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푸른 바다를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검은 빗방울이 입안으로 떨어졌다. 뚝. 뚝. 뚝.
내레이션과 함께 스쳐 지나가는 사진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지워져 있다. 그들은 살아 있는 사람인지, 죽은 사람인지조차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얼굴이 사라진 순간, 그들은 더 이상 한 명의 개인이 아니라 기록되고 분류되는 존재가 된다.
낯선 풍경이지만, 이상하게도 익숙하다. 코로나19 시기 우리는 매일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를 확인했지만 그 숫자 속 얼굴을 상상하지는 못했다. 기후 위기와 전쟁, 재난 역시 마찬가지다. 뉴스는 사람보다 숫자를 먼저 보여주고, 사회는 개인보다 집단을 먼저 호명한다.
그렇게 인간은 어느 순간 이름을 잃고, 얼굴을 잃고, 결국 인간성을 잃는다.

박세영 감독의 <지느러미>는 근미래 디스토피아 SF를 다룬다. 감독은 팬데믹 초기 할머니를 제대로 장례 치르지 못한 경험에서 영화가 출발했다고 밝혔다. 감염 우려 때문에 전통적인 장례 절차를 수행할 수 없었고, 가족들 역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슬픔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며 이 작품을 구상했다고 한다. 결국 <지느러미>는 인간성을 잃어버린 존재들과, 그들을 애도하는 방식마저 사라진 시대를 기록한다.
영화의 배경은 ‘통일 대한민국’이라는 낯설면서도 기이한 미래다. 오염된 바다에는 인간과 물고기가 뒤섞인 돌연변이 ‘오메가’가 살아가며, 그들은 인간 대신 오염된 바다를 청소하는 노동을 수행한다. 그들은 인간 사회로부터 철저히 격리되고 혐오의 대상이 된다. 실내 낚시터에서 일하는 미아는 죽은 아버지의 마지막 부탁을 전하기 위해 도시를 찾아온 오메가와 마주하게 되고, 오메가 관리국 신입 직원 수진 역시 그들을 감시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믿어왔던 세계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세 사람의 시선은 서로 다른 위치에서 같은 질문을 향한다. 인간은 무엇으로 인간일 수 있는가.
이 영화는 어떠한 감정을 밀어붙이기보다 설명을 최소화하고 감각적으로 느끼게 만든다. 세계관 역시 친절하지 않다. 오메가는 무엇인지, 왜 이런 사회가 되었는지, 국가가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해 정보는 조각처럼 흩어진다. 반으로 갈라진 사회, 혐오를 부추기는 선전물, 찬반 시위가 충돌하는 거리, 콘크리트로 뒤덮인 회색 도시.
우리는 공간과 소리, 질감과 움직임만으로 그 세계를 더듬어야 한다. 바다를 청소하는 오메가처럼 말이다.

얼굴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표식이다. 우리는 얼굴을 통해 감정을 읽고, 기억하며,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영화는 그 얼굴을 가장 먼저 지워버린다. 오메가 역시 이름보다 종족명으로 불리고, 개인보다 집단으로 취급된다. 얼굴을 지운 사진과 오메가는 서로 다른 이미지처럼 보이지만, 결국 같은 질문을 던진다. 누군가를 사람으로 보지 않기 시작하는 순간은 언제인가.
박세영 감독은 인터뷰에서 영화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지느러미’라고 밝힌 바 있다. 독성이 강한 지느러미를 전달하고, 소유하고, 빼앗기며 서로 연결된다. 생명의 증표이자 혐오의 근거. 하지만 독성이 있는 건 과연 지느러미일까, 아니면 지느러미를 위험하다고 규정하는 사회일까.
이 설정은 단순한 판타지적 장치가 아니라 낙인의 은유처럼 읽힌다. 역사 속에서 특정 인종과 민족, 질병을 가진 사람들, 감염병의 확산기에 특정 공동체는 언제나 '위험한 존재'라는 이름 아래 인간성을 박탈당해 왔다. 존재 자체보다 사회가 부여한 이미지가 더 강력한 독이 되었던 것이다.
오메가는 인간과 다른 존재라서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도록 정의된 존재다.

그러나 영화가 더욱 잔인하게 보여주는 것은 살아 있는 동안의 차별만이 아니다. 인간성을 빼앗긴 존재는 죽어서도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한다.
내게 지느러미는 심장처럼 보였다. 붉고, 축축하고, 금방이라도 꿈틀거릴 것만 같은 것. 살아 있다는 증거이면서도 가장 쉽게 상처 입는 기관. 심장이 멈추면 삶은 끝난다. 지느러미가 잘려 나가면 오메가 역시 더 이상 온전한 존재일 수 없다. 얼굴이 한 사람의 정체성을 증명한다면, 심장은 끝까지 살아 있으려는 의지를 증명한다. 영화 제목인 '지느러미'는 단순한 물고기의 기관이 아니라, 끝내 버리지 못한 인간성의 형상인지도 모른다.
지느러미는 죽은 생명의 일부이면서도 계속 부패하고, 시간을 증명하는 물질이다. 죽음은 끝났지만 죽음의 흔적은 계속 남아 있다는 사실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 속 오메가는 살아서도 노동의 대상이지만, 죽어서도 애도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관리국은 탈출한 오메가를 보호하기보다 수거하듯 이송하고, 죽은 오메가는 곧바로 밀폐되어 바다로 돌아간다. 죽음은 장례보다 폐기에 가깝다.

미아가 일하는 실내 낚시터는 원래 자연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낚시를 인공적인 실내 공간으로 옮겨놓은 장소다. 물은 있지만 바다는 없고, 물고기는 있지만 자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이 죽은 공간처럼 과거의 향수를 흉내 내기만 할 뿐, 생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애도 역시 그렇다. 의식은 재현할 수 있어도, 떠난 존재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 속 오메가는 사회가 밀어낸 존재들인 동시에, 인간 사회가 외면한 죽음을 대신 감당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들이 오염된 바다를 청소하는 모습은 마치 인간들이 외면한 슬픔을 대신 처리하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이는 봉준호의 <괴물>이나 기예르모 델 토로의 <셰이프 오브 워터>가 괴물을 사회의 타자로 재해석했던 방식과도 맞닿아 있다. 괴물은 언제나 우리 밖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밀어낸 존재였다. 더 나아가 <지느러미>는 죽음 이후에도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의 마지막을 응시한다.
이런 점에서 영화의 디스토피아는 미래를 예언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재를 과장해 보여주는 거울에 가깝다. 환경오염과 혐오, 노동의 계급화, 감염병 이후의 사회, 그리고 죽음을 소비하는 시대까지. 영화 속 모든 설정은 현실을 낯설게 비추기 위한 장치다.
우리는 흔히 인간다움을 언어와 이성에서 찾는다. 그러나 <지느러미>는 마지막까지 다른 질문을 던진다. 누군가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어쩌면 그를 애도하는 일인지도 모른다고. 오메가는 사람들을 위해 노동하지만, 사람처럼 죽을 수 없고, 사람처럼 기억되지도 않는다. 영화가 가장 두려워하는 미래는 오염된 바다가 아니다. 누군가의 얼굴을 지워도 아무렇지 않은 사회다.
얼굴을 잃은 존재는 끝내 애도 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 순간, 인간성을 잃는 것은 오메가만이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 자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