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세 가지 작품을 통해 바라본 ‘공간’의 의미 [시각예술]

글 입력 2016.10.17 04:35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올해 2016년 8월, 문 밖을 나서면 이마에서 물이 흐르는 엄청난 더위 속에 나는 충무로 근처에서 열리는 수업을 듣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릴 적부터 추억을 쌓아온 친구가 나에게 추천해준 수업이었는데, 그 수업의 이름은 <깨어있는 공간 아카데미>이였다. 작품 외에 다양한 자료들을 저장하는 아카이브실, 작가들의 창작을 도와주는 레지던시, 정동야행, 광화문 국제 페스티벌 등을 걸어다닌 나의 발자국들은 ‘공간’에 대한 의미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여름방학 시기에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 이중섭 전시회는 공간에 대한 나의 관심을 더욱 높여주었다. 전시장 바닥을 활용하여 이중섭이 제주도에서 살던 작은 공간의 단면도를 재현해 놓은 아이디어, 이중섭의 은지화를 주제로 한 공간에는 조명을 다 끈 뒤 소량의 스포트라이트를 설치하여 은지의 특성을 최대한 살려낸 점, ‘소’를 주제로 한 공간에는 벽지를 황토색으로 칠해놓은 것을 보며 기획자의 세심한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때문에 이번 수업을 통해 큐레이터로서 공간에 자신이 생각하는 주제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ㅡ 관람객들에게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게 위해 공간을 매개체로 사용하는 방법들에 대해서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공간도 아닌 ‘깨어있는’ 공간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호기심을 불어넣었다.

  수업은 내가 원하던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인테리어 공사에 사용되는 마감재의 샘플을 얻기 위해 논현동과 종로 거리를 땀을 한바가지 쏟아내며 돌아다녔고, 나만을 위한 공간을 구상해오라는 과제를 받았을 때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문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이 한 달 과정 속에서도 얻어가는 것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성실한 마음으로 수업에 임했다.

  마지막 수업 날, 이 아카데미를 기획하신 대표님의 한마디가 여태 아카데미를 중도 포기하고 싶어 하던 나의 마음을 한 순간에 녹게 만들었다. “공간은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곳에 있는 사람과 함께 자라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성장하며 좋아하는 공간이 달라지는 거예요.” 이 말을 들은 그 순간부터 내 주위의 공간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13015103_225472674486659_3767739986927475604_n.jpg
 

  위의 사진은 한남동에 위치한 아마도 예술공간에서 2016년 4월 18일부터 5월 15일까지 열렸던 <누구의 것도 아닌 공간> 전시회 포스터이다. 이 전시를 보러갔던 날 좋은 기회를 얻어 큐레이터와 단 둘이 작품을 하나하나 보러 돌아다니며 전시를 기획하게 된 계기와 작품들의 개별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작품을 모두 둘러본 뒤 큐레이터께서는 나에게 질문이 있냐고 물어보셨고, 나는 왜 전시장 내부 벽면이 새로 페인트칠을 깔끔하게 하지 않고 다 뜯겨진 채로 남겨두었냐는 질문을 드렸다. 포스터의 모양도 여느 전시회와는 다르게 벽면에 난 상처와 어울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큐레이터께서는 나에게 “이태원에 비해서 낙후된 공간인 한남동에 위치한 이 공간에는 공사장 인부들부터 시작해 많은 사람들이 거쳐 갔어요. 벽에 남겨진 흔적들은 개발 전의 과거 시간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한남동 전체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이 예술공간의 시간은 지금 여기 이 공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한남동 전체의 시간이에요.”라는 대답을 주셨다.

  6월 선선한 바람이 부는 날씨에 나는 문래동 예술창작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위치한 Space XX에서 열린 우리 학과의 제16회 졸업전시를 보기 위해서였다. 반의무적으로 참석하게된 그 전시공간에서 나는 충격적인 작품을 마주하였다. 그 작품이 바로 밑에 보이는 김도희 작가의 <걸레질>이다.


13330887_248473188853274_2369348956217074768_n.jpg
 

  김도희 작가는 불에 타 방치된 미아리 집창촌에 들어가 걸레를 빌리러 다니며 한때 그곳에 거주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비록 집장촌의 수많은 벽면에는 불에 탄 상처들로 가득했지만 작가는 걸레를 사용하여 그 벽면을 끊임없이 닦아내기 시작하였고 그 장면을 영상으로 담았다. 영상에는 붉은 화면과 그 위에서 반복되는 걸레질, 그리고 작가의 헉헉대는 숨소리가 담겨있다. 그 장소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되는 걸레질은 우리로 하여금 공간과 함께 흘러간 시간은 공간 안에 스며들어 지울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1986년에 개관하여 현재까지 많은 사람들이 찾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2016년이 된 오늘, 개관 30주년을 맞이하여 특별전시가 <달은, 차고, 이지러진다>라는 제목으로 열었다. 달은 해와 달리 순환하는 과정이 또렷이 보이는데, 이러한 '달의 생애 주기'는 수장고에서 꺼내져 미술관에 전시되고 다시 수장고로 들어가는 '작품의 생애주기'와 닮아있다는 생각에서부터 시작된 전시라고 한다. 이 전시에서는 새로운 의미로 해석된 국립현대미술관이 보유하고 있는 많은 소장품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전시를 위해 과천을 찾은 10월, 다양한 작품들 중 내 눈에 가장 띄었던 작품은 바로 연기백 작가의 <가리봉133>이라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서울 가리봉동에 위치한 구로공단에 여공들이 모여 살아 '벌집촌'을 형성했을 당시 공간의 벽면을 뜯어내어 만든 것이라 한다.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린 상처 난 벽지들을 본 순간 나는 4월과 6월에 봤던, 앞서 소개했던 두 개의 전시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전의 두 개의 전시를 본 뒤 이 작품을 맞이했을 때, 특정한 공간의 벽면에 남겨진 흔적들은 그곳의 기억과 시간을 대표하고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14642226_314979395535986_6205484268073873947_n.jpg
 

  각각 다른 장소에서 다른 날씨를 맞으며 접한 세 개의 작품은 모두 ‘공간은 역사를 반영한다.’는 내용을 암시했다. 이는 ‘공간은 사람과 함께 자란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공간이라 함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있어 공간은 매일 왔다 갔다 하는 학교나 회사, 또는 집, 더 좁게 들어가면 나의 방이다. 이 모든 우리 주변의 공간은 우리의 삶을 대변한다. 영국의 소설가 겸 비평가인 버지니아 울프(Adeline Virginia Woolf)는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이 문학을 하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여기서 자기만의 방은 사적인 공간을 말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살았던 당시에는 여성들에게 허락된 사적인 공간은 부엌이 전부였기 때문에 울프는 여성 인권을 주장한다. 하지만 나는 이 구절을 읽고 나의 방이 떠올랐다. 내 방의 책상 앞에 앉기조차 싫어하는 나와 오로지 자신을 위한 공간인 방 안에서 마음의 휴식을 취하고 감성을 충전하는 사람들을 비교해보니 ‘공간’은 사물을 이용해 꾸밀 수 있는 물리적 공간 또는 마음속에 내재한 공간이라는 정의보다 사람에게 더 큰 영향력을 준다는 생각을 했다.

  나와 같이 성장할 수 있는 장소가 존재한다는 것, 나의 역사를 담을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이다. 공간은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함께 자라난다. 공간을 채우는 것은 단순히 시멘트, 벽지, 마감재와 같은 물질이 아닌 온도, 냄새, 소리, 그리고 삶 모든 것이다.


[박이슬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5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