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누구보다 능숙한 '아이'의 세계, 호안 미로 특별전

글 입력 2016.08.03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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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능숙한
아이의 세계
호안 미로 특별전


호안 미로 포스터(RGB)-02.jpg
 

“아이들이 그린 그림 같아!”

제가 호안미로 특별전을 보면서 든 생각입니다. 초현실주의, 하면 늘상 따라붙게 되는 말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처음에 저는 이 생각을 하면서 굉장히 부끄러웠습니다. 저런 생각 자체가 제가 초현실주의에 대해서 무지하며, 또 이해를 하지 못하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라 느껴졌거든요. 게다가 '아이'라 하면 미숙함의 상징인데...프로 작가의 그림을 보며 저런 생각을 하는 것에 대해서 미로 작가에게 죄송한 마음까지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호안 미로 특별전을 모두 관람하고 난 지금. 저는 아무런 부끄러움도, 죄송함도 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호안 미로의 그림은, 아니 호안 미로는 아이 같다.”고 말이죠. 


아이, 알 수 없는.

전시 초입에 호안 미로 작품에 무제가 많은 이유가 설명되어있는데요. 호안미로는 ‘제목’자체가 언어의 테두리로 보는 사람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것을 원치 않아서 제목을 짓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을 읽는 순간 저는 설렘과 동시에 약간의 두려움이 들었는데요. 이만큼이나 확고한 신념의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게 될 것이라는 설렘과 함께, 대체 어떤 그림이기에 제목이 상상력을 제한할 수 있는지- 또 제가 그 그림을 제대로 감상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이 들었습니다.


제목 없음1.jpg
우 원래 그림, 좌 덧대어 그린 그림


 그 두려움은 현실이 되어, 사실 첫 작품을 관람할 때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이게 뭘까’ 였습니다. 본디 공포는 ‘익숙하지 않은 것’에서 시작 된다 그랬나요? 호안 미로의 그림은 제게 약간은 공포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의 그림은 현실에 없는 형상이었고, 그렇기에 익숙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그러다 진심으로 호안 미로가 궁금해지기 시작한 것은 예전 자신의 그림에 덧대어 그린 작품을 보았을 때부터였는데요. 현실을 모방한 회화에 익숙해져있던 제게는 무척이나 훌륭한 작품이었음에도 호안 미로는 스스로의 과거 작품을 부정하며 파기하고, 위에 덧대어 그렸습니다. 그만큼 스스로의 현재 회화에 신념과 철학이 있고 또한 그만큼 치열하게 고민을 하고 있다는 뜻이겠죠. 이때부터 익숙하지 않음에서 오는 공포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이 작가를 알아가 보고 싶어졌습니다.

하지만…무제가 많은 것부터 알아봤어야 할까요. 그렇게 알아가 보기 시작한 작가는 괴이했습니다. 정말 아무렇게나 선을 그은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되는 선과 색들…작가를 알아가 보자고 결심했던 그 마음조차 형체를 알 수 없는 그림들 사이에서 사그라드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알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접어두고 마음을 내려놓으니, Section 1 후반부부터 그림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무엇인지, 뭘 나타내고자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그저 마음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괴이하게만 보였던 그림들에 감탄도 할 수 있게 되었죠.


아이, 세계 본질을 바라보는.

Femme dans la rue, 1973.jpg
Successió Miró / ADAGP, Paris - SACK, Seoul, 2016


“머리의 외형은 매우 잘 만들어져있다. 그러나 손은 영혼과도 같다. 이해력에는 태초의 원대한 힘을 왜곡할 위험도 잠재되어있다.”

“이 세상 전체가 당신을 보고 있다. 모든 곳 반반한 천장에, 나무에, 모든 곳에 눈이 있다.”


