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지슬-아픈 역사를 차분하게 돌이켜보기 [시각예술]

글 입력 2016.06.22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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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남자가 칼을 뾰족하게 갈고 있고 다른 남자가 들어온다. 칼을 빌려 쥐고 있던 배를 잘라 함께 건네주고, 자신도 크게 한입을 베어 문다. 하지만 영화가 전개되면서 이 칼이 과도가 아닌, 자신들이 믿는 '폭도'를 찌르기 위한 칼이었음이 드러난다. 그 피 묻은 칼로 아무렇지 않게 과일을 썰어 먹고, 또 아직 숨이 붙어있어 다리를 떠는 시체의 옆에서 아무렇지 않게 대변을 눈다. 그만큼 오래된 군인들은 사람을 죽이는 것에 일말의 감정도 동요하지 않는다. 카메라도 가만히 멈춰서 그들을 지켜볼 뿐이다.

여기서 조금의 변화를 암시하는 인물은 이제 갓 스무살이 된 어린 군인들이다.


"폭도라는 게 진짜 있긴 한걸까
"야 우리가 폭도 때문에 이러냐 명령 때문에 이러지."


인간성이 소멸된 듯한 숨막히는 부대에서 사람을 죽이지 못했다는 이유로 두 어린 군인이 벌을 받으며 나누는 대화이다. 어린 여자아이에게 총을 겨눴지만 결국 쏘지 못했다. 그녀는 결국 잡혀와 잔혹한 성폭행에 시달리게 되고 차라리 그때 그녀를 쏘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는 생각을 잠시 한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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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그래도 사는게 더 나아"


그만큼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아무리 힘든 일들을 겪어온다고 해도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기회와 희망과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목숨은 그만큼 그 누구도 빼앗을 권리가 없다.


마지막 인물은 군인들을 피하여 산 속 동굴로 도망을 온 마을 사람들이다. 그 속에는 노모를 두고 온 아들과 만삭의 아내, 일제감정기에 친일 행동을 하여 마을 사람들로부터 따가운 눈초리를 받는 늙은 노인, 말근육을 자부하며 달리기를 잘한다는 청년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다. 이들은 죽음의 위험으로부터 도망쳐 온 무고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목숨을 위협받는 사람들이라고 하기에 그들은 다친 군인이 먹을 지슬(감자) 하나를 남겨줄 만큼 순수하고 평온해보이기도 한다. 영화는 만삭의 아내가 몸으로 동굴에서 마지막에 빠져나오지 못하고 쓰러져 있고 그 옆에서 갓 태어난 아기가 우렁차게 우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참혹한 역사 속에서 탄생한 새로운 생명의 울음소리를 통해 작은 희망의 씨앗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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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오랫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제주도 4.3사건을 영화적인 매력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훌륭하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우선 흑백영화라는 점은 유혈이 낭자하는 당시의 풍경을 한층 가라앉은 태도로 볼 수 있게 한다. 너와 나를 구분하고 무참히 살해하는 역사를 색의 차이가 없는 흑백으로 무던하게 묘사하는 것이다. 이에 거의 움직임이 없는 카메라도 몫을 더하며 관객에게 하여금 어떤 감정이나 메시지를 억지로 주입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관객은 스스로 당시의 역사를 생각하고, 고민하고, 기억할 시간들을 더 부여 받게 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 영화는 국내 영화임에도 제주도 방언이 쓰였다는 점에서 한글 자막이 나온다. 영화의 사실성을 높이기 위한 장치이지만 자막을 통해서 영화를 본다는 것 역시 한번 더 관객을 멀찍한 위치에 놓음으로 인해 성찰의 기회를 마련해준다고 생각된다.


영화 내내 가장 악독하게 묘사되었던 늙은 군인은 마지막에 자신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던 부하 군인에 의해 죽임을 맞게 되며 제발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친다. 이 늙은 군인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생명을 생각했다면 이처럼 참혹한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앞으로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제주도 사람들에게 4.3 사건은 오십년이 훌쩍 지났음에도 씻겨지지 않는 아픔으로 남아있다. 당시 제주도민의 4분의 1이 몰살을 당했다고 한다. 한 집안에 한명은 목숨을 잃은 셈이다. 너무 늦었지만 이 영화가 그들의 한을 풀어줄 작은 씻김굿이 되리라 믿는다.
 


[박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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