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가 가장 나다울 수 있는 순간을 향해 - 쇼맨: 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 배우 [공연]

"인생은 내 키만큼 깊은 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글 입력 2023.11.06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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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띵하다”


 

때로 좋은 작품을 보고 나오면, “띵하다”라는 말로 그 모든 감상을 축약해 버리고 말았다. 나에게 소위 “띵작”인데, 왜 이 작품이 나를 띵하게 만들었는지 생각하는 과정은 피곤하게만 느껴졌다. 나를 울리고 내 속내를 복잡하게 헝클여 놓았다는 것은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렸다는 뜻일텐데.

 

더듬거리며 나를 되짚어가야 하는, 결국 얄팍한 내가 드러나고 마는 이 과정은 피곤하고 부끄러우며 어려워서 피하고 싶었다. 나중엔 이게 좋았다는 말조차 하기 어려웠다. 왜 좋았는지 잘 기억나지 않고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느꼈다. 아, 나 여기서 멈춰버렸구나. 굳어버렸구나.


 

‘띵하다.’란 말과 감탄에 사고를 멈추지 마시고, 자신이 왜 그렇게 느꼈는지 생각 또 생각하시고 생각하기를 포기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란 말이 있습니다. 단어 하나로 모든 걸 뭉뚱그리지 마셨으면 합니다. 오히려 단어가 가진 감정에 지배당하고 먹힙니다. 상황에 맞는 단어의 사용과 배움, 그리고 사고하는 힘은 여러분의 세상을 더 넓힐 것이고, 여러분만의 가치관을 형성하여 고해의 세상을 견디는 방어구가 되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비나리, <유색의 멜랑콜리> 작가 후기 중)

 


어떤 만남은 나를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든다. 상실과 작별은 만남을 빛내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작별하는 순간, 멀어지는 순간까지 소중하다. 그 모든 것이 모여 나를 이루기 때문이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작품과 윗글은 나에게 이전의 나와의 작별을, 그리고 다른 나와의 만남을 마음 깊이 아낄 수 있게 해주었다. 여기서 멈추고, 굳지 않기 위해 또 돌아보기 위해, 나를 비춰준 거울 같은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다. 

 

 


시놉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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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미국 뉴저지주 어느 소도시.

 

대형마트 직원으로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는 한국계 입양아 출신 수아는 유일한 취미인 유원지 구경을 하던 중 회전목마를 타고 나타난 수상한 노인 네불라를 만난다. 수아를 사진작가로 오해한 네불라는 그녀에게 촬영을 의뢰하고, 수아는 대충 찍고 공돈이나 벌 생각에 흔쾌히 의뢰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수아의 예상과 달리 네불라는 진짜 자신의 모습을 남기고 싶다며 혼신의 힘을 다해 지난 인생 역정을 털어놓는다. 그 모습이 부담스럽다 못해 징그럽기까지 한 수아는 어쩔 줄을 모르는데…


과연 수아는 극도의 거북함을 무릅쓰고 무사히 촬영을 마칠 수 있을까? 또한 처절하리만큼 인생 사진에 집착하는 네불라의 진짜 속내는 무엇일까?


 

 

서로를 바라보고, 비춰주며 


 

뮤지컬 <쇼맨: 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 배우>은 서사적으로도 연출적으로도 패러디를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패러디란 무언가를 흉내 내는 것이다. 패러디는 그 자체로 원본―오리지널을 전제하고 만들어지며, 원본을 번형하고 모방함으로써 원본을 유희 혹은 희화화할 수 있다. 여기서 권력에 저항적 효과가 발생한다.

 

 

[크기변환]KakaoTalk_20231102_131823397.jpg

 

 

네불라의 삶은 패러디의 연속이었다.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족들의 모습을 패러디하면서 분위기를 띄우고, 연극에서는 자신의 연기를 하지 못해 다른 동료 배우들을 따라 한다.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 배우로서, 그의 ‘의복’으로서 독재자가 그려낸 모습을 패러디하고, 에서 독재자를 우스꽝스럽게 희화화한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남기기 위해 수아와 찰영을 하면서 자신의 삶을 되짚어 가며 스스로를 패러디한다.


비주체적으로 살던 네불라가 비로소 자신의 연기를 할 수 있게 된 건, 독재자를 희화화하는 순간부터다. “여러분 여기 좀 보세요/이곳에 바보가 있어요/다 함께 비웃어 주세요.” 독재자의 죽음을 우스꽝스럽게 재현하는 이 쇼는, 원본의 권위를 무너트리는 동시에, 그에게 편승한 자신에 대한 자학이자 징벌, 책임을 지려는 행위이자 내면의 죄책감을 해소하려는 자기 위로의 한 형태이다.


수아가 사진을 촬영하고, 네불라가 자신의 사진을 남기려는 행위 역시 일종의 패러디로 볼 수 있다. 카메라는 원본을 정확히 재현해 내는 동시에 사진 찍는 사람의 피사체를 향한 감정과 시선까지 반영할 수 있다. 이때 카메라에 찍힌 대상은 피사체 원본과 같고 피사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게 피사체의 전부라고는 할 수 없다. 수아는 자신을 판단해달라는 네불라에게 사진을 건네며 자신이 본 네불라의 모습을 흉내 낸다.

 

이 패러디는 원본을 전제하지만, 동시에 패러디의 모든 양상 전부가 원본이 될 수 없다. “마지막 촬영이 끝났을 때는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은, 비겁하고, 구질구질한 바보였어요. 그리고 지금은... 저한텐 이렇게 많은 네불라가 있어요. 하지만 어떤 것도 네불라가 바라는 답은 아닐 거예요. 그걸 말할 수 있는 건 제가 아니니까요.”


 

인생은 내 키만큼 깊은 바다

파도는 계속 쉼 없이 밀려오는데

나는 헤엄칠 줄을 몰라

제자리에 서서 뛰어오른다

 

가끔은 저 파도가 너무 거세

뛰어오를 힘조차 없을 때에는

길게 숨을 들이마신 채

바닷속에 잠겨 숨을 참는다

 

다시 파도가 잠잠해질 때까지

다시 올라갈 힘이 생길 때까지

 

 

결국 우리는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나와 타인 사이에 선을 긋기에 우리는 너무 닮았으며 한편으로는 너무 다르다.

 

인생은 작중 가사처럼 “내 키만큼 깊은 바다”라서, 남이 보기엔 별 것 아닐 수 있거나 너무 위대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결국 그 인생을 살아가는 주체는 나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바닷속에서 발버둥 치고 뛰어오르며 안간힘을 쓸 수밖에 없다.

 

바다는 늘 변칙적이고 한 치 앞도 알 수 없어서 우리는 결국 휩쓸리고 가라앉다 다시 헤엄치기를 반복한다. 피로하고 지치는, 주체성을 잃게 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우리는 서로를 거울삼아 자신을 비추고 당신을 바라보며 주체로서의 우리를 되찾을 수 있는 것 아닐까.

 

그 과정에서 타인에게 귀 기울이고 나를 되돌아보며 함께 살아가야 한다고 이 작품은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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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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