위 두 문장들은 호안 미로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요. 머리로의 ‘이해’가 아닌 손으로의 감촉, 직관적인 감상을 바랐던 호안 미로. 우리가 ‘알고’ ‘보고’있는 세상이 아니라, 만물에 생명력이 있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상. 틀에 갇혀 사는 우리는 보지 못한 세상의 본질. 호안미로가 보고있는 세상은, 또 우리에게 느끼게 해주고 싶던 세상은 그런 세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호안 미로가 더욱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 것은 Section2로 넘어가면서 부터였습니다. “각각의 먼지 한톨은 놀라운 영혼을 지니고 있다.” 호안미로는 만물에 생명력이 있는 그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원시시대 부족들의 감각을 탐했는데요. 장인들이 원시시대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해 수공업을 하거나, 원시적인 엽서를 모으는 등으로 그 감각을 최대한 일깨우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맥락으로 생각하니, 호안 미로의 그림을 감상하는데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제 ‘이해’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감상’을 바라니 말이죠.

이때부터, 호안 미로의 그림을 ‘해석’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보이는대로 느끼고, 그가 바라보는 세상을 느껴보고자 했습니다. 그래도 잘 와닿지 않는 것은 그저 그가 바라보는 세계일 것이라 어림짐작할 뿐이었습니다. 우리 눈에 A라고 보이는 물체가 있다면 A라는 틀에 박혀서 A로밖에 바라보지 못하는 우리와는 다르게, 호안미로는 틀에 박히지 않은- 태초의 순수한 아이의 시선을 가지고 있는 듯 했으니 말입니다. 


아이, 시를 그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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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는 시인처럼 작업한다. 먼저 단어가 떠오른다. 생각하는 것은 그 다음이다.”


  호안 미로의 작업방식은 시와도 많이 닮아있었는데요. 언젠가, 신경숙 시인이 자신의 시로 낸 수능문제를 풀며 ‘내 시는 이렇게 어렵지 않다’고 했다던 일화가 떠올랐는데요. 호안 미로도 시인과 같습니다. 그저 감상을, 느낌을 바랄 뿐이죠. 자신의 그린 의도나, 그 깊은 뜻을 수용자가 알아도 알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그 그림이 수용자에게 어떠한 감명을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죠. 

호안 미로의 이러한 시적인 감각은, 그가 아티스트북을 작업하게도, 또 직접 시를 쓰게도 했는데요. 그는 ‘황금 깃털을 가진 도마뱀’이란 작품에서 직접 쓴 시를 캘리그라피로 표현한 후, 각 시구에 이미지를 그려 석판화를 제작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인상 깊었던 것은 도마뱀 이미지를 대형 태피스트리로 다시금 표현해낸 것인데요! 앞서 수공업을 시도한다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보여, 어찌보면 뜬금없는 맥락의 테피스트리도 그의 하나의 작품으로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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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품을 보는 사람들에게 내가 왜 이러한 그림을 그렸는지 설명하고 싶다. 어느날 나는 사물들의 비밀스런 인생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표의문자인 기호에 도달하기 위해 점점 외부 현실을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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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수단으로 최대한의 강렬함에 도달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이것이 나의 그림이 점점 더 장식이 없는 성격을 띠게 되는 이유이다.”


호안 미로의 이러한 시적 감각은 동양 서예에 빠지면서도 드러났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동양의 서예나 수묵화만큼 시적인 그림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종이에 검은 텍스트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해내는 시와 같이, 수묵화나 서예도(서예는 그 자체로 글이긴 하지만) 검은 선 하나로 모든 것을 표현해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제 개인적인 사견대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호안 미로는 시를 사랑했듯 동양의 서예 또한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서 장식적인 요소, 색채를 최대한 배제하고 주로 검은색만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데요. 

제가 크게 감명을 받은 그림들도 대부분 이런 계열의 그림이었습니다. 하얀 종이에, 그저 검은 선이 그어져있을 뿐인데. 심지어는 복잡하지도 않고, 단순한 선 몇 개일 뿐인데 그 그림을 보는 순간 터져나오는 탄성을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표의문자가 상을 따온 것에서 최대한 간소화 시키며 시작되었 듯, 호안 미로도 그의 말처럼 가장 본질적인 ‘기호’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외부의 상을 배제시켰기 때문이었을까요. 가장 직접적이고도 오묘한 무언가가 느껴졌습니다. 그의 말대로, 최소한의 수단으로 최대한의 강렬함을 느끼게 된 것이죠. ‘시’를 좋아하는 화가는 어느새 형상을 넘어서, 추상을 그리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 그림을 ‘만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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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표현 방식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면, 나는 최대한 명백한, 강한 힘을 지닌, 그리고 조형적으로 공격적인 것에 도달하도록 노력한다. 즉, 먼저 신체적인 감각을 자극하고 이어서 영혼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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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가 결정을 내리면 나는 배경을 깨긋이 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캔버스 위에서 움직이는 나의 붓은 가솔린을 머금는다 해도 마찬가지로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드로잉의 경우 나는 종이를 구기고 적시며 흘러내는 물은 형태를 그린다.”


