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공.감.대] 공간03. 오늘의 여백, 오늘의 흔적: 덕수궁

글 입력 2017.03.25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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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쾌적한 날씨가 이어졌다. 정처 없이 걷기에 좋은 나날들이다. 창밖을 보면서 어딘가를 향해 훌쩍 떠나는 상상에 빠지기 쉬운 계절이라는 뜻이다. 해야 할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렇다. 딴판. 그래, 내 머리 속은 온통 이곳 생활과 관계없는 ‘딴판’들 투성이다. 그럴수록 자주 걸어줘야 한다. 몸을 움직이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스쳐 지나가는 공간들 속에서 장소와 일체감을 느껴야 한다. 그날의 날씨, 그날의 사람들, 그날의 평온, 그날의 서글픔, 그날의 거리, 그날의 음식들 하나하나에 섬세하게 관심을 기울이면서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는 존재의 하루가 이 쾌적한 공기보다 더 가벼워져서 어느 순간 펑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데, 봄을 타는 건지 외로움을 타는 건지 감정은 싱숭생숭한데 사고는 맹맹하여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러니, 걸어야 하지 않겠는가?





  서울, 하면 생각나는 것. 한강, 광화문 광장, 홍대 거리, 종로, 청계천 등등. 온갖 유행과 기술의 최첨단을 달리는 대도시이면서 사라진 왕조의 도읍지 흔적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곳이다.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지방인이었던 나에게 서울은 ‘좋은 대학들이 짱 많은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내가 이곳에 와서 대학을 다니고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고 꿈을 헤매며 깊은 애정과 지겨운 환멸감을 동시에 느끼면서 몇 년 동안이나 살게 될 줄은 그땐 알았겠나. 서울의 골목, 서울의 건물, 서울의 시장, 서울의 카페, 서울의 날씨, 서울의 하늘, 서울의 사람들. 거리로 나서는 순간 수많은 복잡한 존재와 공간들이 한데 뒤엉켜 숨결처럼 몰려온다. 이렇듯 문 밖을 나서기만 하면 수많은 생각과 감각들에 붙들려 잔뜩 위축되거나 심란해지는 쫄보인 내가 애정 하는 공간 중 하나는 ‘덕수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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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는 왕이 나들이 할 때 머무르는 별궁이었으나 선조 때에 보수하여 궁궐로 삼은 곳이다.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떠올리는 이미지는 고종 때에 세운 근대식 건물 ‘석조전’일 거다. 그러나 나는 유적지, 고적(古蹟)으로서 특색 있는 모습도 좋지만 계절별로 다른 덕수궁의 면모를 더 좋아한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덕수궁은 갈 때마다 내게 새로운 공간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흐린 날과 맑은 날의 차이, 오전과 오후의 차이, 함께 하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와 같은 사소한 차이로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 점도 있고, 친근한 감정들 이를테면 화목한 가족들을 볼 때라던가 단체로 나들이 나온 사람들의 밝은 표정을 볼 때의 평온한 느낌들을 새삼스럽게 마주하게 되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덕수궁은 바로 옆 서울 시청과 광화문 광장과는 사뭇 다른 공간감을 형성한다. 그 다름의 핵심은 ‘여백’일 거라 생각한다. 민주주의를 외치는 강렬한 구호들,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직장인들, 빌딩숲, 쨍한 깃발을 걸고 광장을 채우는 천막들. 그곳들의 특색도 분명하지만 대한문(덕수궁의 정문)으로 들어서면, 마치 다른 차원의 경계로 이동하는 것 같다. 드리워진 나무와 흙길 사이로 어린 아이들, 외국인들, 단체 관람객, 연인, 노부부, 홀로 온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위를 통과하는 느린 시간. 산책을 하거나 벤치에 앉아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 이상하리만치 새삼스럽고 특별하게 느껴진다. 정확하게 여기 이곳, 이 순간에 고여 있는 ‘우리’에 대해 마음과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때가 얼마나 자주 있겠는가.

  집회, 한복 이벤트, 맛집들, 데이트하기 좋은 곳들 덕분에 다양한 이유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특수한 이유 말고도 아주 사소한 기분들을 느끼기 위해 이곳을 찾아도 덕수궁은 만족스러운 공간이 되어준다. 오래된 건물들을 지탱하는 나뭇결에 대한 감각이 깨어나면서 덕수궁은 옛 도성의 기억과 흔적의 공간이자 동시에 생생한 오늘의 현장이 된다. 이곳의 돌담길이 매력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성을 둘러싼 담을 따라 걷다 보면 또 수많은 광경들이 속속히 펼쳐지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사진을 찍고, 누군가는 줄을 서서 와플을 기다리고, 누군가는 버스킹 공연을 하고, 누군가는 그저 걷고, 누군가는 혼자이고, 누군가는 아이와 함께 아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고, 누군가는 춤을 추고, 누군가는 <광화문연가>를 떠올리고, 누군가는 몰래 예술작품을 설치해 놓는다. 고궁이라는 공간이 형성하는 특별한 현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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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을 한 바퀴 쭉 둘러보다가 다시 대한문 앞으로 돌아와 섰을 때 나는 종종 묘한 느낌을 받곤 한다. 고궁의 아우라와 대한문 그리고 그 앞으로 펼쳐지는 높은 건물들과 바쁜 사람들의 걸음걸이. 그것을 나누는 경계가 무엇일까. 왜 우리는 어떤 곳에서는 그토록 느슨해져도 되는 것이고 어떤 곳에서는 그토록 꼿꼿해져야만 하는 걸까. 다른 시공간이 충돌하는 지점 같단 생각이 들었다. 미래의 고궁은 오늘 스치고 머물렀던 모든 사람들의 흔적이 중첩되고 깊이 스며서 더 유서 깊은 곳이 될 것이다. 끝으로, 지나가던 아무개 연인을 놓치지 않고 로맨틱한 재즈 연주를 해주던 Frank에게 꿈 같은 순간을 선사해줘서 정말 감사하다고 인사를 전한다.


[김해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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