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대한민국에서 여배우로 산다는 것 [영화]

영화인 문소리가 각본, 감독, 주연을 겸한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글 입력 2018.07.31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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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리는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각종 해외 영화제에서도 연기력을 인정받은 능력 있는 배우다. 꼭 수상경력을 들이밀지 않더라도 그를 떠올렸을 때 연기 잘하는 배우라는 수식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배우로서 뛰어난 커리어를 가진 그가 연출을 배우러 대학원에 들어가 직접 각본을 쓰고 감독과 주연을 겸해 세 개의 단편 영화 <여배우>, <여배우는 오늘도>, <최고의 감독>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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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여배우는 오늘도>는 이 세 단편영화를 엮어 만든 독립영화로, 문소리는 직접 배우 문소리를 연기한다. 영화 속 문소리는 자타공인 실력파 배우이며 상도 더러 받고 대중적 인지도가 있지만, 좋은 작품이 들어오지 않아 초조하고 엄마로서, 딸로서,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바쁜 삶을 사는 사람이다. 문소리 본인이 직접 대본을 쓴 데다 진짜 실존하는 배우 자신의 캐릭터를 그대로 투영하여 관객들은 영화 속 그의 고민과 생활을 자신이 직접 겪은 것을 재구성하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아마도 실제로 겪은 일들과 픽션이 적절히 뒤섞여 있겠지만, 직접 자신을 연기함으로써 대한민국에서 여배우로 살아가며 그가 느낀 것들이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영화의 포스터처럼 흔히 새빨간 드레스와 하이힐로 화려하게 무장한 모습이 떠오르는 '여배우'의 삶. 평범한 사람과는 굉장히 다를 것 같은 그의 삶에서 우리는 공감의 지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아마 '남배우'의 삶이었으면 찾지 못했을 공감의 지점을.



그에게는 배우 이전에 여러 직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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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이면서 동시에 엄마, 아내, 딸, 며느리로 살아가고 있는 문소리의 모습은 어딘가 친근하고, 우스우며, 연민을 자아내기까지 한다.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의 병동에 찾아갔다가 시어머니가 비싼 거라며 쥐여주는 무언가에 은근히 기대감에 부풀지만, 별 볼 일 없는 동전이라는 것을 알고 실망하는 에피소드나, 함께 사진을 찍어주면 할인해준다는 말에 혹한 엄마의 성화에 결국 숍에서 메이크업까지 받고 치과를 찾는 에피소드 등은 여배우이면서 동시에 사회의 수많은 여성이 가지고 있는 엄마, 아내, 딸, 며느리라는 여성으로서 부여받는 역할을 짊어진 그의 일상을 소소하게 풀어낸다.

스크린에 나오는 특별한 '배우'의 삶 이전에 그녀에게는 다른 수많은 여성과 같이 부여받는 '엄마', '아내', '딸', '며느리'로서의 삶이 있다. 일하는 여성에게 직장인, 부모, 자식, 며느리 등 수많은 역할을 모두 완벽하게 해내는 슈퍼우먼을 기대하는 사회. 다른 여성들처럼, 문소리에게도 이것들은 어렵고, 버겁다. 이 모든 역할을 짊어지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그녀 삶의 단편들은 이 땅을 살아가는 무수한 여성들의 삶과 교집합을 이루며 공감을 자아낸다.



'여'배우 문소리

여성이라는 굴레는 그의 직업인 '배우'라는 글자 역시도 단단히 옥죄고 있다.

자타공인 연기력 출중한 배우임에도 그녀에게는 작품이 들어오지 않는다. 원하던 작품에 캐스팅되지 않고 속상한 마음에 오랜 친구들과 오른 산에서, 우연히 마주친 영화제작자는 그녀의 자존심을 긁는 말들을 쏟아낸다. 기분 풀러 나선 등산길에 억지웃음을 지어가며 상대의 비위를 맞춰주고 그의 일행들이 무례하게 굴더라도 속으로 감내한다. 그래야 작품을 놓치지 않으니까. 친한 친구는 자신의 속도 모르고 쉽게 내뱉는다. "너도 누구누구처럼 그런 작품해!! 넌 왜 안 해?왜 못해?!!"


