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을 찾아 떠나는 여행 :: 그을린 사랑

글 입력 2014.12.15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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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그을린 사랑>레바논 전쟁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윤리적으로 거북 할 수 있는 소재인 근친상간의 내용을 품고 있지만, 끔찍한 진실 앞에서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 현실을 그리고 있다. 충격적인 진실 앞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무엇일까?


* 연극 <그을린 사랑>과 영화 <그을린 사랑>과 비교 분석

영화 <그을린 사랑>은 연극 <그을린 사랑>과 비슷하게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순서도 비슷하고, 내용도 크게 다른 점이 없다.

그러나 영화 <그을린 사랑>은 영화 매체의 특성을 고려, 철저히 사실적 이미지와 장면들, 미쟝센으로 구현되었다. 나왈이 과외 선생으로 위장해 기독교계 지도자를 암살하는데 성공하는 장면을 영화는 시간적 순서로, 사실적 이미지를 전달한다. 그러나 연극 <그을린 사랑>에서는 나왈이 살인하는 장면을 나왈의 대사와 두발의 총소리 효과로 나타낸다.

또 기독교 민병대에 곧바로 체포된 나왈이 악명 높은 교도소에 수감되고 고문 기술자 아부 타렉에 의해 매일같이 강간 고문을 당하고 두 아이를 낳는 장면 역시 사실적 이미지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연극에서는 역시 주변 인물들의 대사로 처리 된다.

모든 것을 실제 이미지로 다 보여줄 수 있는 영화에 비해 연극은 특정 무대라는 제한된 시공간에서 한정된 관객들을 대상으로 보여진다. 그렇기 때문에 연극 <그을린 사랑>은 가능한 모든 사건들이 등장인물들의 대사로 전개되며, 세밀하게 고려된 음악과 음향들이 사건들의 분위기 파악을 돕는다.

하지만, 이러한 충격적인 장면을 연극에서 대사로 처리함으로 인해 시각적 이미지로 전달 된 영화보단 충격은 덜했다. 그 덕분에 영화에서는 전쟁이라는 비극적 사건으로 인해 얼룩진 나왈의 삶에 주목하게 된다. 버스 학살사건, 기독교계 정치 지도자 암살사건, 끔찍한 정치범 수용소 등 여성, 한 인간의 삶이 이렇게 기구할 수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연극에서는 진실을 밝혀가는 쌍둥이들의 시점에서 그들이 받을 충격과, 각 인물들의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 운명이 부각된다. 또 대사로 처리된 생략된 장면들의 관객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여운이 된다. 영화는 이야기에 주목했다면, 연극에선 인물들의 독백과 대사들로 인해 인물들의 감정에 주목한다.

연극 <그을린 사랑>은 말의 연극이다. 말이 행동이자 사건을 이루는 것으로 그리스 비극의 형태와 구조에 큰 근원을 두고 있다 즉, 가장 연극적인 연극이라는 게 이 작품의 특징이다. 영화는 사실적으로 사건 배경을 보여주지만 연극은 말의 힘으로 보여주고 들려준다. 그것이 연극의 본질적인 힘이고 영화와 가장 다른 점이다. 같은 내용이더라도 연극과 영화가 주는 효과는 다르다. 어떤 것이 좋은지는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두 장르 모두 각각의 매력을 지니고 있는 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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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오이디푸스 왕>과 비교 분석

연극 <오이디푸스 왕>과 연극 <그을린 사랑>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숨겨진 진실이 하나씩 밝혀진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근친상간을 할 저주 받은 운명으로 태어난다. 오이디푸스가 왕이 되고, 역병이 돌면서 사람들이 죽는다. 신들은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근친상간을 했기 때문에 내린 저주라라고 알려준다. 오이디푸스는 이런 파렴치한 사람을 잡기위해 수사에 착수한다. 그리고 숨겨졌던 진실이 하나씩 밝혀진다.

둘째,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품 현명함으로 시민들에게 환영 받고, <그을린 사랑>에서 나왈은 부족의 금기를 깨고 여자로서 글자를 깨우침으로 인해 주변에 부러움을 산다. 하지만 이 둘의 총명함과, 지식이 오히려 이들에게는 독이 된다는게 공통점이다.

셋째, 두 인물다 근친상간을 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어머니와 관계를 가지고, 나왈은 자신의 아들과 관계를 가진다. 그리고 이 두 작품에서 어머니라는 존재가 먼저 근친상간을 알아차린다.

그러나 연극 <오이디푸스 왕>과 연극 <그을린 사랑>은 차이점도 있다. 오이디푸스가 우발적으로 아버지를 살해했다면, 나왈은 자발적으로 살인을 선택한다. 또 오이디푸스에게 자식은 축복이였지만, 강간을 당해서 가진 나왈의 자식을 저주의 상징물이다.

또 오이디푸스와 나왈은 진실과 마주했을 때 취하는 행동에 차이를 가지고 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총명함을 믿고 진실을 알려하기를 그만두라는 테이레시아스의 말을 무시하고 끝까지 수사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진실을 마주했을 때 현실을 저주하여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된다. 그것은 신들에 대해 그가 할 수 있었던 항의이자 저항의 표시이다. 그리고 자신의 자유 의지로 결정한 일에 대해 조금의 뉘우침이 없다. 반면 나왈은 저주스러운 자신의 운명을 알게 되었을 때 일단 침묵에 잠긴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스러운 아이들에게 진실을 알려주려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나왈은 자신의 비극적 운명에 대해서 원망을 하진 않는다. 그저 침묵을 지키면서 자식들이 존재의 근원을 찾을 것을 강요한다. 이것은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진실이 무지에서 오는 거짓된 행복보다 낫다는 판단하게 나온 결과이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사회 전체를 위기에 빠트린 것은 오이디푸스의 죄악 때문이다. 그리고 오이디푸스가 벌을 받음으로써 저주는 끝이 난다. 하지만 <그을린 사랑>에선 이미 나왈이 태어난 사회에는 불행의 사회였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나왈의 운명은 철저하게 짓밟힌다.

