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출구 없는 고통,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시각예술]

글 입력 2016.08.07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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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수남(이정현)은 현실사회에서 약자의 위치에 놓여져 있고, 강자들이 퍼붓는 폭력을 그대로 받아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는 인물이다. 그녀는 여성이며 배우지 못한 사람이며, 경제적으로 허덕이며 살고 있다. 소위 빽도 줄도 없는 사람이다. 더욱이 그녀는 거친 사회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방패가 되어 줄 수 있는 남편(이해영)조차 잃었다. 수남에게 남아있는 것은 특별한 장애가 없는 자신의 신체이지만 신체의 건강함은 ‘열심히 살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그녀를 더욱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려 버린다. 그녀에게 가해지는 폭력들은 우리 사회에 이미 만연해 있는, 구조화되어 있는 폭력들이다. 홀로 남겨진 수남이 이 폭력의 연쇄를 끊어내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열심히 일하는 수남.jpg

 
지속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수남의 모습에서 가장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장면은 남편의 잘린 손가락과 수남의 부르튼 손가락이 겹쳐질 때다. 사고로 손가락을 잃은 남편이 실성해 누워 있는 동안 우리도 지극히 관망하는 입장에서 수남의 돈벌이를 바라본다. 남편이 수남의 고생을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처럼, 급박하게 몰아치는 수남의 일상에 우리의 동정심이 들어갈 여유는 없어 보인다. 수남의 일상에 쉼표를 주지 않던 카메라는 남편의 잘린 손이 수남의 부르튼 손을 감쌀 때가 되서야 잠시 감정을 싣는다. 다소 감정 없이 수남의 버거운 일상을 관망하던 우리도 그제서야 수남의 일상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남편의 잘린 손가락보다 수남의 부르튼 손가락이 더 가슴아프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가장 큰 장점은 이처럼 구조화된 폭력 속에 고통 받는 수남의 모습을 코믹판타지라는 장르의 특성에 힘입어 개성있게 표현해 내는 방식이다. 주목할만한 부분이 많은 이 영화를 그럼에도 동의하기 힘든 이유는 수남의 고통을 끌어안는 영화의 방식 때문이다.
 

남편과 수남.jpg

 
수남이 폭력의 연쇄를 끊어내는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에 비해 다소 비현실적이고 급작스러운 ‘판타지적 액션’들에 의해서다. 수남은 자신에게 쏟아져 내려오는 폭력을 견뎌내기 위해 익혀두었던 생활밀착형 기술(?)들을 이용해 응어리진 분노를 표출하며 서서히 모두에게 복수를 행한다. 자신에게 신체적 폭력을 가한 원사(명계남)와 분노조절 장애를 겪고 있는 청년부장(이준혁)을 시작으로 이 둘의 뒤에 있던 상담사(서영화), 그리고 국가로 대변되는 형사들까지. 수남의 폭력은 통쾌하지만 동시에 불쾌하다. 결과적으로 영화에서 가장 과도한 폭력을 행하고 있는 것은 수남이다. 자신에게 주먹질을 한 사람에게는 불을 질러 버리고, 감금한 자는 심장을 꿰뚫어 살해한다. 상담사는 독살하며, 형사들은 식칼로 살해한다. 그녀가 복수를 행하기 위해서는 가장 악독한 자가 되어야 하며, 지금 우리 사회에도 만연해 있는 폭력들을 힘없는 약자가 방어하기 위해서는 ‘판타지적 액션’ 이라는 비현실적인 ‘백마 탄 왕자’가 필요하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수남은 가장 악독한 길로 가는 것을 선택하지만 복수는 사회 구조적인 지점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피상적인 복수에서 멈춘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수남의 고통을 나열하지만 끝내 수남의 고통들을 끌어안지 못한다. 안국진은 단순히 우리가 몸소 느끼고 있는 현실의 폭력들을 판타지라는 장르 안에서 표현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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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지점에서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지아장커의 <천주정>을 떠올리게 만든다. <천주정>의 힘 없는 하층민들은 당대 중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폭력에서 허덕이고 있으며, 폭력의 수령에서 ‘무협’ 이라는 급작스럽고도 비현실적인 힘의 개입을 통해 잠시 빠져나온다. 이들 또한 수남과 마찬가지로 피상적인 복수만 행할 뿐, 근본적인 해결에는 닿지 못한다. <천주정>의 4가지 이야기 중 유일하게 ‘무협’의 힘을 빌려 복수를 행하지 못하는 인물이 있다. 어린 나이에도 가족의 생계를 책임주고 있는 청년 샤오후이는 비참한 현실 속에서 그 어떤 의지를 표명하지 못한채 자살을 시도한다. 샤오후이만이 <천주정>에서 유일하게 무협이라는 장르로 포섭되지 않고, 복수의 의지를 내보이지도 못한다. 지아장커가 내보이고 싶었던 이야기는 장르의 마법으로도 감정을 표출하지 못하는 샤오후이의 이야기였을지도 모르겠다.
 

위협하는 수남.jpg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서는 유일하게 남편의 담당의(정영기)만이 판타지 장르 밖에 위치한 인물로 보인다. 담당의는 상담사의 외모, 원사의 옷차림, 청년부장의 분노와 같이 과장되어 있지도 않으며 남편에게 보청기를 심어준 의사, 복어독에 대한 설명처럼 판타지 장르안에서 묘사되지도 않는다. 그는 수남이 맞서 싸우는 폭력과 거리가 있어 보이고 그저 수남에게 측은지심만을 느낀다. 쉽게 말해 담당의는 수남의 안쓰러움하고만 관계 맺는, ‘성실한 나라’의 밖에서 수남의 고통을 바라만보고 있는 우리와 가장 흡사하다. <천주정>에서 유일하게 무협의 밖에 있는 샤오후이가 주었던 울림을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가 주지 못하는 이유는 유일하게 ‘성실한 나라’의 밖에 머무르고 있는 담당의가 수남의 고통을 제외하고는 영화와 어떤 관계도 맺고 있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성실한 나라’의 안과 밖 모두에서 외면 받은 수남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어디로 뻗어 있는지 모를 길을 하염없이 떠나는 것 뿐 이었을지 모른다.


[조선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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