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람의 조건, NTLive 연극 < 프랑켄슈타인 > [공연예술]

글 입력 2017.11.05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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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온지 벌써 6년쯤 된 영국 국립극장의 연극 <프랑켄슈타인>. 6년 전이란 시간은 아득하게 다가왔다. 그 시절의 나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지금으로선 상당히 가벼운 문제를 인생에서 가장 괴로운 난제로 삼았고 한창 영국드라마 <셜록>을 친구들에게 usb에 담아 전파하고 다녔다.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작품 자체보다 출연 배우인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연기가 보고 싶어서였던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잊고 있었다. 한동안 푹 빠져서 몇 번씩 어떤 작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작품이 아니라 뭔가 정말 푹 빠져있었던 나를 잊고 있었다. 머리보다 그냥 감으로 몇 초만에 모든 걸 결정하고 뒤돌아보지 않던 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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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프랑켄슈타인>은 주인공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피조물 역을 두 명의 배우가 돌아가면서 맡는 점이 독특하다. 국립극장에서 빅터 프랑켄슈타인-베네딕트 컴버배치, 피조물-조니 리 밀러 버전을 보고 나서 당장 그 반대버전을 보고 싶어서 두 번 보았다. 개인적으로는 베네딕트 버전의 피조물-밀러 버전 프랑켄슈타인이 각자에게 좀 더 잘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두 버전 중 누가 더 낫고 말고의 문제는 아니다. 서로 지향하는 바가 뚜렷하게 차이가 난다. 두 버전 모두 피조물은 순수하지만 온도가 다르다. 밀러 버전의 피조물은 천진난만한 장난꾸러기 같지만 상처입은 마음을 이기지 못해 차갑고 무섭게 변해가고, 베네딕트 버전의 피조물은 따뜻하고 여린 마음의 소유자이지만 계속 되는 상처에 어쩔 줄 몰라하면서 괴로워한다. 밀러 버전의 프랑켄슈타인은 인간이면서도 이성과 과학과는 가깝지만 감정과 동화와는 거리가 멀고, 베네딕트 버전의 프랑켄슈타인은 셜록을 연기할 때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세상에서 제일 잘난 까칠하고 이상한 사람이면서도 사실은 속으로는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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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프랑켄슈타인>에서는 사람의 조건을 질문한다. 인간 대 괴물의 간단한 이분법적 구도가 아니다. 인간다움은 무엇인지, 왜 인간들에겐 자연스러운데 자신에겐 자연스럽지 않고 늘 배워야하는 것들이 있는지 질문이 넘치는 피조물.  우리는 쉽게 말을 이을 수가 없다. 할 말이 없을 때 그냥 원래 그런거야, 하는데 우리 역시 자연스러워서 그걸 받아들이는 건 아니다. 세상에 말이 안되는 일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나고 나 역시 변덕스러워 갈팡질팡하고 있으니 그 모든 설명하기 힘든 것을 싸그리 사는게 그런거야, 세상이 원래 그래, 라는 식으로 덮고 있지 않은가. 그는 자신과 맞지 않는 옷과 신발을 구겨넣듯이 사람과 동화되기 위해 애를 쓴다. 자조적인 말이다. 그가 잘하는 것이 동화라는 말은. 그는 일관된 것이 좋은데 모순에 봉착했을 때 인간과의 괴리감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 역시 피조물과 다르지 않다.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그냥 애써 적응하고 있는 것이다. 평생을 다른 이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게 스스로를 둥글게 만들어버릇 하는 것 역시 같다. 자기만의 개성과 특별함을 찾으라고 하는 요즘의 말은 인간이나 피조물에게나 새로운 모순처럼 느껴진다. 개성과 특별함도 받아들일 수 있는 선의 공통분모 위에서만 인정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용은 적당한 무관심이거나 교양있는 자기기만일 때가 많은 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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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도 갖지 못한 피조물. 