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심선보 '눈앞에 없는 사람' 중 '사랑은 나의 약점' Review [문학]

글 입력 2017.04.05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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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내게 어느 동성애 운동가의 시를 읽어 준다.
  강렬하고 아름답고 신비로운 시를.
  내 언어가 결코 가 닿지 못한 슬픔의 세계가
  밤하늘의 성좌처럼 선명하게 펼쳐진 시를.
  나는 고통스럽다.
  반은 질투심에, 반은 감화되어.
  그러나 나는 다만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다. 참으로 오랜만에
  진실된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한 명의 유순한 독자가 되어.


‘진실한’ 말은 무엇인가? 누구의 목을 타고 흘러 나올 때 비로소 그 말은 거짓, 과장, 가식의 껍데기를 벗을 수 있을까? 동성애의 사회적 차별에 따른 아픔, 절망, 그리고 다시 희망의 과정을 그리는 시를 가장 잘 쓸 수 있는 시인은 누구일까? 저자는 멋진 시를 적을 수 있지만, 동성애에 관한 시 앞에서는 유독 움츠려든다. 동성애를 하는 사람이 겪는 모든 감정과 사건 앞에서는 진실이 아닌, 가짜를 노래하는 시인이 되는 것이다.

  
  시를 읽고 난 후 당신은 나에게 웃으며 말한다.
  당신이 동성애자였다면
  이렇게 좋은 시를 쓸 수 있었을 텐데.
  나를 사랑하는 것, 그것이 당신의 유일한 약점이군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당신의 위트 섞인 선의 아래에는
  아주 날카로운 메시지가 숨어 있다.
  내가 중산층 이성애자 시인이라는 사실.
  그것은 유일한 약점이 아니라
  나의 본질적인 한계가 아닌가?


‘중산층 이성애자’인 사람인 것은 이 사회에서 썩 못살 만한 배경은 아니다. 비록 중산층이 살기 힘든 요즘이라 해도, 중산층 시민들은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자기 집에서 안락하게 쉴 수 있는 최소한의 여유를 가진다. 태어나자 마자, 먹을 것을 구하러 다니거나, 아무런 삶의 기회를 누리지 못한 채 방치되지는 않는다. 혹은 이러한 가정 또한 필자의 삶을 바탕으로 추측가능한 한계일지도 모른다.

이성애자 인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성애자라고 하여, 행복한 연애를 거쳐 완벽한 결혼으로 이어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스스로가 사랑하는 사람을 공개할 수 있고, 손을 잡고 거리를 다닐 수 있으며,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눈치 보지 않는다. 그래서 이성애자이자 중산층으로 태어나고 자라난 시인은 빈곤의 아픔과 동성애자(혹은 무성애자)가 느끼는 소외감을 경험해보지 못한 축복받은 사람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이에 대해 진실된 시를 쓸 수 없고, 남의 이야기를 추측하고, 상상하며, 조심스레 접근하여 그 표면에 다가가야 한다. 하지만, 다가간다고 그 중심부에 도달할 지는 미지수이다.

   
  나는 오늘 두 통의 전화를 받았다.
  한 사람은 말했다.
  축하합니다. 당신의 시가 '올해의 좋은 시'로 뽑혔습니다.
  내일까지 수상소감을 보내주세요.
  다른 사람은 말했다.
  아쉽지만 당신의 시는 대중 집회 장소에서 읽기는 다소 어렵군요.
  내일까지 소통이 좀 더 용이한 시를 보내 주시겠어요?
  두 사람은 같은 시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었다.
  나는 두 사람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다. 내일까지
  아주 문학적인 수상소감문 하나와
  아주 대중적인 시 한 편을 보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들이 기대하는 성실한 시인이자 선량한 시민이니까.


시인은 자신의 시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갸우뚱거린다. 
자신의 시는 ‘올해의 좋은 시’일까? 혹은 ‘소통이 용이’하지 않은 시일까? 
그가 쓰는 시는 진짜 일까, 혹은 ‘중산층 이성애자’인 지극히 평범한 위치의 시민이 쓸 수 있는, 딱 그정도의 시일까?


  그런데 당신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 시에서 나는 당신에게 청혼을 했다.
  내가 한 줄기 따스한 입김을 후우, 당신의 귀에 불어넣자
  당신은 활짝 웃으며 좋아요! 하고 수락했다.
  나는 언젠가 당신에게
  지극히 평범하고 직설적인 말로
  말하자면 전혀 시적이지 않은
  기껏해야 두 문장 정도로 이루어진 말로 청혼을 할 생각이다.
  나는 안다. 전혀 시적이지 않은 그 두 문장이
  내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지을 것이다.


시인은 자신이 쓰는 시의 진정성에 대해 고민하던 중, 옆에 함께하는 애인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한다. 그러고는 연인에게 청혼할 것이라는 말을 한다. 시인으로서 가지는 한계는 그에게 큰 걱정이지만, 그가 '좋은' 시를 쓰는 지와 상관없이 그에게는 사랑하는 애인이 있고 그에게 청혼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야기를 전환한다. 시인으로의 삶 말고도, 그에게는 다양한 층위의 삶이 존재하기에. 
  

