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시대의 남자들 이야기: 연극 '남자충동'

글 입력 2017.02.22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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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남자충동>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라도 사투리, 의리를 외치는 건달들, 보스가 되고 싶은 주인공, 그런 주인공의 치명적인 약점인 여동생. 연극 <남자충동>을 이루고 있는 여러 요소들은 정통 느와르부터 가벼운 조폭 코미디까지 우리가 수년간 봐 왔던 다수의 영화와 드라마를 떠올리게 한다. 이런 작품들 속에서 폭력은 남자들끼리의 낭만적인 의사소통 방식 또는 부정부패한 공권력을 대신할 수 있는 무언가로 표현된다. 또한 그 폭력의 주체가 되는 인물들은 의리 있고 남자다워서 동경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어떠한가. 연극 <남자충동>은 수많은 미디어에서 포장해 온 폭력의 실상을 폭로한다.
 
   인생 롤모델이 <대부>의 알 파치노인 주인공 ‘장정’은 대표적인 힘의 숭배자이다.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들며 가족을 지키면서도 그 위에 군림하려 하는 장정은 가부장제와 마초이즘이 낳은 인간상이다. 장정은 가족, 즉 그의 표현대로라면 ‘패밀리’를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패밀리’ 그 자체라기보다는 ‘패밀리’의 형식에 가깝다. 그가 가족을 지키는 방식은 이를테면 부모의 이혼을 막기 위해 노름하는 아버지의 손을 자르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동생 유정을 협박하는 식이다. 그가 지키고자 하는 ‘패밀리’안에 정작 가족구성원은 없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의 폭력을 ‘가족을 지킨다’는 명분하에 정당화한다. 그러나 손댈수록 망가지는 수채화처럼 장정이 패밀리를 지키려 할수록 가족은 망가져 간다. 그의 모순적인 행동은 그만 모를 뿐 유정도 알고 달래도 알고 관객도 안다.

  그런 장정과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 바로 ‘단단’이다. 장정이 숭상하는 남성상-주먹 잘쓰고, 거칠고 의리 있으며 쿨한-은 단단 앞에서 초라해지고 유치해진다. 장정이 여장남자인 단단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그를 겁탈하려다 그가 가진 남근의 존재를 깨닫는 순간은 연극 전체를 통틀어 가장 극적인 장면이다. 모든 관객이 숨죽인 그 순간 단단은 이야기한다.


“나 남자되기 싫다. 죽어라고 싫어, 너 같은 남자 무서워. 나 그꼴 될까봐 여자되고 싶어.”


  장정은 그런 단단의 머리를 잡고 “사내는 사내다워야 한다, 사내가 가이내처럼 구는 게 가장 큰 수치다”라고 하며 잔인하게 폭력을 행사한다. 단단을 물리적인 힘으로 눌러버린 장정은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결과 장정은 자신이 가장 지키고 싶었던 존재인 여동생 달래에게 칼을 맞아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폭력으로 이루어진 그의 언어는 끝내 소통에 이르지 못했다. 장정이 그토록 되고 싶어하던 ‘보스’는 달래의 눈에 자신을 헤치는 ‘붉은뱀’일 뿐이다. 그가 숭상하던 남성상은 그 남성상과 가장 거리가 먼 사람으로부터 파괴되었다.

  주목할 점은 장정을 비롯한 <남자충동>속 인물들이 폭력의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라는 점이다. 장정은 아버지에게 허리띠로 맞으며 자랐으며 평춘, 승표, 강일, 달수 등 다른 건달들 또한 그 자리에 오기까지 각자 폭력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는 그들이 마초이즘과 가부장제라는 큰 시스템의 희생자인 동시에 그 시스템을 더욱 공고히 하는 가해자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들은 폭력의 고리를 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재생산되는 폭력의 주체가 되었고, 사람이 아닌 하나의 수컷으로 머무르면서 시대 적응에 실패했다.
 

  <남자충동>은 1997년에 초연되었으니 올 해 20살이 된 작품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사고 있다는 점은 <남자충동> 속 폭력이 난무하고 그릇된 남성상을 숭상하는 세계가 결코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과 완전히 분리되어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현실에도 ‘남자다움’을 앞세우며 폭력을 휘두르는 수많은 장정들이 있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고 있다. 경제적, 사회적 여건은 이미 가부장제를 무너뜨리고 있으며 집단보다 개인이 중시되는 사회에서는 ‘남자다움’이나 ‘여자다움’보다 ‘나다움’이 더 강조되고 있다. 장정은 끝까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닫지 못했지만 우리는 안다. 힘의 세계를 고집하고 그곳에 머무르려는 '수컷'은 새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채 장정처럼 도태될 뿐이라는 것을. 그들은 스스로를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만드는 마초이즘과 가부장제에서 빠져나올 때 수컷이 아닌 진정한 남자로, 더 나아가 한 명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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