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균영 작가의 「어두운 기억의 저편」 에 관한 단상 [문학]

글 입력 2016.12.10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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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장기기억은 용량이 무한대라고 한다. 하지만 실제 삶 속에서 우리의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과연 몇이나 되는가?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것들 마저 수많은 기억의 파편 속에서 쉬이 찾지 못했던 적이 그 얼마나 많은가?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우리는 자아의 일부를 형성한 귀중한 기억들마저 쉽게 잊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이 소설은 바로 우리처럼, 망각하는 인간을 표상하는 ‘그’가 자신의 어두운 기억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이균영 작가의 「어두운 기억의 저편」은 한국전쟁으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리는 한 남자에 대한 소설이다.

  ‘그’가 자신의 기억을 찾는 과정은 술을 마시고 잃어버린 가방을 찾는 과정과 병치된다. 자신과 전혀 관련이 없는 이문동 여관에서 잠이 깬 주인공은 사라진 서류가방을 찾아 택시회사, 「메시지」나 「밀밭」과 같은 자신이 들렀던 술집들을 전전한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그’가 가장 의문을 가졌던 ‘나는 왜 이문동에 오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면서, 자신의 기억을 서서히 되찾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작가가 보는 인간의 삶의 특징 중 첫 번째가 바로 ‘과거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자신이 현재를 살고 있으며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과거의 기억들에 얽매이는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현재를 구성하고 있으며, 과거의 자신이 없다면 현재 또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경우에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어머니를 잃고 고아원에서 길러진 인물이다. ‘그’에게는 고아라는 사실 때문에 결혼을 포기했을 정도로 과거의 일이 현재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술을 잔뜩 마시고 나서는 ‘미스 민’에게 평소에는 잊고 있었던 ‘혜수’의 존재를 이야기할 만큼, 인간은 과거의 일을 결코 쉽게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과거의 기억들이 무의식 속에 침잠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인간 삶의 특징 두 번째이다. 인간은 어쩌면 자신보다 훨씬 거대한 무의식 속에 잠겨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매우 강조했다고는 하지만, 매일매일 판에 박힌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있어서 무의식은 그 부피를 점점 더해간다. 세상 밖에 공개적으로 꺼내놓을 수 있는 무의식의 범위도 매우 작아졌을 뿐더러, 그 무의식들을 들여다 볼 만큼의 시간도 없기 때문이다. ‘그’ 또한 어린 시절 자신이 지켜야할 소중한 존재였던 ‘혜수’를 어른이 되어서는 무의식 속에 묻어 두었다. 하지만 이러한 무의식은 술 취한 ‘그’를 ‘혜수’가 입양되었던 이문동 박 치과로 이끌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의 삶이 더욱 고단해 질수록, 무의식의 저 편에 넣어두는 기억과 욕망이 더욱 많아지는 것이다.