"한국영화 죄다 조폭 아님 형사지"


문소리는 여성 배우들에게는 중요한 역할이 주어지지 않는 한국 영화판의 현실을 꼬집는다. 그녀가 활약했던 1990년대~2000년대 초반까지는 비교적 존재감 있는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했던 반면, 이제 한국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들은 범죄의 피해자나 모성애가 강한 엄마, 남자주인공을 각성시키는 수동적 존재에 머무를 뿐이다. 이름은 바뀌지만, 역할의 존재 의미는 어느 영화에서든 한정된 그저 그런 인물들. 충무로의 내로라 하는 여배우에게서도 작품이 들어오지 않아 휴식기를 가졌다는 말이 나오고, 그만큼 좋은 작품과 매력적인 캐릭터는 더더욱 나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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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캐릭터가 없으니 배우의 매력이 발휘될 기회도 적어진다. 영화 속 문소리가 깎인 자존감으로 자신의 매력을 의심하고 자조할 때 영화계는 저 매력적인 배우가 저렇게 느끼게 한 것이 바로 당신들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어야 옳다. 한편으로 당신들 덕분에 문소리라는 매력적인 연출자를 만나게 됐을지도 모른단 생각도 참 씁쓸한 아이러니다.


(문소리가 참여했던 마리끌레르의 젠더 프리 영상. 7명의 여성 배우들이 영화 속 남성 캐릭터를 연기한다. 대사를 들으면 영화 속 장면이 바로 생각날 정도로 유명한 장면인데도 각자의 개성으로 영화 속 남성 배우 못지않은 매력을 뿜어내는 배우들을 보며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아직 갈 길이 먼,

페미니즘이 사회의 화두로 떠오르고, 주체적이고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에 대한 대중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과거보다 비교적 여성 주연의 작품이나 존재감 있는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추세다. 하지만 이는 '비교적' 증가한 것일 뿐 아직 갈 길은 멀다. 작품의 길이가 긴데다 로맨스 장르가 많아서 그나마 여성 캐릭터가 다수 등장하는 드라마에 비하면 영화 쪽은 여전히 남녀 캐릭터의 비율에서 월등한 차이를 보인다. 물론 드라마에서도 여성 캐릭터를 소비하는 방식에서 문제가 많은 것은 두말할 것 없다.

사회에서 '여성'을 어떻게 소비하는지는 대중이 '여배우'를 소비하는 방식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문소리 같은 중견급 여배우들이 점점 갈 곳을 잃는 것은 대중과 매체가 남성의 사랑을 받을 꽃처럼 싱싱하고 예쁜 여성을 원하기 때문이다. 여성 캐릭터가 자신의 욕망과 의지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이 아닌 남자주인공의 애정의 대상, 보호의 대상, 각성의 개체로서만 존재하는 한, 멜로 드라마의 히로인이 되기 어려운 4대 이상의 여배우들은 갈 곳을 잃는다. 40대 이상의 남배우들이 자신의 연기력과 매력을 뽐내며 스크린을 차지하는 동안, 더이상 어리지 못한 여배우들은 작품을 끌어갈 능력이 충분함에도 조연의 자리로 밀려나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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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문소리는 다시 배우로 돌아가 드라마 '라이프'에 출연하고 있다. 데뷔작인 '비밀의 숲'을 통해 탄탄한 필력을 인정받은 이수연 작가의 두 번째 작품으로, 실력 있는 배우들이 대거 출연해 방송 전부터 화제를 모이고 있던 작품이다. 문소리는 의사로서의 프라이드를 가진 엘리트 의사로, 상국대학병원 최초의 여성 신경외과 센터장을 연기한다. 주연은 아니지만 매력적인 역할이고, 이를 연기하는 문소리의 연기 역시 훌륭하다. 그는 제작발표회에서 작품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을 보이기도 했다.

드라마 방영 전, 작품에 대한 소개와 촬영 뒷이야기 등을 보여주는 비기닝 방송이 방영됐다. 기대 중이었던 작품이기에 챙겨본 해당 방송분에 적잖이 마음이 상했다.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 대결을 벌이는 두 명의 주연 남자배우들의 모습을 그에 걸맞게 보여준 직후 나온 배우 문소리와 원진아의 포스터 촬영 현장분 때문이었다. 내가 볼 땐 앞의 남배우들 못지않게 카리스마 있는 표정과 눈빛을 보여주고 있는 문소리 배우 주위를 둘러싼 분홍색 자막 '예쁨', 미소짓는 원진아 배우 주변에도 역시 분홍색 '샤방'이라는 글자. 남배우들 분량에는 없던 얼굴에 메이크업 받는 장면까지. 여배우를 어떻게 대하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편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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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배우가 많이 발굴되면 모두에게 좋을 텐데, 참 어렵다. 실력이 입증된 배우도 여자 배우로 살아남기 힘든 판국이다. 겹겹이 쌓여 있는 굴레들을 던져 버리고 다양하고 개성 있는 여성 캐릭터들의 향연이 훌륭한 여성 배우들의 발견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언젠가 배우 앞의 불필요한 '여'자를 떼버리고 문소리를 지칭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적어도 그는 그러기를 원한다고 표출했다. 대중도 그런 그가 훌륭한 '배우'로 오래오래 좋은 연기를 보여줄 수 있도록 응원하고 지켜봐 주기를 바란다.


[박찬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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