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가무극 < 왕과 나 >

글 입력 2016.08.06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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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사이트(www.artinsight.co.kr)를 통해 미마지아트센터 눈빛극장에서 연극 <왕과 나>를 보았다. 이미 2012년에 두산아트센터에서 호평을 받은 바 있는 이 작품이 나에게는 어떻게 다가올 지 매우 궁금하고 기다려졌다. 식상하다면 식상할 수 있는, 숙종과 장희빈의 이야기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극단 떼아뜨르봄날의 표현을 빌자면, '가무극'이라는 이 작품이 어떤 노래와 어떤 춤들을 통해 그 이야기들을 들려줄 지 궁금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하기도 쉬운 편인데, 나는 이 음란치정가무극 <왕과 나>를 아주 씁쓸하면서 동시에 매우 즐겁게 감상했다. 정말 그럴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시놉시스>

장희빈으로 잘 알려진 장옥정과 그녀의 남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잘 알려진 바와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조선 19대 왕인 숙종은 신참 나인 장옥정을 보고 한눈에 반해 사랑에 푹 빠집니다. 그 과정에서 이른 바 남인과 서인의 정쟁이 한몫 한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인에게 핍박 받던 남인이 서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이른바 미인계를 썼다는 얘기인 거죠.
어쨌든 장옥정은 왕의 총애를 받아 금세 후궁이 되고, 머지않아 원자를 출산하게 되지요. 하지만 머지않아 숙종과 왕비 장옥정 사이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좀 지겨워졌겠죠.
제 아무리 예뻐도 오래 같이 살면 그럴 수 있는 법이지요.





숙종과 장희빈의 연애사를, <왕과 나>는 아주 적나라하게 다루었다. 사랑의 감정이 싹트는 그 첫만남에서부터 뜨거운 성애까지 아슬아슬한 움직임과 소리들로 그려냈다. 여기에서부터 이 작품이 역사적 사건을 다루지만 정통사극이 아니라는 것이 명확하다. 왕과 한 때 중전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후궁의 이야기가 아니라, 아주 원초적인 남녀상열지사를 보여주는 것이다.

봄날처럼 따뜻하고 행복에 겨운 나날을 보내며 서인들을 숙청하는 장면 속에서도, 장옥정과 숙종은 그저 희희낙락하기에 바쁘다. 그 불타오르는 사랑과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비극이 한 무대에서 동시에 보여지는 모습이 불현듯 기괴하게 느껴졌다. 사랑의 맹목성이란 이런 것이던가. 콩깍지가 씌었다는 귀여운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그로테스크한 그 대비가 눈앞에서 선명하게 펼쳐지니 일순 숨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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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흘러갑니다, 강물보다 빠르게
사랑은 식어갑니다, 용암보다 더 신속하게


그 숨막히는 대비의 끝에 장면이 전환되기에 앞서 장면의 전환을 예고한 말이었다. 누구나 알듯, 숙종은 훗날 경종이 되는 원자를 생산한 장옥정에 이어, 미래에 영조가 될 왕자를 낳는 무수리를 총애하기 시작했다. 인현왕후를 내쫓고 장옥정을 중전으로 맞이하면서까지 총애했던 그 마음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서로에 대한 사랑의 감정보다 미움이 싹트기 시작한 숙종과 장옥정의 관계. 극 중에서 나왔던 것처럼 '모든 게 짧은' 인생에서 그보다 더 짧고, 강렬하고, 그래서 더 허무한 사랑의 진면목이 극대화되는 시점이기도 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가지게 할 수 있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잃게 만들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 위기가 절정에 이르러 끝내 연극 <왕과 나>의 백미에 이르렀을 때에는 정말 숨을 쉬는 것도 잊었던 것 같다. 이 연극의 백미는 극의 최절정부에서 옥정이 보여주는, 무언의 독무라고 생각한다. 그 무엇도 말하지 않지만, 장옥정은 자신의 가장 화려한 한복조차 벗어 내려놓고 말없이 몸짓으로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배경음악도 없고, 그 어떤 소리도 나지 않는 가운데에서 끊임없이 반복하는 장옥정의 춤은, 숙종에 대한 원망과 지난 날 사랑이 가득했던 그 시절에 대한 회한, 장옥정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모했던 화공의 죽음에 대한 연민, 가졌던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허무 그 모든 것들이 녹아 있었다. 사무치는 그리움과 이루 말할 수 없는 미움이 한스럽게 묻어났다. 역사에서는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고 나와 있기에 장희빈을 그리는 대다수의 작품들이 이 대목에서 장희빈의 극악무도한 모습을 극대화시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접근이었다. 장옥정의 독무는 비단 그녀의 회한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을, 슬프고도 우스운 인생의 진면목이었다.

끝끝내 장희빈이 사약을 받은 그 순간, 극단 떼아뜨르봄날은 장희빈이 실제로 숙종에게 보냈던 언문 편지를 읽었다. 불타오르는 사랑이 영원하리라 믿었던 그 시절의 장옥정이 숙종에게 속삭이는 밀어였다. 그 덧없는 서신의 울림이 객석을 가득 채우는 동안, 장옥정과 숙종을 제외한 모든 배우들이 무대를 서성이며 '첫사랑을 당신은 잊었나요'라며 조용히 읊조렸다. 그 가운데 극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숙종은 이 행열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 가슴 아픈 대비로 무대는 결국 끝맺어졌다.




단순히 음란치정극이라는 데에만 집중해서 보기에는 넘치는 작품이다. 극의 중간 중간에 성적인 묘사와 우스꽝스러운 요소들이 포함되었던 것은 결국 후에 나타날 인생과 사랑의 허무함을 극적으로 대비시키기 위한 장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초반에는 웃음을 터뜨리기에 바빴던 관객들이 어느새 극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 간극이 결국 인생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었던 탓이다.

아주 한국적인 내용을 현대적으로 접근하여 연출하고 풀어낸 것이 매우 색달랐다. 특히 극의 배경음악을 녹음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북, 하모니카, 멜로디언 등을 사용하여 현장에서 풀어냈기에 더더욱 감정이 극대화되었다. 배우들이 직접 아리아처럼, 적절한 순간마다 노래를 부르며 소리의 향연을 풍성하게 만든 것도, 배우들이 어우러져 한국적인 선을 그리며 춤을 추는 모습도 매우 중요한 기제였다. 개인적으로는 숙종의 어머니인 대비의 죽음을 나타내며, 대비 역을 맡은 송은지 배우가 부채춤을 추는 가운데 북소리가 둥둥둥하고 울려퍼지던 그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노골적이게 유쾌한 동시에 형언할 수 없도록 슬픈 사랑의 진면목을 보여준 연극 <왕과 나>.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린 극단 떼아뜨르봄날은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가장 현대적인 무대를 구현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스스로를 표현한다. 이 작품을 보고, 극단 떼아뜨르봄날이 목표하는 이상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나를 압도한 이 무겁도록 벅찬 감정을, 극단 떼아뜨르봄날이 또 어떤 작품으로 안겨줄 수 있을지 기다리게 될 것 같다.




[석미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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