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난해하고 지루한 것들을 위하여 [예술철학]

난해하고 지루한 것들을 위한 나름대로의 변호
글 입력 2016.07.10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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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변에서 가끔 ‘이 영화 어때?’라거나 ‘이 책 어때?’라고 질문을 받는다. 그러면 ‘그 영화보단 이 영화가 좋아’라거나, ‘그 책도 좋지만, 이 책을 읽어봐’라고 대답한다. 얼마 뒤, 대부분의 사람들이 ‘뭐 그런 난해하고 지루한 것을 추천해줬냐’며 불평한다. 꽤 오랜 시간동안 ‘그런 난해하고 지루한 것’들이야 말로 예술이 지켜야 할 자존심이라고, 다소 허세 가득한 목소리로 역설해왔다. 근래에 들어서는 그것이 정말 예술인가에 관하여 스멀스멀 회의감이 피어올라 전처럼 큰 소리로 확신하지는 못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남은 젊음의 패기를 끌어 모아, 다시 한 번 난해하고 지루한 것들을 위한 나름대로의 변호를 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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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 그 중에서도 특히 요즈음의 예술은 어렵다. 어려우면서 복잡하고, 지루하기까지 하다. 물론, 이를 흥미롭게 느끼는 예외적인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들을 일종의 ‘문화 변태’로 미뤄두면, 보편적인 대중의 체감은 ‘현대 예술은 난해하다’라는 명제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근래의 예술이 왜 이렇게 어려워졌는지에 대해 이해하려면, 예술이 그동안 어떻게 정의되어 왔는지에 대해 짚어 보면 보다 접근이 용이하다.

 예술을 정의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예술이라는 단어가 그만큼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사용되고 모호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특정하게 개념화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예술에 대해서, 철학자 및 미학자들은 그 본질을 추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시도 끝에, 미학(예술철학)은 대표적으로 모방설, 상상설, 상징설을 예술관으로 성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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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방설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철학을 기반으로 예술을 설명한다. 그는 예술이 참된 실제(ousia)의 모방, 즉 ‘이데아(idea)의 모방’이라고 주장했다. 예술을 자연의 재현이라고 바라보는 그리스 철학의 모방설은 18세기 전반까지 서양 예술계에서 주도적인 이론이었다. 16세기에 시작된 신고전주의와 19세기 자연주의 계열에 이르기까지 이 모방설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에 반해 철학자 루소는 예술을 ‘경험적 세계의 기술도 재현도 아닌, 감동과 정열의 분출’이라고 정의한다. 이와 더불어 미학자 레이놀즈는 그의 저서 ‘예술론’에서 ‘예술은 본질적으로 자연의 모방이라기보다는 확대’라고 선언한다. 예술이 단순히 아름다운 자연을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변형하고 미화할 수 있는 여지를 인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인간이 상상하고 느끼는 정신세계의 표출이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무용이론가이자 미학자인 랭거는 예술이 “어떤 개인의 정념이나 애정이나 동경이 아니고, 우리들이 그러한 감정을 갖고 있는 척하는 것도 아니며, 그것들을 파악하고 실감하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직접 이해력에 현존시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예술 작품이 한 예술가 개인의 변덕이 아니라면, 그것은 보편적인 전달성과 상징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 형식 체계는 곧 상징, 의미 체계로서의 일정한 예술 형식을 형성한다.

 예술은 이처럼 단순히 자연을 모방하는 것에서, 인간의 상상력이나 감정을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과정을 거쳐, 상징이나 형식 체계로서 예술성을 지니는 식으로 저변을 확대했다. 현대 예술은 이에 더하여, 기존의 예술적 형식을 변주하거나 응용하여 새로운 의미를 형성하고 성찰을 불러일으키는 등의 표현을 계속해서 시도하고 있다. 예술가가 모방을 넘어 비가시적인 것을 작품으로서 보여주려고 하는 시도는 현대예술에서 특히 중심적인 것이 된다. 이러한 방향성이 대중과의 괴리감을 더욱 심화한다. 현대 예술은 이전에 지배적이던 질료와 형상이라는 고전적 범주를 깨고 돌파하여 새로운 창조의 장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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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왜 이렇게까지 ‘난해하고 지루하게’ 예술에 대해 논의해야 할까. 그것은 애초에 물었던 질문, ‘이 영화 어때?’나 ‘이 책 어때’에 대한 대답의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어때?’라는 질문에서 화자가 무엇을 물어보고 싶었는지에 따라 대답은 달라진다. 그것이 ‘재미있어?’ 라거나 ‘시간 때우기 좋아?’라는 질문이었다면, 이러한 논의가 불필요하다. 재미나 흥미, 시간 때우기는 각자의 성향에 따라 그럴 수도 혹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질문이 ‘예술적이야?’ 라거나 ‘시간을 들여 느낄만한 가치가 있어?’라는 의미를 지닌다면, 그것의 예술적 가치에 대한 고려는 불가피하다. 위와 같은 논의에 따르면, 비록 어렵고, 복잡하고, 지루할 지라도 시간을 들여 느끼고, 곱씹어볼만한 작품들도 있다.

 이러한 주장이 자칫 소수 엘리트 문화만의 특권을 옹호하는 것처럼 왜곡될까 조심스럽다. 그러나 지나치게 흥미와 자본의 논리로 문화적 관심과 수요가 편중되는 최근 경향을 우려하는 입장에서, 흥미가 떨어지고 자본도 적은 문화들만의 가치와 의미에 무게를 실어주는 목소리가 좀 더 많아졌으면 한다. 소위 ‘고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여러 작품들을 살펴보면, 그것이 비록 난해하고 지루한 측면이 있더라도 그 뒤에 따라오는 지적 유희와 생소하고 다른 세계, 성찰적 깊이 등이 있기 때문에 오랜 세월 인류 문화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조금만 늘어지는 이야기를 시작하면 ‘진지충’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지는 시대에, 이러한 예술이 지닌, 지난한 담론에 면죄부를 쥐어주어야 한다.


[최연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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