호안 미로는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림을 ‘만드는’ 작가에 가까웠죠. ‘그린다’고 하면 일상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펜, 붓따위에서 벗어나 본인의 손과 발은 물론 주변의 다양한 것들을 그림에 시도했습니다. 손에 물감을 묻혀 찍는다거나, 신발에 묻혀 밟는 것부터 식물성 빗자루를 붓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물감을 그대로 그림에 짜 넣기도 했습니다. 사포로 그림을 문지르거나, 시장에서 산 무명화가의 유화를 배경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죠. 

그림을 표현해낼 수만 있다면 미로에게  ‘화구’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던 것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재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의 재료는 ‘물감’뿐이 아니었습니다. 붓을 빤 물이나 유화물감을 녹인 더러운 테레빈유, 혹은 가솔린을 캔버스에 부어버리거나, 판자를 떼와 그림에 못으로 박는 등. 그의 작품에 있어서 ‘물감’이라는 재료의 틀은 존재하지 않았죠. 그는 ‘그린다’라는 말의 일상적인 통념을 깨는 시도들을 많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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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 할 수만 있다면 이미 ‘그리다’는 행위에서 벗어난 미로기에 그의 작품세계는 조각이나 아상블라주 까지도 포괄합니다. 틀에 박히지 않은 세계의 본질을 보는 그에게, ‘그리다’라는 틀은 너무도 좁았던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회화도 조각처럼, 조각도 그림처럼. ‘회화’나 ‘조각’을 그리지 않고, 조각하지 않고 그저 그의 ‘작품’으로서 ‘만들어’냈던 것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아이, 호안 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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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ccessió Miró / ADAGP, Paris - SACK, Seoul, 2016  


아이들은 알 수 없는 형태를 그립니다. 그를 보고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형태를 표현할 줄 몰라서’그렇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그건 이미 틀에 박힌 생각을 가진 ‘어른’들의 착각이 아닐까요? 아이들의 그림엔 아이들이 바라보는 세상이 담겨있는지 모릅니다. 사람의 피부색이 파란색이어도, 보라색이어도 되는 세상. 사람의 형태가 세모여도, 동그라미여도 되는 세상. 그저 ‘본질’만이 중요할 뿐 형태 따위, 세상의 상식이나 법칙따위 아무래도 좋은 세상 말입니다. 그렇기에 아이들의 그림은 ‘어른’인 우리가 보기에는 이상하고, 미숙해 보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그림, 아이들이 그린 그림 같아!”

전시를 다 보고 나온 지금. 다시금 관람 초반에 떠올렸던 생각을 되새겨봅니다. 제 첫 감상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그림은 아이 같습니다. 세상의 본질을 바라보는, ‘시’ 등의 추상을 그리는, 틀에 갇히지 않고 그림을 만드는 호안 미로! 그의 그림은 자신이 보는대로, 느끼는대로,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표현 핸내는 아이들의 것과 같으니 말입니다. 그의 그림은 아이 같습니다. 그에게 ‘아이’는 더 이상 미숙함의 상징이 아닙니다. 외려 순수함, 그리고 세상을 정확하게-또 자유롭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을 말하죠. 그의 그림은 아이 같기에 더욱 아름답고, 더욱 의미 있습니다. 

전시회장을 나서기 전, 저는 속으로 호안 미로에게 조용히 말을 걸어보았습니다.


‘당신의 그림은, 아이의 그림 같습니다.‘


어쩐지 그가 이 말을 들으면 기쁜 얼굴로 미소 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적어도 제가 꾸는 ‘꿈’의 세계에서는 그는 그렇게 웃고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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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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