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야기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 [문학]

철학적 사고에 기반한 트라우마의 극복과 철학이 개인을 생각하는 방식
글 입력 2017.10.22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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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보편성을 추구한다. '내가 느끼기에는 ~'이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과 같은 표현은 철학적 논쟁에서 논리적인 힘을 지니지 않고 철학이 추구하는 본질적이고 불변하는 합리적인 진리에 어긋난다.

하지만 동시에 철학은 다른 여타 학문들과 같이 서구 백인 남성의 관점에서 합리적인 학문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버지니아 헬드는 "철학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이 가지는 견해를 제시해 왔다고 강변하지만, 실제로 철학이 제시해온 것은 서구 백인 남성의 관점이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성별, 인종, 민족, 종교, 성적 취향, 계급 등 개인의 삶 속에서는 다양한 우연들이 발생하지만 보편이라는 기준 아래서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분리해서 바라보며, 일부의 이성과 이상에 입각한 합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요즘에는 여러 학문과 분야에서 서구 백인 남성의 관점에서 벗어나 '개인적인 것이 곧 사회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며 다각적으로 학문을 바라보는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대표적으로는 보편성에 가려진 여성 개인들의 실제 경험에 주목하는 여성주의 시각이 여성과 다양한 소수자의 관점에서 사건과 진리를 재해석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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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 >의 저자는 철학을 가르치는 사람이자 성폭력을 겪고 살해당할 뻔 하다가 겨우 살아난 생존자이다. 극적으로 살아난 저자는 자신의 눈 앞에 놓인 역설과 무의미를 이겨내기 위해서 자신이 배워온 철학에 의지했으나 철학은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따라서 저자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정면으로 통과하며 성폭력의 경험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분석 및 치유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식론과 윤리학 등 철학이 개인을 생각하는 방식 등에 대해 논한다. 이는 성폭력 피해자인 저자의 트라우마에 있어서도 어려운 과정이지만, 전통 철학이 가정하고 있는 독립되고 일관된 자아와 달리 끊임없이 '나'에 대해 질문하며 철학자로서 자칫하면 비철학적이고 비학문적이라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위험에 또한 맞서고 있다.

책은 다음과 같은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성과 명명 모두 책의 성격과 저자의 생각을 잘 드러내고 있기에 목차 그 자체로 소개하려 한다.


목차

1장 ) 성폭력에서 살아남는다는 것

2장 ) 철학은 개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3장 ) 주어진 삶을 넘어서

4장 ) 기억이라는 행위

5장 ) 망각의 정치학

6장 ) 다시 말하기


특히 성폭력이 어떻게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가정'을 무너뜨리고 이러한 트라우마는 사회문화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그리고 전통 철학 고유의 문제들에 있어서 새로운 방식의 탐구 가능성을 찾아 나가는 과정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나는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 샬론 델보 -


우선 성폭력은 개인의 주체성을 무너뜨리며 자아가 죽어버린 것만 같은 느낌을 겪게 한다. 성폭력은 고문과 같다. 피해자는 물건처럼 취급받으며 그들의 주체성은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점에서 성폭력과 고문은 세상 속에서 피해자가 보장받아야 될 안전을 파괴하고 자아와 타인에 대한 관계의 연결고리까지 끊어버린다는 점에서 같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성폭력 피해자는 다른 범죄의 피해보다도 자신의 행동이나 성격을 탓하며 사건의 개연성을 찾으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이는 트라우마의 극복에 있어서 인지 부조화를 극복하려는 행동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성'에 있어서 사회의 부조리한 시각 또한 반영되어 있다고 본다. 성폭력 또한 혐오범죄(이는 'hate'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흔히 '묻지마 범죄'라고 하는 범죄 동기에는 범죄를 저지르기까지 나아가는 권력 관계의 작용이 영향을 미치기에 사용한 표현)의 일종이지만 유독 성폭력에서는 '네가 행실을 똑바로 했어야지'. '그러게 밤 늦게 다니지 말았어야지'와 같이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표현이 많이 사용되곤 한다. 피해자는 이러한 반응에 노출됨으로써 인지 부조화가 극대화되고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것에 더욱 어려움을 느끼는 2차 피해를 겪을 수 있다.

또한 성폭력은 은밀하면서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되어온 동시에 너무나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일어났기에 사회문화적으로 선기억(자신이 겪을 미래의 성폭력에 대한 기억)과 후기억(다른 여성의 강간에서 비롯된 기억)을 자극한다. 이는 성폭력 피해자가 개인의 경험을 공론화하는 것의 중요성과 여성의 지속적인 성폭력 피해 사례가 만연함으로써 무의식 중에 자리잡히는 '성에 있어서 여성은 약자고 피해자라는 인식'의 문제점이 서로 충돌하는 지점과 맞닿아 더욱 혼란을 야기하고 그럼에 있어서 더욱 성폭력의 예방(많은 예방책이 존재하지만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성폭력 예방책은 물론 성폭력을 저지르지 않는 것)에 대한 논의를 공고히 한다.

철학을 전공으로 공부하는 학부생으로서, 그리고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체화하는 과정에 있는 여성으로서 내게 < 이야기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 >는 스스로에게 철학의 추구하는 '보편과 합리'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기회가 되어주었다. 철학의 목적지라고도 할 수 있는 이상과 진리에 대한 추구를 향하지만, 지워지고 억눌리고 있는 소수자들의 개인적인 발언과 역사에 입각한 구성적이고 열린 대화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서 배워나갈 점이 많다는 것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 이야기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 >의 표지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다.


"우리는 잘 모른다, 그 죽은 삶의 의미를.

(중략)

정작 그 이상적인 사회에서
살아갈 충분한 권리를 가진
성폭력 피해 여성들은
우리의 고민이 닿지 않는 곳에서,
우리의 무관심 속에서 하루하루를
죽음과도 같은 삶으로 살아가고 있다."


정신과 신체, 이성과 감성, 서양과 동양, 그리고 남성과 여성 등 이분법적인 잣대 아래서 한 쪽의 규범과 행동양식과 정체성은 타자화되고, '올바른 사람이 올바른 권리를 갖게 한다'는 인식은 무의식에 자리잡힌다. 우리는 다양한 소수자와 개인이 내는 작지만 큰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악행이 퍼붓는 비처럼 찾아들 때,
어느 누구도 "그만!"이라고 외치지 않는다.
죄악은 쌓이기 시작하면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
참을 수 없는 울부짖음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여름날 소나기처럼 우리 머리 위로 쏟아질 뿐.

- 베르톨트 브레히트 -



[최서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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