그를 처음 본 사람들은 외모를 보고 괴물이라고 부르며 그를 때리고 짓밟았다. 괴물이기 때문에 인간이 아니라는 거다. 하지만 괴물과 인간은 반드시 대척점에 서 있는 존재일까. 인간의 형태를 하고도 끔찍한 범죄와 폭력에 빠진 사람에게 우리는 인간도 아니라고 한다. 때로 우리는 그들을 괴물이라 칭한다. 그들은 외형상 인간일 뿐이다. 다만 적어도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죄를 저질러도 들키지 않으면, 그들은 피조물처럼 얻어맞을 일은 없다. 그러나 피조물은 생각과 감정, 행동 모든 것이 인간다우면서도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가 담은 고민은 분명 우리와 다를 것이 없다. 그는 떠나지 않는 외로움에 힘겨워하고 사랑을 갈망하며 자신을 인정하고 이해해줄 존재를 고대한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를 때는 역사를 찾아보고 행동한다. 그가 외형상 인간이 아니라는 말도 그냥 넘길 수 없다. 그도 한 때는 살아숨쉬던 인간의 시체로 만들어졌다. 그는 괴물이면서도 인간이다. 그가 괴물이라면 그가 이후 저지른 죄 때문이지, 그가 아름답지 않은 인간이기 때문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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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가장 소외받은 소수를 대변하면서도 동시에 고민의 굴레에 허덕이는 모든 인간의 진실된 모습을 보여준다. 잘 살고 못사는 것, 좋고 나쁜 것은 인간을 놓아주지 않는다. 그에게 선악의 개념을 알려주고 선보다 악을 더 많이 맛보게 해준 건 세상 사람들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들은 이야기가 "괴물같은 놈, 꺼져버려"로 시작한 삶이다. 태양과 새소리, 풀과 빗방울, 눈에 기뻐하던 그에게, 난생 처음 들은 음악을 더 듣고 싶다는 표현으로 그는 가장 자주 들은 말인 '꺼져버려'를 사용한다. 관객들은 웃게 되지만 사실은 마음이 아픈 말이었다. 그는 아담이 되고 싶고 옆에 이브가 있기 원했다. 그러나 그가 베어물은 사과는 사람에 대한 기대와 믿음, 희망이었다. 차라리 기대하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다면 그가 죄를 저지르진 않았을까 싶어 안타깝다. 물론 그의 상처가 그의 면죄부는 아니다. 그러나 그에게 내일의 희망을 약속했던 노인과 프랑켄슈타인의 말에 그는 고삐를 놓치고 말았다. 그는 용서를 모른 상태에서 끊임없이 고통만 받았기 때문이다. 그에게 누구보다도 잘해주었으나 상처를 준 노인의 집을 불태우고, 프랑켄슈타인의 아내를 강간하고 죽이는 등 죄를 저지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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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의 중반부가 되어서야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왜 연극의 제목은 프랑켄슈타인일까. 대부분 피조물을 주로 다루고 있는데도 말이다. 피조물과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거의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피조물을 통해서 피조물과 동시에 프랑켄슈타인이 어떤 사람인지가 드러난다. 그들은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 수단은 고민하지 않는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신처럼 사람을 만들 수만 있다면 시체와 장기를 암암리에 구해서 쓰는 것은 거리끼지 않는다. 그런 그를 닮았는지 피조물 역시 프랑켄슈타인을 만나기 위해서, 약속을 어긴 그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그의 사촌과 아내를 죽일 수 있었던 것이다. 둘은 본인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고 이해받지 못하는 삶에 익숙하다. 어릴 적 어머니를 잃고 나서 바뀐 프랑켄슈타인을 가족들은 이상하다고만 한다. 그가 먼저 얘기를 꺼내는 사람도 아니겠지만 누가 먼저 그에게 포근히 안아주면서 다독여준 사람은 없었던 모양이다. 피조물은 늘 숨어다니기에 바쁘다. 실낙원을 좋아하고 플루타크 영웅전을 읽을 줄 안다고, 예의를 갖춰 인사할 줄 안다고 사람들이 그를 인정해주지 않는다. 흉측함에 먼저 그들은 그를 알아보기도 전에 도망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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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의 명장면은 대화에서 나온다. 