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오래된 시집에 먼지를 털자 - 시집추천 [문학]

글 입력 2015.03.22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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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이라는 게, 참 묘하다. 꽤나 열심히 읽은 것 같은데도, 매해 다시 책장을 다시 펴면 영 문장들이 생경하게 다가오는 걸 보면. 한 권의 소설을 읽으면 소설은 그 하나의 이야기로 남아 다시 읽어도 그때의 그 감정 그대로 잔존하는데, 시집은 이상하게 손바닥 위에 드리운 햇살처럼 자꾸 손바닥을 빠져나간다. 그때의 햇살이 지금의 햇살과 전혀 다른 것처럼, 다시 읽어보는 문장은 참 낯설고 다르다. 다른 책은 몰라도 시집은 아무래도 사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마주하는 시집의 낯설음에는 그날의 기분이며, 날씨도 참견을 하고 끼어드니 참 재밌다. 어느 외국시인이 “나는 세상의 책을 다 읽었다.”고 이야기한 것이 허풍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한 권의 시집이 담고 있는 세계가 만권의 책이 담고 있는 세계만큼 넓을 수 있기 때문일 테다.


그런 연유로, 오랫동안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책장에 꽂혀있던 시집에 먼지를 털었다. 책등에 적힌 ‘2005’, ‘2008’이라는 글씨가 약간은 먹먹해서, 그 중 가장 낯설게 읽히는 두 권의 시집을 뽑아보았다. 오랜만에 연락하는 일이 쑥스러워도, 막상 연락하고 나면 그래도 오래된 친구만큼 좋은 친구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묵혀둔 시집이, 참 그렇게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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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성,『아라리』, 랜덤하우스, 2008



시집으로부터 빈 바닥 긁는 소리가 난다고 해도 좋은 걸까. 김진성의 아라리를 읽으면 텅 빈 슬픔의 밑바닥을 긁는 소리가, 저 깊은 갱도를 밑에서부터 차게 울리며 들려온다. 끝이 보이지 않는 갱도 밑을 들여다 볼 때, ‘꽃다발처럼 어두운 솜사탕을 들고’ 있는 남자가 보인다. ‘동백꽃이 무너진 자리’에 ‘침묵까지 먹어버리고’ 죽어버리는 남자가, ‘아버지가 자꾸만 호수로 던져넣은 그물을 헤치고 대청호로 헤엄쳐’간다. 그 자리에 ‘나무인지 쇠기둥인지 검은 물체가, 남은 빛을 빨아먹고 더 어두워’진다. 그가 내려놓는 시어들이 참 무겁고 먹먹하다. 우물의 밑바닥을 핥는 슬픔을 우리는 간음할 수 있을까. 그 앞에 어떤 긴 말을 내려놓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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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거인』,랜덤하우스, 2005



개념들이 뒤엉킨다. 김언의 시에 대해 감히 직선의 시라는 말을 던져본다. 그가 시집을 읽는 이들을 던져놓는 세계는 어디까지나 확실한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안에서 그 어느 것도 확신되는 것은 없다. 명확한 세계에 모든 것이 불명확하다.


‘빵과 우유가 나왔다/ 자유는 나중에 나왔다 … 단어 하나가 조금 더 외로워지면 좋겠다’ 


말하자면 그의 시편은, ‘벽돌로 쌓아올린 담장 뒤에 숨은 암시를 감추어둘 수도 있다.’는 그의 시 한 문장과 참으로 닮아있다. 어떤 시가 좋은 시이냐 무엇이냐 물었을 때 그에 대한 견해는 각자의 몫이겠지만, 나의 견해는 한 편의 시가 그 시를 읽는 독자로 하여금 던져놓은 세계에 대해 어떤 의심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시가 훌륭한 시라고 생각한다. 이 참으로 생경하고 낯선 세계에 번쩍 놓인 우리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 세계를 인정해버리게 하는 일. 김언의 벽돌보다 단단한 선언이 지니는 힘이다. ‘죽기 전의 그림자는 딱딱하여라’, ‘나는 모든 사람들을 대표해서 입을 다물 수도 있다.’, ‘우리는 어떤 것도 말해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단단한 선언의 그림자에는 도무지 확신되지 않는, 그렇다 할 수 없는 암시들이 몰아쳐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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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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