  또 하나 당신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당신이 시를 읽는 동안 나는 우연히
  창밖으로 한 노인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쪽동백나무 아래로 아주 천천히 걸어가면서
  질질 끄는 기괴한 발걸음으로
  떨어진 꽃잎들이 아름답게 수놓은 길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그 노인과 나는 눈이 마주쳤다.
  아니다. 사실 마주치지 않았다.
  그 노인은 내게 하나의 이미지였다.
  내가 대변할 수 없는 세계로부터 던져진 잿빛 가죽 포대였다.
  그 노인이 나와 눈이 마주쳤더라면
  단 1초만 마주쳤더라면 나는 이렇게 썼을 텐데.
 
  그는 내게 말하는 듯했다.
  시인이여, 노래해 달라.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나의 머지않은 죽음이 아니라
  누구도 모르는 나의 일생에 대해.
  나의 슬픔 사랑과 아픈 좌절에 대해.
  그러나 내가 희망을 버리지 않았음에 대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생존하여 바로 오늘
  쪽동백나무 아래에서 당신과 우연히 눈이 마주쳤음에 대해.
  나는 너무 많은 기억들을 어깨 위에 짊어지고 있는데
  어찌하여 그 안에는 단 하나의 선율도 흐르지 않는가.
  창가에 서 있는 시인이여.
  나에 대해 노래해 달라. 나의 지친 그림자가
  다른 그림자들에게는 없는 독특한 강점을 지녔노라고 제발 노래해 달라.


그는 애인과의 사랑, 그리고 청혼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한 노인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노인은 그에게 자신의 삶에 대해 노래해달라 청한다. 대신, 노인의 늙은 주름과 초라한 행색만을 보고 '노인은 죽음을 맞이했다'와 같은 노랫말로 그의 삶을 한정짓지 말아달라 부탁한다. 그 노인의 삶을 살아보지 못한, 다시 말해, '중산층 이성애자'로 평생을 살아온 시인은 특히 노인이 가지는 수없이 다양한 삶의 층위들을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급히 서둘러 '늙어 보이는 노인이 죽고 사라졌다'와 같은 말로 시를 끝맺을 수도 있다. 그리고 노인은 그것을 경계한다. 노인은 자신의 삶이 남들과는 조금 다른, 특별한 점이 하나쯤 있었노라며 본인 삶의 가장 안 쪽 깊숙한 곳에 대해 노래해달라 부탁한다. 노인은 곧 죽는 사람으로 치부되기엔, '너무 많은 기억들을 어깨 위에 짊어지고' 있으며, '누구도 모르는 나의 일생'에 대해 사람들이 알아주고, 시인이 알려주길 바란다. 이러한 노인의 요구에 시인은 어떻게 답할 것인가? '중산층 이성애자'로 태어난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하며, 동시에 옆의 애인과 함께라면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한계를 잊게 되는 사람.

 
  당신이 시를 다 읽고 났을 때 노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당신에게 웃으며 말한다.
  정말 좋은 시군요.
  질투심을 느낄 정도로 당신이 이야기한
  나의 유일한 약점,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네요.
  그런데 내 사랑, 오늘은 내가 할 일이 너무 많군요.
  내일까지 당장 두 편의 글을 마감해야 해요!


시인은 자신의 약점을 인정한다. 그는 '중산층 이성애자'로 태어나 자신과 다른 삶을 산 사람들을 깊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한계'라 부르고, 애인을 사랑하는 것은 '약점'이라 말한다. '한계'는 살아가며 극복가능한 것이 아닌, 삶의 모든 행동 양식과 사고 과정에 전제되어있는 것이다. 그 한계는 선천적일 수도, 후천적일 수도, 스스로 만든 것일 수도, 사회에 의해 부여된 것일 수도 있다. 그 양태와는 상관없이, 한계는 극복할 수 없으며 -적어도 시인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삶의 한계를 비추기를 포기한다. 그리고 애인을 사랑하고 그에게 청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모든 일련의 감정과 행동을 '약점'이라 표현한다. 약점은 극복가능하지만, 극복을 꼭 하고 싶지 않은 그런 소중한 일부로 시에서 표현된다.

작가는 진정한 시를 적고 싶은 마음에서 스스로 인정한 그의 한계를 잊기로 한 것일까? 죽어가는 노인의 삶을 아름답고 강렬하게 노래할 동력은 바닥이 난 것일까? 대신 그는 내일 할 일을 찾고, 애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나간다. 평생 자신이 '중산층 이성애자'인 것을 탓하며 시인의 삶에 회한을 느끼는 것도 퍽 씁쓸한 결말이지만, 이렇게 빨리 한계를 포기하며, 약점을 받아들이는 것도 씁쓸하긴 매한가지이다. 한계를 극복하는 그 노력 자체가 인위적이고 진실하지 못하다면, 그 사실을 염두해두고 노인을 끝까지 노래하는 시의 결말을 기대하는 것은 내가 너무 이상적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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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유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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