피조물과 프랑켄슈타인의 제대로 된 첫 대면. 프랑켄슈타인과 조카와의 대화. 그리고 잠시나마 아내였던 프랑켄슈타인과 엘리자벳의 대화. 프랑켄슈타인은 이 세 차례의 대화에서 유일무이한 '인간 출신의 신'이 되어 득의양양했다가 신의 고충과 책임감으로 고뇌한다. 피조물과 프랑켄슈타인의 만남은 대결을 앞둔 검투사같다. 피조물이 얼마나 인간다운지, 몸의 움직임, 사고와 논리, 감정 표현을 볼 수 있을 뿐더러 피조물과 창조자가 나누는 대화가 촘촘하다. 그가 자신을 목졸라 죽이려는 것은 왜 정당화되냐는 피조물의 질문에 말문을 잃는 프랑켄슈타인과 나는 충분히 이성적 대화가 가능한데 잠시 목을 졸라서 미안하다는 피조물의 매너있는 사과가 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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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켄슈타인은 이제 숨을 거둔 사촌과 꿈 속에서 대화를 나눈다. 조카는 아주 생경한 표정으로 그를 딜레마에 빠뜨릴 질문을 던진다. 만약 피조물이 가족이 생기고 후손이 생긴다면 그들은 그를 신으로 추앙할 것인가, 사람과 비슷하면서 다른 그들은 얼마나 빨리, 많이 늘어날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 살아갈 것인가. 신이 되었다고 좋아하는 것은 일순간이며 자신의 피조물로 인한 고민은 녹록치 않다. 사람들이 창조자인 신에 온갖 기도를 드리듯 신을 자청하던 그 역시 역시 피조물의 요청에 곤혹스럽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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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그의 아내와의 대화에서 프랑켄슈타인은 그의 방법에 대한 회의적인 의견과 부딪힌다. 인간을 창조하고 싶었다면 인간의 방식인 아이를 갖는 법도 있었는데 왜 굳이 신의 방식이어야 했는지 아내는 질문한다. 사실 그가 신의 방식을 계승한 것도 아니다. 그는 죽은 자를 되살린 것이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신의 창조물을 재활용한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 방법 역시 피조물에게 흉터를 남기는 불완전한 것이다. 그는 모든 인간이 쓰는 뻔한 방식이 아니라 신에 가까운 우월한 방식을 선택하고 싶었다. 처음엔 소중한 이를 잃고 나서 되살리고 싶은 마음으로 시작했겠지만 그는 남들보다 자신이 우수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사람들과 고립되면 될수록 그 생각은 강화되었고 신과 비교할 만큼, 신을 넘어서야 할 만큼 일종의 사명감을 갖게 되었을 수 있다. 인간과 신의 영역이 나뉘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유연한 생각이지만 그는 자신의 방법을 다른 이들에게 설득하고 인정받는 데는 익숙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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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이 되고 싶었던 인간과 그런 인간이 만들어낸 피조물의 끝은 그럼에도 아주 불행하지도, 걱정되지도 않는다. 이들은 사랑에 서툴다. 사랑을 알 리가 없다고 예상한 피조물은 사랑의 느낌을 알고 있지만, 프랑켄슈타인이 오히려 사랑을 잘 알지 못하기에 놀랍기도 하다. 피조물이 사실 진정으로 사랑한 건 그를 아담으로 만들어줄 이브가 아니라 그의 부모이자 친구이자 신이기도 한, 프랑켄슈타인이다. 둘이 사람이 없는 춥고 어두운 땅을 헤맬 때 피조물이 프랑켄슈타인을 괴롭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그가 사라질까봐, 죽기라도 할 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실은 그의 따뜻한 말 한 마디가 필요하지만 창조자가 피조물이 사라져야 한다며 독한 말을 내뱉기에 그에게 맞춰주는 것이다. 늘 혼자를 자처하는 프랑켄슈타인이 그와 함께 하는 것이 반드시 창조자로서의 의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도 모르는 그의 사랑은 미안함 대신 모진 말을 내뱉어도 곁에 함께 있어주는 것이리라.  피조물과 프랑켄슈타인이 자신만 생각하지 않고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게 된 것, 둘의 존재가 서로를 좀 더 사람냄새 나게 한다.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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