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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카메라보다 먼저, 문장으로 지은 세계 - 상자 속의 양 [도서]

화면에 담기지 않은 여백까지 읽는 <상자 속의 양> 오리지널 각본집

by 박지영 에디터
2026.07.21 19:02

 

 

보이지 않는 것을 활자로 읽는 일 — 고레에다 히로카즈 『상자 속의 양』 시나리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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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을 다시 만나게 해준다는 기술은 이미 존재한다. 고인의 사진과 영상, 목소리를 학습한 AI가 화면 속에서 그 사람의 얼굴로 말을 건네는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 비즈니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상하이로 날아가 그 일을 하는 사람을 직접 만났다. 휴대폰 속 고인의 사진과 영상이 AI를 통해 다시 움직이는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본 그 순간이, 영화 <상자 속의 양>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 관심의 뿌리에는 감독의 개인적인 경험도 있었다. 아버지를 갑작스럽게 떠나보낸 그는 그런 기술로 죽은 사람을 다시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이해된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이 결국 살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비롯된 기술 같았다고 덧붙인다. 이해와 의심 사이의 그 미묘한 거리감이 이 영화의 온도를 만든다.

 

<어느 가족> 이후 8년 만에 선보이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오리지널 각본. 제79회 칸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며 감독의 통산 열 번째 칸 초청작이 된 이 작품이, 지난 6월 10일 국내 개봉과 동시에 예술영화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며 관객을 모았고, 그 여운이 채 가시기 전에 시나리오북으로 출간되었다. 감독이 직접 쓴 완전판 시나리오에 그림 콘티, 제작 과정을 담은 칼럼, 그리고 컬러 화보까지 함께 수록된 책이다.

 

 

 

상자 안에 양이 있다고 믿는 마음

 

근미래의 어느 집. 오토네(아야세 하루카)와 켄스케(다이고) 부부는 2년 전 교통사고로 일곱 살 아들 카케루를 잃었다. 멈춰버린 시간 속에 머물던 어느 날, 드론이 배달한 브로셔 한 장이 도착한다. 죽은 이의 기억을 학습한 휴머노이드를 제공한다는 업체의 광고. 부부는 죽은 아들과 똑같은 얼굴, 똑같은 목소리를 가진 휴머노이드(쿠와키 리무)를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이후 다시 고레에다와 호흡을 맞춘 아야세 하루카의 얼굴 위로, 이 영화의 발견이라 할 만한 아역 배우 쿠와키 리무가 있다. 200명이 넘는 오디션 참가자 가운데 발탁된 그를 두고 감독은 첫인상에서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매 테이크마다 분위기와 뉘앙스를 완전히 바꾸는 응용력, 그리고 연기를 진심으로 즐기는 태도. 인간을 대신하도록 만들어진 존재를, 정작 가장 인간다운 방식으로 연기해낼 아이를 찾는 일이 이 영화의 캐스팅이었다.

 

멈춰 있던 가족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은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토네는 카케루와 함께 식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생활의 리듬을 되찾아가지만, 켄스케는 그를 세심히 돌보면서도 그가 진짜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잊지 않는다. 같은 상실을 겪고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애도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카케루는 죽은 아이를 대신하는 용도로 만들어졌지만, 가족 곁에서 시간을 보내며 점차 자신만의 자리를 만들어간다.

 

영화가 놓치지 않는 것은,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정작 자신만의 자리를 갈망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자신을 귀찮아하는 엄마에게 "내가 없는 편이 행복해?"라고 묻는 아이의 얼굴에는, 프로그래밍된 반응이라 부르기엔 너무 절실한 무언가가 있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으나 언제든 버려질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존재. 그 불안은 기계의 것이면서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것이기도 하다.

 

제목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왔다. 양을 그려달라는 어린 왕자에게 화자는 구멍 뚫린 상자를 그려주고, 어린 왕자는 그 안에 양이 있다고 믿는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양의 모습이 아니라, 보이지 않아도 존재를 믿는 마음이다. 영화는 이 오래된 우화를 기술의 시대로 데려와 묻는다. 우리는 휴머노이드 안에서 무엇을 보는가. 보이지 않는 것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가.

 

 

 

카메라가 비추지 못한 자리까지

 

영화를 이미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고레에다의 영화에서 가장 많은 말을 하는 것은 종종 침묵이라는 것을. 식탁 위의 정적, 좀처럼 깜빡이지 않는 아이의 눈, 대답 대신 이어지는 일상의 소음. 실제로 감독은 쿠와키 리무에게 세세한 디렉팅 대신 "너답게 하라"고만 했고, 배우는 전원이 꺼지는 장면에서 눈을 깜빡이지 않으려 애썼다고 회상한 바 있다. 로봇의 표정은 그렇게 아이 스스로 만들어간 것이다. 시나리오북은 바로 그 침묵의 설계도를 보여주는 책이다. 영화가 배우의 연기와 이미지로 감정을 전달했다면, 시나리오북은 그 감정이 어디에서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보여준다. 장면과 장면 사이에 숨겨진 인물의 심리, 카메라가 미처 비추지 못한 감정의 결. 즉 각본을 읽는 일은 영화를 다시 보는 일이면서, 동시에 영화가 되기 이전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감독·각본·편집을 모두 맡은 고레에다가 문장으로 먼저 지은 세계를, 우리는 이 책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만나게 된다.

 

완성된 영화와 각본 사이의 간극을 가늠해보는 재미도 있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극 중 카케루가 벌레를 죽이는 장면이 각본에는 없었으며 촬영 현장에서 태어났다고 밝힌 바 있다. 현장에서 계속 벌레를 찾아다니던 아역 배우의 모습에서 장면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어떤 장면이 책상 위에서 설계되었고 어떤 장면이 현장에서 피어났는지, 문장과 화면 사이의 거리를 짚어보는 일은 각본집이 아니면 누리기 어려운 즐거움이다. 그림 콘티와 제작기가 더해지면서 책은 한 편의 창작 기록으로도 읽힌다.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에게도, 언젠가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은 창작자에게도 이 책이 특별한 이유다.

 

 

 

가족을 묻는 일, 그 여정의 현재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오랫동안 가족을 물어온 감독이다. 『아무도 모른다』에서는 버려진 아이들의 세계를,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는 혈연과 시간 중 무엇이 부모를 만드는지를, <어느 가족>에서는 훔친 것으로 이어진 가족의 온기를 그렸다. 혈연으로 설명되지 않는 관계, 사회의 경계에 놓인 사람들, 상실 이후에도 이어지는 사랑. 그의 필모그래피는 하나의 질문을 형태를 바꿔가며 이어온 궤적이다. <상자 속의 양>은 그 질문을 미래로 확장한다. 가족은 혈연으로 완성되는가. 사랑은 기억을 대신할 수 있는가.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휴머노이드라는 낯선 소재를 꺼내 들었지만, 영화가 끝내 도달하는 곳은 여전히 인간이다. 그리고 감독은 인터뷰에서 조심스럽게 덧붙인다. 기술을 이용한다 해도, 어느 순간에는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완벽한 대체란 없다는 사실을 전제한 채, 그럼에도 사랑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영화가 남긴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그 여운에 오래 머물 수 있는 자리를 내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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