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 J. 해러웨이(1944~미국)
"나는 사이보그가 되겠다.
사이보그 이미지는 우리에게 이원론의
미궁 밖으로 나가는 길을 암시할 수 있다.
나는 여신보다 차라리 사이보그가 되겠다."


 이 말에서 나는 불쾌감을 느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애매하지 않은가? 사이보그는 동물도 아니며, 완전한 의미의 인간도 아니다. 하지만 해러웨이가 원했던 건 이러한 모호성이었던 것 같다. 인간과 동물, 원시와 문명, 제1세계와 제3세계, 여성성과 남성성이라는 이분법을 타파하고자 했던 해러웨이에게 사이보그나 유인원, 앙코마우스(동물이면서 여성 유방 가짐)처럼 같이 이분법을 벗어난 존재들은 무엇보다도 가치가 있었다. 사이보그는 기계와 유기체의 잡종이자 괴물인 키메라였는데, 괴물 자체는 과거부터 존재했으나 해러웨이는 이들을 비정상적으로 보는 시각 자체를 부정하며 비정상과 정상의 경계를 거부했던 것이다.

 도나 해러웨이나 주디스 버틀러 같은 철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여전히 이분법에 취해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중도를 지향하는 정치인들은 회색분자라며 비난받기 일쑤이고,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자신만의 색깔이 없다는 뜻으로 직결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논의가 실패한 것일까? 오히려 이분법의 해체를 주장하는 이론들은 지금과 같은 때 더욱 빛을 발한다. 과학자이자 철학자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직업에서부터, 우리는 흥미를 가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 『영장류의 시각』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겸손한_목격자@제2의_천년.여성인간ⓒ_앙코마우스TM를_만나다』  「사이보그들을 위한 선언 : 1980년대의 과학, 기술, 그리고 사회주의적 페미니즘」



시몬 베유(1909~1943, 프랑스)
 우리 영혼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은
물리적인 중력의 법칙과 유사한
법칙들에 의해 지배된다.
우주를 통치하고 있는 빛과 중력이라는 힘처럼
이는 우리의 영혼을 지배한다.


 시몬 베유는 두 발로 나서서 고통을 찾아 헤매는 사람이었다. 꽤나 안정적인 가정환경에서 태어났음에도 직접 노동자가 되어 그들의 삶을 함께 공유하고, 스페인 내전과 반전운동을 전개하는 등 찾아서 고생을 하는 삶을 살았다. 세속에 찌든 내가 시몬 베유를 이해하기엔 솔직히 어려움이 있다. 어쩌면 시몬 베유는 비합리적이고, 이상적이고, 도태될 수밖에 없는 특성을 지닌 사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산다는 것을 중력에 빗대어 자신을 극단의 상황에 버려둠으로써 중력의 힘을 온 몸으로 체험하고자 했던 시몬 베유는 그 누구보다도 강하고, 실천적인 철학자였던 것이다.

:)  『중력과 은총』  『시몬 베유 노동일지』  『신을 기다리며』  『뿌리 내림』



쥘리아 크리스테바(1941~프랑스)

 6인의 철학자들 중 유일하게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이 바로 쥘리아 크리스테바였다. 비평에 대한 수업을 들으면서 그녀의 대표적인 개념인 상호텍스트성을 배운 적이 있다. 구 동구권인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서 태어난 쥘리아 크리스테바의 부모님은 모두 유대계로, 어머니는 자연과학계열 교수였으며 아버지는 의학 교육을 받았지만 교회 회계사였다고 한다. 어쩌면 그가 가진 이러한 배경 자체가 상호 텍스트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텍스트는 내부나 외부, 시작과 끝으로 나뉠 수 없으며 경계는 흐릿하고 독자와 생산자 사이에 끊임없는 상호작용이 이루어진다. 같은 맥락에서 사람도 마찬가지다. 쥘리아 크리스테바처럼 독특한 환경을 타고나지 않았다고 해도, 모든 사람들은 결국 수많은 요소들이 중첩된, 상호작용의 결과물이다. 그의 학문적 성과인 문학과 기호학, 정신분석학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일 또한 그렇다.

 경계에 놓여있으면서도 그 기반의 모호함과 희미함, 흔들림을 가감 없이 주장함으로써 쥘리아 크리스테바는 극단에 위치하는 아무개들보다도 훨씬 매력적이다.

:) 시적 언어의 혁명』  『미친 진실』  『공포의 권력』  『사랑의 역사』  『검은 태양』  『사무라이』  『노인과 늑대들』  『포세시옹, 소유라는 악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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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페미니즘 담론을 체계적으로 엮어놓은 것이 아니다. 한나 아렌트,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 주디스 버틀러, 도나J. 해러웨이, 시몬 베유, 쥘리아 크리스테바는 어쩌면 여성이라는 것 외에 공통점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을 정도로 개성 있고 독특한 인물들이다. 심지어는 여성에 무관심했다고 비판받는 한나 아렌트와 그저 고통 속에 살고자 했던 시몬 베유의 사상은 페미니즘과는 꽤나 거리가 있다.(이러한 견해는 오로지 본 저서에 근거하고 있다. 하지만 그래서 이 책은 지극히 페미니즘적이다. 어떠한 대상이 타자로 낙인찍힌다는 것은 곧 타자‘들’이 가진 다양성을 부정당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성스럽다’라는 단어가 폭력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이 내포하는 수많은 특성들, ‘차분하고, 소극적이며, 조용하고, 치마를 입고, 감성적인’으로 전 세계 인구의 반을 차지하는 엄청난 숫자의 여성들이 단일화되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는 그저 ‘여성 철학자’로 뭉뚱그려질 수 있는 위험성을 전혀 다른 철학자들을 있는 그대로 소개함으로써 은근히 깨뜨리고 있는 것이다. 해서 개인적으로 저자 김은주에 대해서 역시 존경을 표하는 바이다.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지은이 ㅣ 김은주
발행일 ㅣ 2017년 9월 8일 
쪽수 ㅣ 184p
출판사 ㅣ 봄알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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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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