두 극은 공통점과 차이점을 지니고 있지만, 나왈이 당하는 불행은 신화가 아니라 현실이기에 더 끔찍하게 다가온다. 진실을 마주했을 때의 취하는 방법이 두 극의 주인공들은 서로 다르다. 각자의 방법으로 진실을 받아드렸지만, 어떠한 태도가 옳은 것일까? 결국 우리도 진실의 앞에서 침묵하게 될까? 아니면 오이디푸스처럼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면서 두 눈을 멀게 할까? 태어날 때부터 비극적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오이디푸스, 그러나 그는 신분적으로 왕이었고, 진실을 알기위해 주변의 만류에도 불과하고 거만하게 끝까지 파해친다. 하지만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기구한 삶을 살게 된 나왈, 그의 신분은 미천했고 여성이라는 점에서 힘든 삶을 산다. 그녀가 겨우 지식에 눈떴을 때 그는 비극을 불러온 셈이다. 그렇게 때문에 그녀에게 더 안쓰러움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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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그을린 사랑> 상징과 의의

1+1=1 이것이 이 극의 가장 큰 상징이 아닐까 싶다. 오이디푸스와 비슷한 맥락을 따르고 있는 이 극은 그토록 갈망하며 찾던 두 명의 인물이 결국은 하나인 것으로 밝혀진다. 수학적으로 1+1=1이 될 수 있음을 잔느가 증명하는 대사는 감명 깊었다.

복수가 복수를 부른다. 복수의 끝에는 다른 복수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극에서 나왈은 스스로 침묵이 아닌 선택, 즉 화해의 유언을 남긴다. 시대적 상황을 원망하지도, 어떠한 인물을 미워하지도 않는다. 비극적 운명의 굴레에 나왈은 괴로움에 침묵하지만 결국은 화해를 선택한다. 쌍둥이인 잔느시몽이 찾아 떠나는 나왈의 과거, 그 속에서 밝혀지는 자신들의 근원, 믿을 수 없는 진실 앞에서 그들은 침묵하지 않는다. ‘레바논 전쟁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 전쟁이 주는 비극의 참담을 그리고 있지 않다. 진실에 눈을 뜨는 순간 나왈은 침묵고하고, ‘니와드역시 침묵의 길을 걷는다. 주인공들은 침묵 속에서 조용히 침묵의 소리를 듣는다. 이 작품은 진실을 숨기고 있던 모든 장벽을 걷어낸다. 그리고 그 진실을 마주했을 때 침묵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같은 복수극이 아님에도 충분히 희곡으로써의 갈등구조를 잘 품고 있다. 충격적 진실을 숨기고 있는 이 작품을 시적인 언어로 섬세하게 표현했기 때문에, 연극이 끝난 후 많은 관객들이 눈물을 흘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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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극을 보기 전에 영화를 먼저 봤다면 나에게 이 극을 감상하는데 방해를 줬을 것 같다. 시각적 이미지를 사실적으로 전달해주는 영화보다, 대사로 통해 전달되는 연극의 방식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대사로인해 그 장면들이 내 머릿속에 더 끔찍하게 그려졌고, 그렇게 때문에 그들의 삶의 비극적 운명과 마주하게 된 진실 앞에서 주인공들처럼 나 역시 울 수밖에 없었다.

연극이 끝나고 다음날 바로 영화를 찾아서 다운받아 봤지만, 영화에서는 전쟁의 상흔과 시대적 배경, 그리고 나왈이라는 여자의 운명과 충격적 반전만이 기억에 남았다. 하지만 연극에서는 쌍둥이들이 진실을 찾는 과정과 그 안에 각 인물들이 그렇게 밖에 할 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된 운명을 생각해보게 된다. 영화에서는 ‘니와드’ 라는 인물에 대해서 크게 느낄 수 있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연극에서는 ‘니와드’라는 인물이 기억에 가장 남았다. 나왈 역시 기구한 삶을 살았지만 ‘니와드’라는 인물 역시 기구한 삶을 살았다. 함께 있다는 것보다 아름다운 일은 없다고 한 나왈의 말과 다르게 ‘니와드’는 혼자이니 가장 외로운 인물일 것이다.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빚어진 비극이고, 그 비극 안에서 각각의 인물들의 상처를 느낄 수 있었다.

이 극을 통해 ‘앎’이란 어떤 것일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나왈에게 ‘앎’이란 자신의 비극정 운명을 자처하는 일이었다. 글을 몰랐더라면, 전쟁에 가담하지 않았을테고, 그렇더라면 근친상간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쌍둥이들에게 역시 ‘앎’이란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됨과 동시에 비극적 진실과 마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극적 진실을 파해치는 행위인 ‘앎’을 ‘앎’이라는 덕목의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주었다. 앎으로 인해 불행을 마주하는 것이 무지해서 행복한 것보다 더 아름답다.

숨겨진 진실을 찾아가는 연극 <그을린 사랑>은 가려진 진실의 장벽을 걷어 낼 때마다 보이는 끔찍한 진실에 관객을 긴장하게 한다. 그리고 그 끔찍한 진실 앞에 모두가 침묵하고 침묵에 소리를 듣는 순간 더 이상 복수를 부르지 않고 어느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 아름다운 진실이 된다.

 


[설정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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