  나는 작가의 이러한 삶의 해석에 가장 공감했다. 바쁜 삶을 사는 인간 모두는 표면적으로는 이성적인 동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무의식 속에 과거부터 형성되었던 욕망과 기억들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고 나서는 ‘나는 내 나이를 모른다.’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쟁의 아픔을 토로한 ‘그’처럼 말이다. 또한 현실 속에서는, 좋은 회사에 다니며 겉으로는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바쁜 삶 속에서 인간 본연의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훌쩍 여행을 떠나는 일 등이 그 예시라고 생각한다. 이성적으로 처리해야할 것들이 많아질수록 우리의 무의식은 점점 그 몸집을 불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무의식들을 다른 측면에서 보면, 정해진 틀이 있는 무미건조한 사회 속에서 자신의 자아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또한 작가가 보는 인간 삶의 특성 세 번째는, 인간은 누군가의 온기를 갈구하는 존재이며 그러한 온기를 지닌 존재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독신을 결심하고 살아가는 ‘그’는 표면적으로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사내처럼 보인다. 하지만 술집에서 처음 만난 ‘미스 민’에게 ‘혜수’ 이야기를 꺼내며 그녀에게서 ‘혜수’를 겹쳐 보기도 하고, 또 위안을 얻는다. 독립적으로 보이기만 했던 ‘그’도 사실은 자신의 어두운 기억을 위로받을 대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미스 민’ 또한 그러한 그를 마치 자신의 아들인 것 마냥 따듯하게 보듬어 준 점에서 온기를 지닌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와 ‘미스 민’은 모두 한국 전쟁으로 인해 상처를 입은 인물이지만 ‘그’는 전쟁 통에서도 어린 ‘혜수’를 지키기 위해 무던히 노력 했으며, 모든 것을 잃고 술집에서 일하는 ‘미스 민’ 또한 임신을 하게 되자 아이를 낳아 따듯하게 키우고 싶다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이것이, 전쟁의 폭력성이 많은 사람들에게 날카롭게 상처를 냈지만 인간 자체에 깃들어 있는 다른 생명을 향한 온기까지는 없애버리지 못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인간의 삶에 대한 고찰을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는 이 소설 속의 세계는, 과거와 깊은 연결고리를 가진 세계이다. 그리고 동시에 과거의 소중한 기억을 잊어버리게 할 만큼 ‘삭막한 세계’이기도 하다. 자신이 그토록 아끼던 ‘혜수’에 대한 기억을, 무미건조하기 그지없는 서류가방을 찾는 것에서 시작점을 찾았을 만큼 이 세계는 황량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황량한 세계는 소설 속에서 6·25 한국 전쟁의 상처라는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 역사성은 사회뿐만이 아니라 ‘그’의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삶에도 투영되어 있다. 이는 소설 속 배경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릴 적 나와 함께 살았던 증조할아버지께서도 한국 전쟁으로 인해 북한에 가족들을 두고 내려오셨다. 그리고는 항상, 죽기 전에는 가족들을 만나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했다. 명절이나 연말이 되면 언제나 북쪽이었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곳을 향해 젖은 눈을 여러 번 깜빡이셨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이처럼 할아버지께서 지닌 전쟁의 상처 또한, 당신의 깊은 곳까지 침투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처들은 현실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지니고 있을, 어쩌면 일상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소설은, 누군가에 대한 간절한 기억마저도 잊어버리는 환경들을 보여준다. ‘그’가 자신의 어두웠던 과거를 묻어두고, 그것을 잊은 채 뿌리 없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이 그렇다. 고아라서 결혼을 포기한 ‘그’의 모습에서 자신의 과거를 인정하기보다는 의식적으로라도 잊으려고 노력하는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그’가 서류 가방을 통해 ‘혜수’에 대한 기억을 되찾고, ‘미스 민’에게 위로를 받음으로써 자신의 존재의식을 조금이나마 회복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의 삶이 어쩌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삶과 상당히 비슷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자신들의 소중한 기억을 ‘어두운 기억의 저편’에 넣어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그 일 쯤이야 나중에 사진으로 보면 되지, 다 기억이 나겠지, 하면서 매 순간순간을 보석처럼 여기지 않고 있는 것이다. 가족들과 시간을 내어 여행을 가거나,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보러가서도 사람들은 그 시간들을 음미하며 기억에 남기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저 휴대폰 카메라를 든 채 ‘내가 이러한 것들을 했다’는 흔적에 불과한 것들을 만들어내려고 할 뿐이다. 하지만 나는 본디 기억이라는 것은 ‘느리게’ 만들어 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기 기억 속에 남겨야 할 것들은, 그 기억 자체만이 아니라 그 향기나 공기마저도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느릿하게 가슴에 새겨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은 숨 돌릴 새 없이 바쁘지만, 귀중한 기억을 보관하는 시간을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무제한의 용량을 가진 장기기억 장치가 텅 빈 채로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 얼마나 쓸쓸하고 무채색한 삶이겠는가. 그렇기에 우리는 더더욱 어두운 기억의 저 편으로, 작은 손전등 하나를 들고 여정을 떠날 용기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무의식 속 그 어딘가로 말이다.


[이영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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